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춥지 않게 감싸줄 수 있었으면2022.01.25.
퇴근을 하던 지아는 백화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호를 발견하고 눈동자의 크기를 키웠다.
“기호 씨.”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움과 함께 반가움도 담겼다.
“아, 지아 씨. 퇴근했어요?”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던 기호가 일직선을 그리며 바로 섰다.
“네. 저 기다린 거예요?”
기호의 턱이 목과의 거리를 좁혔다가 본래 위치를 찾았다.
“왔으면 연락을 하죠……. 왜 미련하게 여기 서 있어요. 엇갈리면 어떡하려고.”
“그냥……. 이 시간쯤 퇴근하는 것도 알고, 이 시간엔 여기밖에 열린 문이 없는 것도 알고……. 그래서 기다렸어요.”
“그래도 그렇죠. 휴대폰 두고 왜 그런 모험을 해요?”
“……그렇게라도 운명처럼 보이고 싶으니까요.”
찡그린 얼굴을 푼 지아가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건 운명이 아니라 미련한 거예요.”
이렇게 쏘아주면서도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인 건 기호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애써 그 지고지순함을 외면했다.
“웬일이에요? 할 말 있어서 왔어요?”
쭉 이렇게 친구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목소리 톤을 올려 묻는다.
“네.”
“뭔데요?”
기호는 보폭을 크게 하여 지아에게로 다가섰다.
“……허락이 떨어졌어요.”
지아의 눈은 여전히 무슨 소린지 모른다는 빛을 띄웠다.
“기사, 써도 좋대요.”
“……그 여자 기사…… 말하는 거예요?”
지아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혜원과 있었던 일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떨리고 비명이 절로 튀어나오는 악몽이었다. 자다가도 열이 뻗쳐서 불쑥불쑥 일어나길 한두 번이 아닐 만큼의 지독한 악몽. 지금도 그때가 떠올라서 악 소리를 낼 뻔했다.
“네. 그렇지만 지아 씨 기사이기도 해요.”
기호는 기운을 불어넣듯 다시 한 걸음, 지아에게로 다가섰다.
“그래서, 물어보려고 왔어요.”
“…….”
“나, 그 기사에 지아 씨 얘기 써도 돼요?”
“…….”
“지아 씨가 싫다면 그 부분만 뺄게요. 그러니까 대답해줘요.”
거대 권력의 횡포에 대한 기사를 내는 건 정의로운 일이었으나 거기엔 지아의 삶이 걸려 있었다. 이 기사로 평온을 되찾은 지아의 일상이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 지아의 마음이 이 모든 소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녀를 위해 시작한 일인데, 다시 나락으로 던져넣을 순 없으니……. 지아는 답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 입을 닫아 건 채 눈동자만 굴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떼었을 땐 방금 전까지 목소리를 장악하고 있던 떨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써도 돼요.”
“…….”
“아니, 꼭 써주세요.”
“…….”
“그래야만 내 가슴에 맺힌 응어리도 씻겨 내려갈 것 같으니까.”
스산하게까지 느껴지는 폐점 후의 백화점 앞. 평소와 다르게 독기 어린 지아의 눈이 기호를 옭아맨다. 그 눈에서 무언의 각오를 읽어낸 기호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조수석에 앉은 윤완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내놓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잘 훈련되어 있는 그였지만 나린과 연관된 일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졌으면 깔끔하게 승복해라, 도윤완.”
뒷좌석의 세훈이 패배자가 된 그를 향해 깐족거렸다. 나린은 안절부절못하며 시종일관 윤완의 눈치를 살폈다. 세훈의 옆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어제 외삼촌과 함께 엄마의 봉안당을 찾은 뒤, 오늘은 아빠와 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 먹먹한 여정에 세훈과 윤완이 동행을 해주었다. 문제는 차 뒷좌석이 딱 두 자리뿐이라는 것이었다. 한 자리는 나린의 것이었기에 남은 한 자리를 두고 때 아닌 쟁탈전이 벌어졌다. 나린이 조수석 자리를 자처하고 나섰지만 윤완과 세훈의 격렬한 반대에 무산되었다. 결국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윤완의 패배로 결론이 났다.
“우와!”
손바닥을 쫙 펴서 내민 세훈은 눈앞에 큼지막한 공이 놓여 있는 걸 보자마자 크게 포효했다. 말아 쥐어진 윤완의 주먹이 자그맣게 진동했으나 낙장불입이었다. 지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되는 저 연세훈한테…….
“나린아. 마들렌 먹을래? 우리 호텔 베이커리에서 가져왔는데.”
세훈은 투명 비닐에 포장된 마들렌을 나린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나린의 신경은 온통 윤완에게 쏠려 있었다.
“윤완 오빠, 먹을래요?”
뒤에서 손가락으로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권했다.
“……안 먹어.”
“화났어요?”
“아니.”
윤완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순간 약올리는 세훈의 표정을 마주할 게 뻔했으니까. 대신 골똘히 패배의 원인을 분석했다. 운에 맡기는 가위바위보 같은 거 말고 확실히 이길 수 있는 걸 했어야 했어. 이를 테면 세 자릿수 곱셈 암산 대결 같은 거……. 세훈은 윤완 들으란 듯이 나린에게 다정히 말을 걸었다.
“저 녀석 신경쓰지 마. 피곤하면 좀 잘래? 내 어깨에 기대어 자도…….”
찌릿. 번개 같은 속도로 뒤를 돈 윤완의 눈이 가늘어지며 세훈을 날카롭게 관통한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 신경전을 모르지 않는 나린은 중간에서 바지런히 평화유지군 역할을 했다. 그 덕분인지 지루하지 않게 목적지에 다다랐다. 테라 그룹 일가 소유의 선산. 바다가 가까운 이곳에 아빠와 언니가 잠들어 있다. 나린은 아빠의 무덤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반듯이 섰다. 그러자 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 찾아왔다.
‘아빠, 언니. 저 왔어요.’
나린이가 왔어요. 나린의 눈이 지그시 감기었다. 눈꺼풀이 닫히자 세상의 소리도 차단되며, 꼭 혼자만의 세상으로 차원 이동한 기분이었다. 나린의 목 안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솟구쳤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겨우 삼킨 나린이 고요히 묵념을 하는 동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세훈과 윤완이 그녀를 지켜보며 서 있었다.
“어제 우리 어머니께서 전화하신 거 같아, PK 쪽에.”
한발 붙어선 세훈의 귀띔에도 윤완은 말이 없었다. 그래서 세훈이 거듭 대화의 물꼬를 텄다.
“기사는 언제 나는 거냐?”
“……월요일 아침에.”
“장기호 기자……랬지?”
“응.”
“태준이는 알고?”
“얘기해줬어.”
“뭐래?”
“별말 없던데. 그냥 일이 이렇게도 되냐고 공교로워했어.”
“그 자식, 죽어도 한지아한테서 못 벗어날 것 같더니 이젠 완전 정리한 것 같더라.”
“…….”
“또 여기저기 선 자리 나가기 시작했나 봐. 힘들어해.”
윤완은 입을 닫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나린의 뒷모습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언제 저 자그만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할까. 언제 저 애가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까. 언제쯤 달려가서 위로를 건네어야 할까. 그것만이 유일한 관심사. 휘이잉. 바다에서부터 젖은 바람이 불어온다. 봄바람인데도 어딘지 시린 기운이 느껴졌다. 바람에 실린 촉촉한 습기는 꼭 함께 울어주고 있는 기분을 들게 했다. 날아가는 방향에 누군가가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나린이 추울까 봐 걱정된다. 비를 쫄딱 맞고 신열을 앓았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어제 엄마를 만나러 가서도 많이 울었을 텐데 오늘 또 울어도 괜찮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몇 번이고 나린에게 달려가는 상상을 하면서도, 윤완은 열심히 참았다. 애도하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참이나 정지한 채 묵념을 하던 나린은 어스름이 깔릴 무렵에야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하고 싶은 얘기, 다 했어?”
세훈이 나린의 얼굴을 살핀다. 소리 없는 끄덕임이 이어졌다.
“어? 눈이 빨간데. 울었어?”
세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린의 눈동자 위로 소복소복 눈물방울이 쌓였다. 찌릿. 윤완이 세훈을 노려본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당황한 세훈이 오른손을 허공에 대고 흔드는데, 나린이 와락 윤완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날랜 동작에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날아오르고. 나린의 얼굴이 윤완의 품을 꿰뚫을 기세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가슴에 파묻힌 울음소리가 귀에서 아득히 멀어지는 대신 가차 없이 심장에 엉겨 붙었다.
가슴에 고이 흡수되는 울음소리는 윤완의 심장을 무감하게 만들었다. 왼손은 그대로 등허리를 감아 안고 오른손을 들어 가만가만 나린의 등을 쓸어주었다. 울지 마. 괜찮아. 전부, 괜찮을 거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점차 거세어지고, 바람에 맞서는 윤완의 체온도 점차 뜨거워져만 갔다. 더 타오르듯 뜨거워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이 아일 춥지 않게 감싸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빛이 스러져가는 하늘에 대고 윤완은 자그마한 소망을 빌어 보았다. *** - [독점] 두 얼굴의 공주님, 운전기사부터 백화점 직원까지 폭언에 손찌검. 창조 일보 외동딸 갑질 녹취록 전격 공개! 한 주의 시작을 여는 월요일 아침. 정음 일보에서 낸 저격 기사가 각종 포털 사이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기호가 작업한 정성 어린 기사는 지아와의 PK 백화점 사건부터, 오래 전에 해고된 가정부, 운전기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폭언과 손찌검 피해 사례를 만천하에 폭로했다. 디테일을 더하기 위해, PK 백화점 모 전무의 지시에 따라 지아의 업무가 강제 변경되었다는 사실 또한 적시되었다. 재벌 3세간의 결탁에 죄 없는 서민의 일터가 좌지우지된 일까지 보태어지자,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리며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 시대가 어느 시댄데 재벌 갑질이라니. - 헐. 신혜원,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언플하던 여자 아냐? - 녹취록 들어 봐. 소리 지르는 게 마녀 저리 가라임. - 근데 PK 백화점은 뭐 하는 거? 직원 보호 안 함? - PK 백화점 강제 업무 변경은 뭔 소리냐. 저 직원 불쌍하다. 아침부터 핵폭탄을 정통으로 맞은 혜원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악! 악!”
출근도 포기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방 안을 날뛰었다. 그 탓에 집안일을 돌보는 이들 모두가 숨을 죽여야만 했다. 누구도 혜원의 눈에 띄어 화풀이 대상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 한편, 이 사실을 보고받은 신중호 회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화를 내다 못해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날 때부터 자그마한 흠집이라도 날까 벌벌 떨며 키운 딸이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외동딸이 공개적인 돌팔매질의 표적이 되다니. 차라리 자신이 대신 맞아주었으면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 인간들 다 돈 받고 입 다물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의 불호령에, 보고를 올린 비서가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러면서도 프로답게 마저 답변을 이어나갔다.
“그게…… 어찌된 영문인지 다들 받았던 돈을 돌려주겠다고…….”
“뭔 소리야?! 당장 위약금 조항 발동시켜! 민사 걸든지!”
“저, 회장님.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지급한 위로금이야 순순히 돌려받을지 모르지만, 위약금의 경우엔 소송 사실을 또 기사화하면…….”
“…….”
하. 어찌 이런 일이. 이렇게 진퇴양난일 수가.
“그자들이 정말로 받은 돈을 다 돌려주겠다고 했어?”
신 회장은 흐트러지는 이성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거듭 확인을 했다.
“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거지들이 무슨 수로 몇 천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신 회장은 사태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라는 걸 즉감했다. 증언을 한 피해자들 수중에 뚝딱 돈이 떨어진 것도, 정음 일보에서 이런 정면 도전 같은 기사를 내보낸 것도 죄다 어불성설이다.
“정음 일보 박 사장 전화 연결해, 당장!”
어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다. 딸이라면 목숨보다 더 끔찍한 신 회장의 얼굴이 짧은 시간 안에 붉으락푸르락 수십 번 색을 바꿨다. 검붉게 물든 양 볼은 금방이라도 폭발해버릴 것처럼 땡땡 불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