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공동의 목표를 향해2022.01.21.
[나린아. 나 안 보고 싶어?]
세훈이 보낸 메시지가 나린을 불시에 웃음 짓게 한다.
[보고 싶어요.]
안 그래도 연락해야지 했었는데. 마침 부탁할 것도 있었으니까.
[그럼 오늘 저녁에 볼래?]
[좋아요.]
[퇴근하고 우리 아지트로 와. 프런트에 얘기해둘게.]
[다른 오빠들은요?]
[바쁘대. 둘이서 오붓하게 놀자.]
예와 다름없는 세훈의 밝은 기운이 참 좋다. 약속을 정한 나린은 지숙에게 늦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윤완에게도 메신저를 남겼지만, 회의가 길어지는지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읽지 않음 표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답장 받는 걸 포기하고 사무실을 나선 나린은 세훈이 이른 대로 테라 호텔로 갔다. 2501호로 올라온 나린이 지친 몸을 탈싹 소파에 안착시켰다.
[저 도착했어요.]
세훈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자세가 점점 흐트러지는데, 삐비빅, 도어락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난다.
‘벌써 왔나.’
후다닥 몸을 일으킨 뒤, 문 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어…….”
나린을 본 그의 눈도 양옆으로 기다래졌다.
“여긴 어쩐 일이야?”
주인공처럼 위풍당당 등장한 그가 물었다. 나린의 인생에서는 영원히 주인공일 남자.
“세훈 오빠랑 만나기로 해서요. 메신저 남겼는데 못 봤어요?”
“응.”
짤막히 답을 한 그는 폰을 꺼내어 무음 모드를 해제했다. 회의 중에 전환해놓고 깜빡한 것이었다.
“세훈 오빠가 다들 바빠서 못 올 거라고, 우리가 써도 된다고 그래서요.”
조곤조곤한 나린의 설명에 윤완의 얼굴이 퉁명스러워졌다. 들고 온 서류 봉투를 옆에 놓인 수납장 첫 번째 서랍 안에 집어넣은 그가 나린을 돌아보았다.
“우리?”
나린이 세훈과의 사이를 ‘우리’로 묶고 그를 ‘다들’에 집어넣은 게 영 못마땅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구한 눈빛.
“네. 세훈 오빠랑 저요.”
뭐가 잘못됐어요? 나린의 눈은 그렇게 되묻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곰인데. 아니지, 이것도 여우인가.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애간장을 태워 없애는 여우. 어이가 없어 웃음이 흘렀다. 어느새 무장 해제된 윤완이 성큼 나린과의 거리를 좁힌다. 그의 손이 나린의 머리 위에 포옥 올라앉았다. 우연히 만나니까 이건 이것대로 또 좋네.
“반갑다.”
마음이 느낀 바가 고스란히 언어로 치환되어 공기에 실리고,
“저도요.”
나린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나린의 반응 하나하나에 그의 표정도 변화무쌍해진다. 나린은 습관처럼 윤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약속 있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
동그란 턱을 제 품에 콕 박은 채 올려다보는 얼굴은 예뻐도 너무 예뻤다. 보통 이 각도에선 살아남지 못한다고 하던데.
‘아닌데. 너무 예쁜데.’
기시감이 지핀 행복이 팡팡 축제의 불꽃을 터뜨렸다. 그랬지. 처음 좋아한다고 말해주었을 때도 딱 이 포즈였었지. 경로를 이탈할 듯 뛰는 심장을 모르는 척하는 것쯤 이젠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근데 여긴 왜 왔는데요?”
“약속이 여기 스카이 라운지라서.”
“아.”
“시간 남아서 잠깐 들린 거야. 준우한테 전달하기로 한 게 있어서.”
말이 나온 김에 손목시계를 체크하자, 야속하게도 약속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올걸. 나린은 스르르 팔을 풀었다.
“얼른 가보세요, 그럼.”
미련 없이 등이 떠밀리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윤완은 슬쩍 억울해졌다. 누군 ‘우리’라는 표현 하나에도 예민하게 굴 정도로 질투의 화신이 되었는데, 정작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저토록 태평하다니.
“누구 만나는지 안 궁금해?”
“고객 아니면 재계나 정계 지인이겠죠.”
질투를 유발하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이대로 물러나는 건 성에 안 차고.
“같이 갈래?”
떠볼 작정으로 물었으나 나린은 하등 관심 없어 했다.
“아뇨. 지난번 준우 오빠 약혼 파티 때도 지루해서 도망쳤는데. 으으. 전 못 견뎌요.”
소름 돋는 시늉을 하는 나린을 보자 그의 표정이 또 한 번 변신했다.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듯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정말 데려갈 마음에서 물은 건 아니었다. 오늘 약속은 나린은 몰라야 하는 것이었다.
“세훈이랑은 뭐할 건데?”
윤완은 패배를 인정하고 화제를 전환했다. 언젠가는 질투해주겠지, 너도. 언젠가 한 번은 나 때문에 안달해주겠지.
“저녁 먹고…….”
“…….”
“……실은 부탁을 하려고요.”
“무슨 부탁?”
그거, 나한테 하면 안 되는 부탁인가. 나는 더 성심성의껏 들어줄 수 있는데. 나린의 얼굴에 옅은 그림자가 졌다.
“……아빠랑 다현 언니한테 가고 싶어서요.”
“…….”
“그동안은…… 내 존재가 조심스러워서 추모하러 가서도 마음 놓고 울지 못했는데, 이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슬픔을 조잘대는 와중에도 나린의 얼굴은 아슬아슬 미소를 지탱해냈다.
“나도 같이 가.”
“…….”
“같이 가줄 테니까 실컷 울어. 다 울 때까지 옆에 있어 줄게.”
“알겠어요.”
나린은 다시 그의 등을 떠밀었다. 더 얘길 하다가는 미리서부터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얼른 가세요. 약속 늦겠어요.”
등을 떠미는 나린의 두 손을 한 손으로 잡아 쥐고 허리를 접은 그가 뺨에 쪽 입을 맞춘다.
뺨이 마지노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약속에 가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세훈이랑은 조금만 재밌게 놀아.”
“……네?”
입술이 스치고 간 자리를 문질거리며 선 나린을 남겨둔 채, 윤완은 훌쩍 떠나갔다. 세훈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에 도착했다.
“나린아, 보고 싶었어!”
나린을 끌어안으려던 세훈이 홀연 동작을 그쳤다. 본능적으로 윤완을 의식한 탓이었다. 도윤완이라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그 무서운 놈이라면.
“잘 지냈어?”
“네.”
“난 못 지냈어. 너 매일 보다가 못 보니까 너무 허전해.”
세훈의 익살에 나린이 웃음을 터뜨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따스하게 대해주는 세훈의 세심함이 고마웠다. 저녁은 룸서비스를 먹기로 하고 파스타를 주문했다. 식사를 하는 도중 나린이 용기를 냈다.
“저, 세훈 오빠. 부탁이 있는데요…….”
“뭐?”
“아빠랑 언니한테 한 번 다녀오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세훈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럼. 그걸 말이라고. 얘기 나온 김에 이번 주말에 갈까?”
“토요일엔 외삼촌이랑 엄마한테 가기로 해서……. 일요일도 괜찮아요?”
“그럼.”
조심스러웠던 게 무색하리만큼 단박에 승낙이 떨어졌다. 나린은 세훈이야말로 겪을수록 진국이라고 생각했다. 행동거지가 가벼워 보여도 속의 깊이는 측정 불가인 사람이었다.
“저, 언니 얘기 듣고 싶어요.”
커피를 마시는 차례에 이르러서 나린이 누차 용기를 냈다.
“다현이……?”
“네. 준우 오빠한테 듣는 게 제일 정확하겠지만, 이제는 물어볼 수 없으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 행복을 일구어 나가는 사람에게 과거를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
“무슨 소리야. 준우는 남이고 나는 피 섞인 가족인데. 내가 더 정확하거든.”
이상한 데서 경쟁심을 드러내는 세훈을 보며, 나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두려 입술에 힘을 주었다. 깊어졌다가 얕아졌다가,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재미있는 사람. 윤완 오빠가 조금만 재밌게 놀라고 했는데……. 몰랐네, 그게 이렇게 어려운 숙제일 줄은.
“다현이는 예뻤지.”
맞다. 그렇더라. 사진으로만 봐도 참 예뻤더라.
“나린이 너보다 아주 쪼끔 더?”
나린을 놀려줄 마음에서 세훈이 덧붙인다.
“사진 봤는데 인정이에요.”
“오. 발끈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
역시 쉬운 여자 아니다, 연나린. 나린은 유치한 세훈에게 맞먹는 유치함으로 응수해보기로 했다.
“저는 한 사람 눈에만 제일 예쁘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세훈 오빠한테 더 예쁜 자리 정도는 양보할 수 있어요.”
세훈은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오글오글 손발이 말려들어 가서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나 안 해.”
가두어져 있던 웃음들이 와그르르 나린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 테라 호텔 스카이라운지. 너른 홀을 지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VVIP 전용 프라이빗 룸이 나온다. 야경이 액자처럼 둘러진 이 방 안에 우아한 자태를 한 채 여사가 앉아 있다. 채 여사가 만나기로 한 상대는 약속시간이 다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와요, 도 부사장.”
“일찍 오실 줄 알았으면 저도 서두를 걸 그랬습니다.”
“잘 맞춰 왔는데, 뭘. 더 한가한 쪽이 먼저 와서 기다리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이제는 명실공히 한 기업의 경영인으로 대우해주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아들의 오랜 친구이다 보니 말끝이 자연히 간결해졌다. 윤완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길 전해 들은 건 바로 어제, 세훈으로부터였다. 채 여사도 바라던 바였기에 덥석 약속을 정했다.
“저녁은 좀 천천히 할까.”
용건부터 마치는 편이 식사시간의 어색함을 덜어줄 거라 판단한 채 여사가 제안했다.
“네.”
채 여사는 서빙 담당 직원에게 부르기 전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일렀다. 룸을 완벽한 밀실로 만든 채 여사가 입을 뗀다.
“그래, 오늘 보자고 한 용건은?”
들으나 마나 나린이 일이겠지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해요, 편하게.”
채 여사는 무표정 속에 근심을 감추었다. 눈앞에 앉은 그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나린이를 허락하는 대가로 저희 집에 주기로 한 게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윤완의 질문은 직접적이고 명쾌했다. 채 여사의 잇새로 피식 바람이 삐져나온다.
“짐작하고 있었구나. 뭔가 거래가 있었으리란 걸.”
“네.”
사태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은 어릴 때부터 지켜봐왔지만 매번 감탄하게 되었다. 세훈도 비범하고 영특하다고 자부하며 키웠는데 윤완 앞에서는 명함조차 내밀 수가 없다.
“그래. 네 생각이 맞아. 주기로 한 게 있었지.”
“…….”
“혹시 삼성동 옛 테라 호텔 본사 부지에 대해 알고 있니?”
“네. 도일 공업 초창기에 흑자 도산을 피하기 위해 저희 할아버지께서 연 회장님께 넘긴 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채 여사의 질문에 답하던 윤완은 제 질문에 대한 해답도 절로 깨우쳤다.
“……그 땅을 나린이에게 주기로 하신 거군요.”
“응. 물론 그것 말고 다른 것들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 네 짝으로 손색없을 만큼.”
“…….”
“뭐, 이젠 나린이가 안 받는다고 하겠지만.”
윤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것이다. 나린이라면.
“청이 있습니다.”
윤완이 채 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가지입니다.”
“말해 봐. 듣고 대답할게.”
“우선 저희 어머니를 좀 만나주십시오.”
“…….”
“만나서 나린이에게 손을 쓰지 못하게 경고를 해주십시오. 어떤 방식이든 좋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상대하려는 사람이 나린이가 아닌 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채 여사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나도 생각하고 있었어. 아직 금 여사님께서 이 상황을 아시는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야. 타이밍 봐서 찾아뵐게.”
“네.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전화를 한 통 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디에?”
“PK 그룹 장 회장님께요.”
“아.”
채 여사는 윤완의 수를 읽어냈다. 이 사태의 원흉이 창조 일보 신혜원과 PK 백화점 윤재오라는 것은 그녀도 세훈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응징의 시간이 도래했나 보다.
“나는 그것만 해주면 돼?”
“네.”
“……어렵지 않네.”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감사해야지.”
새삼 느끼기에, 윤완은 참 듬직하고 의지가 되는 남자였다. 걱정했는데…….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편치 않고 걱정됐는데. 저들이라면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때의 서방님은 너무도 어리고 연약했지.’
하지만 지금의 윤완은 다르다. 많은 걸 이뤄놨고, 제 몫으로 쥐고 있는 힘의 크기도 컸다. 그러니, 안심해도 될지 몰라. 저 두 사람이라면.
“도 부사장.”
“네.”
채 여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형식적으로 그려내는 게 아닌, 진심이 담긴 미소는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는 좀처럼 내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 잘 부탁해요.”
채 여사가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순간 움찔했으나 침착함을 되찾은 윤완도 똑같이 고개 숙여 답하였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로써 공동의 목표를 향한 양자 동맹이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