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응징의 시간 (70/101)

#70. 응징의 시간202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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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오는 갑작스런 계약 해지 메일을 받고 혼이 나갔다. - ‘……임원으로서 품위를 손상하여 회사에 해를 끼친 바, 계약서 9조 3항에 따라…….’ 해지 사유는 뭉뚱그려져 있었지만, 이 문구가 강제로 지아의 담당 업무를 변경한 일을 가리킨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임원직은 정규직도 아닌 데다, 피해자의 인터뷰를 동반한 기사가 난 이상 방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밍이 너무 이상했다. 메일이 날아온 시점이 빨라도 너무 빨랐으니까. 꼭 이런 기사가 날 걸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듯이.

16558039128299.jpg‘큰아버지 작품인 것만은 분명한데…….’

어떻게 정보를 입수하신 거지? 머리를 굴려 봐도 모르겠어서 재희의 자리로 전화를 연결했다. 저보다 한참 똑똑한 누나의 조언이 절실했다.

16558039128299.jpg[야, 윤재오! 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진짜 혜원이 부탁 받고 직원 업무를 임의로 변경했어?]

전화를 받은 재희가 다짜고짜 다그쳤다.

16558039128299.jpg“어? 아, 그게. 그땐 그 정도는 별일 아닌 줄 알고…….”

서털구털하는 재오의 답에 재희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16558039128299.jpg[하아. 너도 놀아난 거야. 신혜원, 그 구미호한테. 걘 우리 남매를 망치려고 작정을 했나 보다.]

16558039128299.jpg“…….”

16558039128299.jpg[나도 걔랑 테라 호텔 손녀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홍역을 치렀잖아. 도일 그룹 제휴도 뺏기고.]

전시회 때 일로 결국 도일 그룹 복지 카드 제휴처는 Y 백화점으로 변경이 됐다. 다만 윤완이 아량을 베풀어 이 사태의 발단이 재희라는 사실만큼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 덕에 회사에서의 직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 형식적이었어도 사과한 셈 쳐달라는 나린의 요청이 감안되었고, 궁지에 몰린 쥐를 최후까지 압박하지는 않는 윤완의 관대함이 작용한 탓이기도 했다. 물론 그 계산된 관대함도 이번에 재오와 혜원을 상대로는 예외를 둘 것이다.

16558039128299.jpg“이제 어떡하지, 누나?”

16558039128299.jpg[뭘 어떡해? 우리한테 동아줄이 하나밖에 더 있어?]

누나의 말을 듣고 재오는 곧장 찾아뵈어야 할 사람이 떠올랐다. 재오는 그 길로 본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희망의 끈인 줄 알았던 할머니 장 회장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장 회장은 그를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힐책하고 내쫓았다.

16558039128299.jpg“야, 이놈아. 네가 연 회장 댁 손녀한테 한 짓을 다 들었는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썩 물러가지 못해! 이 쳐 죽일 놈. 천하의 막돼먹은 놈!”

이미 채 여사의 전화를 받고 재오가 저지른 일을 가감 없이 전해들은 뒤였던 것이다. 할머니의 입에서 이 정도로 험한 말들이 튀어나온 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외도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입도 떼지 못하고 쫓겨난 재오는 새파랗고 청명한 봄 하늘을 맹하니 올려다보며, 망해도 완전히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고, 할머니에게마저 버림받고 그 해결책을 고심할 틈도 없이. 저녁식사도 하지 못한 그가 이번에는 헐레벌떡 경찰서 안으로 뛰어든다.

16558039128299.jpg[전무님. 정말 죄송합니다. 좀 와주셔야겠습니다.]

  지저분한 일을 대신 처리해주었던 심복 중 우두머리 격에 속하는 자가 전화를 걸어 왔다. 그들 일당은 온 서울 시내 병원을 뒤져가며 나린의 출생 비밀을 캐올 만큼 혁혁한 공을 세운 자들이었다.

16558039128299.jpg‘대체 무슨 일인데 오라가라야? 내가 지금 저딴 녀석들한테 쓸 시간이 없는데.’

짜증이 치밀었지만 뒤탈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급한 불은 꺼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걸음을 한 건데…….

16558039128299.jpg“명준우……?”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을 마주한 재오의 사지가 뻣뻣해졌다.

16558039158333.jpg“왔냐.”

여유로운 표정을 한 준우가 재오를 맞이한다. 마치 이 경찰서를 통째로 접수하기라도 한 듯한 포스였다.

16558039128299.jpg“네가 여긴 어떻게…….”

16558039158333.jpg“뭘 어떻게야. 내 비서가 맞았다길래 왔지.”

16558039128299.jpg“뭐?!”

그러니까 그의 심복들이 경찰서에 붙잡혀 온 이유가 명준우의 사람을 때려서인가 보다. 돌아가는 형국이 심상치 않다. 상대해야 할 자가 명준우라면 제 선에서 활용 가능한 수단이 전부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16558039128299.jpg“그게, 저자가 자꾸 저희를 미행해서…….”

주눅이 든 재오의 수하가 변명처럼 웅얼대었다.

16558039128299.jpg“그런 적 없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준우의 비서는 억울하고 답답해 미치겠다는 시늉을 했다. 준우의 지시로 미행을 했던 게 맞았고, 미행이 들켜서 시비가 붙은 끝에 폭행을 당한 것도 맞았지만 저쪽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그걸 알기에 영악하게 선량한 시민 연기에 돌입한 것이었다.

16558039158333.jpg“선처는 없습니다. 법대로 처벌해주시죠. 보아하니 조직폭력배 같은데 범죄조직 결성 여부도 철저히 조사해주시고요.”

담당 형사를 압박한 준우는 피해 진술을 마친 비서를 대동하고 경찰서를 나섰다. 재오가 도착하기 전 ‘케이텔레콤 명준우 전무’라고 못 박힌 명함부터 건네주었으니 이쯤하면 알아먹었을 것이다. 케이텔레콤 오너 일가가 명 씨라는 걸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없으니까. 이럴 땐 성이 특이한 게 참 도움이 됐다.

16558039128299.jpg“너…….”

뒤쫓아 온 재오가 준우를 붙잡았다. 이대로 제 심복이 잡혀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그의 신변도 보장 불가였다. 그자를 믿을 순 없다. 수틀리면 언제든 재오의 이름을 팔아먹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16558039158333.jpg“뭐냐?”

느긋하게 돌아보는 준우는 기세등등한 표정이었다. 재오는 이 모든 게 기획된 함정임을 깨달았다.

16558039128299.jpg“……이것도 일부러 노린 거냐?”

16558039158333.jpg“노리다니?”

16558039128299.jpg“아침에 난 기사, 지금 이 일. 다 날 노리고 꾸민 짓이냐고 묻잖아.”

16558039158333.jpg“노리긴 뭘 노려. 저 사람이랑 너랑 무슨 끈끈한 유착 관계라도 있나 보지?”

16558039128299.jpg“너 이 자식…….”

성이 난 재오가 그의 멱살을 붙든다.

16558039158333.jpg“경찰서가 코앞인데 눈치 좀 챙겨.”

나름 기습 공격이었는데도 준우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차분함에 오금이 저린 재오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이윽고 준우의 입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16558039158333.jpg“그러게 누가 걜 건드리래.”

16558039128299.jpg“걔라니, 누구를 말…….”

습관처럼 되묻다가 답이 떠오른 재오가 말을 멈추었다. 연나린. 명준우에겐 인생의 전부였던 연다현의 쌍둥이 동생. 그러니까 복수……? 재오가 어버버하는 사이, 셔츠 깃을 정리한 준우는 씩 웃어 보이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 *** 날 때부터 혜원에게 아빠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어떻게든 손에 쥐여 주었고 거슬리는 게 있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제거해주었다. 일찍이 아내와 사별하고도, 혜원이 계모에게 구박 받을 걸 걱정하여 새 장가조차 들지 않은, 딸밖에 모르는 바보 아빠였다. 호텔에서 간혹 여자들과 있는 걸 보긴 했지만, 그때마다 별일 아니라고,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자신했다. 아빠에게 최고의 여자는 오직 나. 그녀들은 그저 하룻밤 놀잇감일 뿐이니까……. 아빠가 혜원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혜원도 아빠를 사랑했다. 아빠는 그녀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었다. 그런 아빠가 지금 세상을 향해 납작 엎드리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저 때문에. 신 회장은 이 폭로 기사의 배후를 캐내 보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아무 단서도 건질 수 없었다. 정음 일보 박 사장은 기사를 쓴 기자가 피해자의 친한 지인이라고 했다. 보도 승인을 받은 것도 증인과 증거가 명확해서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며 미안한 척해 보인 게 다였다.

16558039128299.jpg“저도 회장님께 이런 피해를 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회장님도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저희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증언한 피해자들도 돈의 출처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었다. 계속 귀찮게 굴면 2차 가해로 제보할 거라며 외려 당당하게 나왔다. 조목조목 증거를 달고 터져버린 기사를 없던 일로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창조 일보와 그 오너 일가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갔다. 그럼에도 신 회장은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무시하려 했다. 뜻밖에 정계의 압박을 받기 전까지는. 정계 유력 인사의 심기가 불편하단 제보에 창조 일보 경영진이 발칵 뒤집혔다. 결국 내부 논의 끝에 긴급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혜원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은 신 회장이 결사반대했다. 본인이 직접 나설지언정 딸에게 굴욕을 안길 수 없다고 우겼다. 그렇게 그는 딸을 대신해 카메라 앞에 섰다. 이마가 무릎에 닿을 듯 허리를 꺾어 내리는 아빠의 모습은 혜원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16558039128299.jpg“……오늘부로 제 딸은 창조 일보와 관련된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자숙할 것이며…….”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생중계 속 음파는 뚝뚝 끊어져서 인지되었다.

16558039128299.jpg“……피해자 분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를…….”

머리가 멍하다. 아랫니와 윗니가 부딪히며 딱딱 소리를 냈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온 얼굴이 떨려오고 있었다. 마치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어떻게 이런 일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나에게……. 혜원의 눈시울은 피를 터뜨릴 듯 충혈 되어 갔다.

16558039205579.png‘아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다 나 때문에 먹고 살던 작자들 아냐? 먹여 살려줬음 감지덕지해야지 몇 마디 싫은 소리 좀 들은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돈도 받았잖아. 거액의 위로금도 듬뿍 안겨줬잖아! 혜원은 아직도 왜 자신이 힐난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전무 자리를 내려놓고 자숙을 해야 하는지. 왜 우리 부녀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16558039205583.jpg‘똑같이 물에 빠뜨렸어도 수영을 가르쳐주려는 사람과 익사시키려는 사람이 천지 차이인 것처럼요. 후자는 살인미수거든요.’

  지나간 음성이 섬광처럼 번쩍이며 뇌리를 장악했다.

16558039205583.jpg‘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건 전부 신혜원 씨 책임이에요.’

  ……설마 이거였어?

16558039205579.png‘이게 연나린이 말한 앞으로 벌어질 일이었던 거야?!’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던 그녀는 금세 이 일이 윤완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추리해냈다. 경고는 나린이 했지만, 실제로 일을 터뜨린 건 윤완이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 공을 들인 것 같았다. 자신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과거 일까지 모조리 파헤쳐 꺼낼 정도로 치밀하게. 정계 인맥을 동원해 압박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16558039205593.jpg‘나린이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 그냥 너한테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또 한 번 건드리면 그땐 진짜 가만 있지 않아.’

  전시회 일 때 윤완이 했던 경고가 생생히 들려오는 것 같았다.

16558039205579.png‘단순히 말뿐인 게 아니었단 말이야?’

혜원은 더 잴 것 없이 윤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통화음이 울린 끝에 전화가 연결됐다.

16558039205593.jpg[…….]

16558039205579.png“오빠지? 이거 다 오빠가 한 짓이지?”

혜원이 사납게 으르렁댔지만 맞받아치는 윤완의 목소리는 몹시도 음전했다.

16558039205593.jpg[뭐가?]

16558039205579.png“기사 말이야!”

16558039205593.jpg[기자가 쓴 걸 왜 나한테 묻지?]

16558039205579.png“……정말 오빠 아니야?”

16558039205593.jpg[그 기자한테 직접 확인해보든지.]

16558039205579.png“…….”

심증 뿐이기에 딱히 대꾸할 말도 없다. 혜원이 답을 찾지 못하자 윤완이 재차 입을 열었다.

16558039205593.jpg[그리고 이게 그렇게 따질 일인가.]

감정이라고는 한 터럭도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음성이 혜원의 등줄기를 꽝꽝 얼렸다.

16558039205579.png“뭐……?”

16558039205593.jpg[그 기자는 취재하다가 알게 된 사실을 알려준 것뿐이잖아. 세상이 속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 사실을 사실대로 쓴 게 잘못은 아니지.]

둔기로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 혜원을 강타했다. 이건 그녀가 나린에게 했던 말을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16558039205579.png‘지난 금요일엔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을 알려 준 것뿐이에요. 연 회장님께 속고 있는 그쪽이 안타까워서.’

  노기 발발한 혜원이 호흡곤란을 일으킬 것처럼 씩씩대는데, 뚝, 전화가 끊겼다. 혜원은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손톱 관리가 철저한 그녀에게는 없던 버릇이었다. 자신의 패악질이 담긴 녹취록은 이미 모든 SNS를 점령했다. 아빠의 굴욕적인 사죄 영상 또한 그럴 것이다. 당장에 아침, 저녁 뉴스를 통해 반복 보도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못 본 사람이 없을 때까지 널리 널리 퍼져나가, 길이길이 보존되겠지. 먹칠 된 명예, 땅에 떨어진 위신, 속속들이 까발려진 민낯. 공들여 쌓아 올린 부녀의 이미지가 일순간에 폭삭 거꾸러졌다. 회복할 수 없는 피해라는 걸 깨달은 혜원의 눈에서 분기탱천한 눈물이 한 가닥 한 가닥 뜨겁게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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