#71. 이렇게 위험한 곳이었다니2022.02.01.
기호가 쓴 갑질 기사가 나가고 준우가 경찰서에서 재오를 맞닥뜨렸던 날 밤. 집에 돌아온 준우는 윤완에게 전화부터 했다.
[처리했다. 네가 말한 발로 뛴 작자들.]
“…….”
[그쪽에서 먼저 폭력을 행사해 주시는 바람에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어. 이걸 빌미로 다른 죄목도 하나하나 엮어가 보려고.]
폰을 통과한 준우의 목소리가 낭랑히 울려 퍼졌다. 시끌시끌한 주변 소음을 뚫고 나오기에 무리가 없는 크기였다.
“수고했어.”
일 처리가 깔끔해서 좋은 녀석.
[근데, 주위가 왜 이렇게 시끄러워?]
예민한 준우는 금방 특이사항을 짚어냈다.
[혹시 나린이랑 있어?]
그의 추리는 정확했다. 이것뿐이지. 도윤완이 특이한 곳에 있을 이유라면.
“응.”
[알았어. 끊어.]
눈치까지 빨라서 더 좋은 녀석. 막 통화를 끝낸 윤완이 폰을 내려두는데, 맥주잔을 집으려던 나린이 멈칫했다.
“벌써 다 먹은 거예요?”
윤완의 손을 벗어난 포크가 테이블 위에 반듯하게 내동댕이쳐져 있다. 소시지는 아직 반도 넘게 남았는데.
“응.”
나린에겐 맛있는 맥주도 그에겐 그저 싸구려 맥주였고, 나린이 감탄해 마지않은 수제 소시지도 그에겐 도저히 씹어 삼킬 수 없는 인공 감미료 결정체였다.
“……맛있기만 한데.”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며 나린이 속상해했다. 오늘만큼은 꼭 나린에게 익숙한 장소로 가겠다고 우긴 사람이 그였다. 난 어디까지나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이런 데 오자고 하지 마세요.”
나름 신경 써서 고른 펍인데 결과가 처참하자 풀죽은 나린이 툴툴거렸다.
“괜찮아. 나름…… 신선해.”
요란한 배경 음악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윤완의 목소리가 자꾸만 파묻힌다.
“뭐라고요?”
인상을 쓴 나린의 얼굴이 그의 앞으로 한 뼘 다가왔다. 목소리 크기도 한 뼘 더 키워져 있었다.
“괜찮다고.”
큰 소리를 내는 게 익숙지 않은 윤완의 성량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답답했는지 나린이 총총 그의 옆자리로 옮겨왔다.
“잘 안 들려서 안 되겠어요.”
맥주잔을 당겨오며 밝게 소리쳤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서도 나린의 미소만큼은 또렷이 보였다.
“나갈래요?”
소음이 좁혀준 거리. 이것도 나쁘지 않네.
“아니.”
“배 안 고파요?”
“괜찮아.”
“그래도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돼요?”
소시지가 꽂힌 포크가 그의 입술 앞에 놓였다. 눈앞에서 한들거리는 미소가 결심을 흔든다. 세이렌에 홀린 뱃사람처럼, 덥석 소시지를 받아먹었다. 그의 입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새, 나린의 앙증스러운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먹어서 예쁘다.”
윤완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린의 장난에 끔찍했던 소시지 맛도 금방 잊혔다. 접시가 바닥을 보이고 맥주잔도 다 비워진 연후에야 나린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다 먹었으니까 진짜로 나가요.”
윤완이 계산을 하러 간 사이 나린 혼자서 털레털레 입구 쪽으로 향한다. 출입문에 다다랐을 즈음, 뒤에서 세차게 부딪혀 오는 우악스런 몸짓에 나린의 몸이 휘청거렸다.
“뭐야?!”
먼저 속도를 높여 부닥친 주제에, 상대방은 무대포로 버럭 성을 냈다. 돌아보자 딱 봐도 거나하게 취한 중년 남성이 나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부딪히셨잖아요.”
나린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누가 길을 막고 서 있으래, 그러니까!”
고성에 반말까지. 술에 취한 남자에게 혼자 몸으로 덤벼드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잽싸게 바깥으로 피신하는데, 남자는 눅진한 껌처럼 질기게 따라붙었다.
“어이, 아가씨! 얘기 안 끝났는데 어디 가?!”
그 순간, 또 다른 남자가 뛰어와 그의 횡포를 가로막고 섰다.
“무슨 일입니까?”
정중하지만 싸늘한 목소리가 나린을 쫓던 남자의 취기를 깨운다.
“넌 또 뭐야?”
“……제 일행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머리를 절단낼 듯 레이저처럼 쏘아지는 눈빛에 남자가 주춤 물러났다.
“아, 아뇨…….”
자신보다 한참이나 더 크고 건장한 체격의 윤완을 확인한 남자는 그 길로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도망가는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던 윤완이 시선을 거두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이 이렇게 위험한 곳이었다니.
“괜찮아?”
윤완은 한 걸음 크게 걸어, 벌어져 있던 나린과의 간격을 메웠다.
“네.”
“이런 일 있음 재깍 나한테로 달려왔어야지.”
“그냥……. 밖으로 피하면 그만 좇아오겠지 했는데.”
나린이 멋쩍게 웃었다. 윤완은 아무 잘못도 없이 위협을 당한 그녀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내가 없는 곳에서도 네가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 네가 어디에 있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그런 세상을…….
“정계 진출을 고려해 봐야 하나…….”
이젠 나린만큼 편한 사람도 없는지, 묻어두었어야 할 충동적 결심이 혼잣말을 빌어 훅 삐져나왔다.
“네?”
나린의 물음에 윤완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야망이 그렇게 커요?”
타들어가는 속도 모르고 나린이 쿡쿡 웃는다. 그 웃음을 지켜주고 싶어서, 살그머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소중한 것이 생기고 나니 그동안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쉬울 게 없이 살아온 윤완은 난생처음으로 세상이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품었다.
*** 창을 통해 쏟아지는 늦은 오후 햇살을 받으며 채 여사가 한갓진 티타임을 즐기던 그때. 이른 퇴근을 한 세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애교 많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아들은 무미건조한 그녀의 삶에 유일한 위로였다. 생글생글 개구진 미소가 그와 참 잘 어울린다. 채 여사는 그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제 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도 마실래? 잔 가져오라고 할까?”
아예 자리를 잡고 앉은 세훈에게 채 여사가 살갑게 물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
“어제 창조 일보 기자회견은 보셨어요?”
“응.”
“PK 백화점도 직원 보호 못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윤재오 전무 해고했다고 입장문 냈더라고요.”
“…….”
“할아버진 뭐라세요? 다 윤완이 작품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안 드렸어. 그렇지만 알고 계시겠지.”
“그럴까요?”
“그럼……. 근데 지금 그런 게 머리에 들어오시겠니.”
“하긴.”
고개를 끄덕인 세훈은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얹고 턱을 괴었다. 볼에 닿은 검지가 무의식중에 까딱 까딱거렸다.
“하여튼 윤완인 무서운 놈이에요. 제가 걔랑 같은 편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아들의 넋두리에 채 여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애초에 그런 빌미를 안 주는 사람이 돼야지.”
“그건 그렇지만요.”
세훈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너 근데, 대광 유통이랑은 어떻게 되어 가는 거니?”
“아.”
잘도 떠들던 세훈의 입술 틈에서 간극이 사라졌다. 채 여사가 언급한 ‘대광 유통’이란 집안 간 얘기가 되어 서너 번 만났던 맞선 상대를 가리켰다. 준우의 약혼식에 파트너로 데려갔던 여자이기도 했다. 예쁘장한 외모와 단정한 분위기, 과하지 않은 말씨와 지적인 단어 선택. 이 세계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그녀는 세훈의 눈에 딱히 특별하달 게 없었다. 그러나 집안의 며느릿감으로 손색없는 상대였다. 그녀도 딱 그런 눈으로 세훈을 보는 듯했다. 심장이 반응하진 않지만, 부모님의 사윗감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너, 적은 나이 아냐. 아무리 결혼이 늦어지는 추세라지만, 그래도 얼른 결정을 해야지. 아니다 싶으면 다른 상대로…….”
“아뇨.”
개구진 표정을 지운 세훈은 낮은 어조로 채 여사의 말을 잘랐다.
“몇 번 더 만나보고 얘기 잘 되면 일 진행시켜 달라고 말씀드릴게요.”
“지금까진 괜찮다 이거니?”
“……네.”
“다행이구나.”
세훈의 시선이 사선으로 비스듬히 떨구어진다.
“근데요, 어머니.”
“…….”
“예전엔 그냥 이렇게 만나서 결혼을 하겠지, 막연히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
“윤완이랑 나린이를 보면 참 부러워요.”
“…….”
“그래서…… 기다리면 저에게도 그런 상대가 나타나지 않을까, 자꾸만 그런 헛된 기대가 생겨요.”
“…….”
“두 사람, 보고 있으면 너무 예뻐서.”
채 여사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주환과의 결혼 생활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기에 지금 세훈이 느낄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런 인연은 쉽게 찾아오는 게 아냐.”
물렁해지는 마음을 다잡은 채 여사는 아들의 마음을 다독였다.
“어쩔 수 없이 적당히 타협해야 할 때가 있는 거지.”
세훈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상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이 세계에선 기적이라는 걸. 생각할수록 불공평하네. 도윤완만 너무 다 가졌잖아……. 문득 시새우는 마음이 돋아났다.
“기다릴 테니 결심이 서면 알려주렴.”
채 여사는 기운 없이 웃었다.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자유롭게 연애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그룹의 후계자인 그에게는 되도록 오점 없는 결혼이 필요했다.
“네. 그럴게요.”
씁쓸한 미소를 남긴 세훈은 제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채 여사는 어딘지 헛헛한 마음이 되었다. *** 마지막 출근을 한 나린은 팀원 한 명 한 명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협업하면서 잘 맞지 않았던 동료들도 있었지만 헤어질 때가 다가오니 안 좋은 기억은 까맣게 잊히고 아쉬움만 남았다. 이제 2주 간의 긴 휴가 후에 정식 퇴사를 하고, 다시 2주 간의 짧은 휴식을 취한 뒤 새로운 회사로 떠난다. 입사 이래 쭉 나린의 사수였던 민하는 남들보다 배로 서운해했다. 그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는 나린을 회의실까지 끌고 들어갔다. 이후 잔소리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들이 쉴 새 없이 뒤를 이었다. 모두가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의 발현임을 알기에 나린은 끝까지, 성실히 들어 주었다.
“결론은 잘 가고, 보고 싶을 거라고.”
길었던 잔소리를 감성적으로 끝맺음한 민하가 나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다.
“과장님도 잘 지내셔야 해요. 종종 연락할게요.”
“그래. 이젠 같은 회사 아니니까 밖에서 더 편하게 보자.”
민하가 이렇게까지 속정 깊은 사람이라는 건 나린도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재무팀장과 인사팀장에게 인사를 한 나린은 마침내 사무실을 나섰다. 떠나기 전, 주인 없는 책상이 되어 텅 비어 있는 자리를 오래도록 눈에 담는다.
‘안녕, 나의 첫 번째 일터.’
밖으로 나와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회사 건물에 대고 작별을 고했다.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돌아선 뒤, 폰을 꺼내어 지도 어플을 켠다. 오늘은 무시무시한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도일 그룹 금화연 여사님께서 뵙고 싶어 하시는데, 내일 시간 괜찮으실까요?]
어젯밤 도일 그룹 비서실로부터 연락을 받은 나린은 차마 요청을 거부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이기에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막 약속장소가 위치한 지하철역에 내리는데 폰이 울렸다. 윤완의 이름을 확인한 나린은 뜨끔하며 전화를 받았다.
[퇴근했어?]
“네.”
[언제 간 거야? 나한텐 인사도 안 하고.]
“계속 볼 거잖아요, 우린.”
[기분이 어때?]
“그냥……. 시원섭섭해요.”
[나는 섭섭하기만 해. 다음 주부터는 출근해도 네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퇴근하고 보면 되죠. 주말에도 보고.”
[집에 가는 길이야?]
“……네.”
금 여사와 만나기로 한 사실을 알면 못 가게 막을 테니 일단 거짓말을 했다. 목소리가 한껏 작아지는 바람에 흠칫했지만 다행히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알았어. 이따 또 연락할게.]
“네.”
전화를 끊고 지도를 확인하자 어느덧 약속장소 앞.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겁부터 먹지 말자.’
재벌가 사람들이라면 수도 없이 만나보았고, 스스로도 재벌이 되어 보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주문을 외웠다. 어떤 말씀을 하셔도 기죽지 않으리라. 마음가짐을 단단히 한 나린은 높이 솟은 빌딩 안으로 호기로운 걸음을 들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