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 속죄 (67/101)

#67. 속죄2022.01.18.

승혜에게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승태와 지숙, 수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특히 승태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승태는 야심한 시각을 틈 타 집밖으로 나왔다. 너무 분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 들러, 끊은 지 오래인 담배를 산다. 입에 문 담배 개비에 불을 붙이고, 한참 전 세상을 떠난 여동생을 추념해보았다. 향을 대신하여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승태가 여동생 승혜와 멀어진 건 어떤 불화나 특정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부모님을 여읜 뒤 각자 위치에서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됐다. 어쩌다 한 번씩 안부 전화를 할 때면 승혜는 밝은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켰다. 그래서 잘 사는 줄로만 알았다. 하루하루 성실히 잘 살아내고 있는 줄로만. 바빠서 연락이 뜸한 건 좋은 거라고, 바쁜 만큼 형편도 나아질 거라고 믿었던 게 패착이었다. 몇 년간 떨어져 지내던 남매가 재회한 건 지방의 어느 대학 병원. 승혜를 돌보고 있다는 수녀님이 승태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위중하다는 말에 부리나케 달려가 보니 초주검이 된 승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6558037953096.jpg‘오빠……. 미안하지만 부탁이 있어.’

  승혜는 승태를 보자마자 꺼져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었다.

16558037953096.jpg‘나한테 딸이 있어……. 그 애를 부탁해, 오빠……. 아무것도 묻지 말고……. 부탁이야.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오빠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

  그리고 이 말이 유언이었던 양, 승혜는 사흘 후 세상을 떴다. 승태가 부고를 전해 들은 건 딱딱한 도로 위, 아내 지숙과 함께 수녀님이 운영한다는 보육원으로 나린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급작스러운 부고에 차를 돌려 병원으로 가면서 승태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 승혜가 세상을 뜬 게 꼭 제 탓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쉽게 약속하지 말걸. 삶에 미련이 남도록, 딸아이를 돌봐달란 청을 그렇게 한 번에 수락하지 말걸……. 이후 승태는 승혜의 장례식장에서 나린을 처음 보게 되었다. 세 살배기 나린은 승혜와 똑 닮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의 죽음도 모른 채 해맑게 웃는 나린을 본 그는 찢어지는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승태는 나린을 품에 안고, 굳건한 약속을 했다.

16558037953096.jpg‘오냐. 이제부터는 온전한 내 딸로 키우마.’

호강은 못 시켜도 절대 이 아이를 서럽게 만드는 일은 없을 거다. 두고 봐라. 그건 동생에게 하는 건지, 스스로에게 하는 건지 모를 다짐과도 같았다. 회상의 터널을 빠져나온 승태가 흙바닥에 담뱃불을 짓이겨 끈다. 후회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때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다. 나린의 아빠가 누군지, 어쩌다가 혼자서 아이를 키우게 된 건지. 그러나 생명이 꺼져가는 동생을 앞에 두고 그런 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곱디곱던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는 승태의 눈시울이 검붉게 물들었다. *** 승태에게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리고 진이 빠진 나린은 주방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이사 온 뒤 쭉 주인 없던 방이어서 곳곳에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수정이 준비해준 이부자리 안으로 기어 들어가자 포근하고 평온한 기운이 나린을 감쌌다. 마침내,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누운 나린은 아직 열두 시 전인 걸 확인하고 윤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매불망 기다렸는지 통화 연결음 한 번 만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16558037953108.jpg[여보세요.]

16558037953111.jpg“뭐 해요? 침대예요?”

16558037953108.jpg[응. 넌?]

16558037953111.jpg“저도 방금 씻고 누웠어요.”

16558037953108.jpg[……괜찮아?]

몸 상태는 괜찮은지, 집안 분위기는 괜찮은지, 많이 울진 않았는지. 많은 걸 응축한 질문.

16558037953111.jpg“네.”

나린도 모든 걸 응축해서 답을 해준다.

16558037953108.jpg[보고 싶다…….]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16558037953111.jpg“……저도요.”

나린의 한 마디에 그의 목소리가 활기를 띠었다.

16558037953108.jpg[지금 보러 갈 수 있어. 갈까?]

16558037953111.jpg“너무 늦었어요.”

16558037953108.jpg[…….]

16558037953111.jpg“윤완 오빠.”

16558037953108.jpg[응?]

16558037953111.jpg“고마워요.”

16558037953108.jpg[뭐가.]

16558037953111.jpg“전부 다요.”

이 상황에 그마저 옆에 없었더라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짤막하게 윤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16558037953108.jpg[또 그러네. 누굴 닮아서 인사성이 그렇게 밝아.]

16558037953111.jpg“…….”

16558037953108.jpg[나도 고마워.]

16558037953111.jpg“뭐가요?”

16558037953108.jpg[전부 다.]

아마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평생 사랑한다는 말을 할 일이 없었겠지. 그러니 이 말은 전부 네 거야.

16558037953108.jpg[사랑해.]

16558037953111.jpg“……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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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037953108.jpg[잘 자고, 우리 내일 만나자.]

16558037953111.jpg“네.”

전화를 끊자 짙은 어둠과 소리 없는 평화가 한꺼번에 스며들었다. 한층 더 포근한 기분이 된 나린은 폰을 안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폰에 남은 열기가 윤완의 체온처럼 느껴졌다. ***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세훈이 안으로 들어선다.

16558037986013.jpg“할아버지, 몸은 좀 어떠세요?”

걱정스런 물음에 태용이 무기력한 미소로 답을 했다.

16558038002602.png“괜찮다…….”

거짓말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주치의가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며 경고를 해 왔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협박 아닌 협박도 함께. 그러나 태용은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고 우겼다. 나이든 몸으로 수술대에 오르는 건 주검이 되어 실려 나올 수도 있는 무서운 일이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 그에겐 이승에서의 확실한 시간이 더 절실했다. 세훈은 태용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16558037986013.jpg“응접실에 손님이 와 계신데, 할아버지 힘드시면 돌려보낼게요.”

16558038002602.png“손님이라니……?”

16558037986013.jpg“강승태 씨라고…… 나린이 외삼촌이요.”

잠을 설친 승태는 날이 밝는 대로 연 회장의 집으로 달려왔다. 언젠가 나린에게 주소를 물어 메모해둔 게 있었다. 대문 앞에서 죽치고 있던 그는 출근길이던 세훈과 맞닥뜨렸다. 나린의 외삼촌이라고 하자 세훈이 승태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를 매만지던 태용의 손이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16558037986013.jpg“돌려보낼까요?”

올라간 세훈의 말끝은 중재자 역할에 충실하듯 몹시도 건조했다.

16558038002602.png“아니다. 나가자.”

몸을 일으킨 태용은 갈지자걸음을 방 밖으로 옮겼다. 바투 붙은 세훈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태용을 부축한다. 응접실에서 대기 중이던 승태는 태용을 보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훈은 차도 필요 없으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미옥에게 당부한 후 문을 꽉 닫았다. 승태는 예상보다 더 노쇠한 태용의 몰골에 입이 굳어졌다. 실컷 따져 물으러 왔더니. 불쌍한 내 동생 대신 실컷 퍼부어주려 했더니.

16558038002602.png“나린이 외삼촌이오?”

상석에 앉은 태용이 먼저 말을 붙이고, 그를 따라 착석한 승태의 두 주먹이 거세게 말아 쥐어졌다.

16558037953096.jpg“예.”

16558038002602.png“그래, 나를 만나러 왔다고…….”

덤덤한 태용의 태도는 승태의 가슴 안에 일렁이던 분노의 불씨를 되살렸다. 아무리 삼십 년 전 일이라지만, 부모 자식을 반으로 갈라놓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도 태연자약한 모습에 너무너무 화가 났다. 그러자 아무리 유약한 모습을 한 노인이라도 못할 말이 뭐지 싶었다. 욱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한 그가 언성을 드높인다.

16558037953096.jpg“왜 그랬습니까?!”

16558038002602.png“…….”

16558037953096.jpg“왜 그렇게까지 한 겁니까?! 그 어린 것들에게서 엄마, 아빠를 뺏고 그래, 밥이 입으로 넘어가더이까?!”

태용과 승태의 대치 속에 긴 적막이 이어졌다. 섣불리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는 세훈을 뒷걸음질 치게 했다. 그의 발이 서재 문 바로 앞에서 멈춘다. 특별히 개입해야 할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없는 것처럼 물러나 있을 생각이었다. 이윽고 세훈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목도되었다. 서서히 하강하며 내려앉는 태용의 무릎. 처음이었다. 할아버지가 누군가에게 꿇어앉아 조아리는 모습을 보는 건.

16558038002602.png“잘못했소.”

이 한마디에 승태의 눈이 시뻘건 색으로 뒤덮였다. 선명히 붉어진 흰자위를 보며, 세훈은 승태의 눈 안 실핏줄이 전부 터져 나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태용은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치기 어린 지난날의 잘못을 소리 내어 인정하고 나니, 흘러간 세월이 더욱 한스러워 가슴이 미어졌다.

16558038002602.png“……내가 어리석었소.”

고개를 든 태용의 눈은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우룩했다.

16558038002602.png“정말 죽을죄를 지었소.”

말꼬리가 흩어지며 흐느낌이 섞여 들었다. 이 속죄의 언어들은 눈앞의 상대를 향하고 있는 건지, 하늘을 향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멍한 눈을 하고 선 승태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섭리가 이토록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 자리로 돌아온 기호는 머리가 멍했다. 방금 전 국장으로부터 기사를 가져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계속 반려당하기만 했던 창조 일보 외동딸의 갑질 폭로 기사를.

16558037953096.jpg‘왜 결정이 번복된 겁니까?’

  기호의 질문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쳤다. 늘 그렇듯 까라면 까라는 식의 답변만이 돌아왔다.

16558037953096.jpg‘받아주면 그냥 얼씨구나 해. 목매던 거 아냐? 대신 제대로 가져와. 창조 일보 쪽에서 찍소리 못하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어제, 그제 취재를 거부하던 피해자들이 마음을 바꿨다며 하나둘 연락을 해온 것도 참 공교로웠다. 일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풀릴 수가 있나.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던 기호는 마우스를 쥐고 혜원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놓은 폴더를 열었다. 갑자기 왜. 그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기회가 왔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매달리고 준비해 온 것들을 세상에 널리 퍼뜨릴 기회가. 지아를 떠올리자 비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사명감도 단단해졌다. 제대로 써보자. 이전에 써두었던 기사를 일독해본다. 어딘지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원과 지아 사이에 있었던 일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인터넷에 올릴 땐 녹음본도 첨부하는 편이 좋겠지. 새 문서 작성 화면을 연 그는 막힘없이 자판을 두드려 나갔다. ***

16558037953096.jpg“조치했습니다, 부사장님.”

16558037953108.jpg“…….”

16558037953096.jpg“정음 일보 쪽에서 움직여주기로 했습니다.”

윤완이 답이 없자 손 차장이 부언한다. 통유리창과 나란하던 윤완의 의자가 빙글 돌아 손 차장을 향했다.

16558037953108.jpg“잘 됐네요. 피해자 증언도 사전에 확보된 거죠?”

16558037953096.jpg“네. 입 닫는 대가로 받은 위로금과 사실을 폭로했을 시 물어줘야 할 위약금을 해결해준다고 하니 나서서 증언하겠다고 했습니다.”

16558037953108.jpg“장기호 기자는 이 사실을 모르고요.”

16558037953096.jpg“네. 본인의 설득에 피해자들이 용기를 낸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됐다. 이러면 기사가 나가도 어느 용감한 기자에게로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될 것이다.

16558037953108.jpg“수고 많았습니다.”

윤완의 치하에 손 차장은 한 번 더 머리를 조아린 뒤 물러났다. 주먹 쥔 윤완의 손이 책상 위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16558037953108.jpg‘그렇지만 신혜원……. 네가 그토록 원하니 상대해 줄 수밖에.’

윤완은 훨씬 오래 전부터 혜원을 무너뜨릴 약점을 확보해두고 있었다. 약혼 얘기를 무효화한 순간부터 무슨 짓을 벌일까 싶어 사전에 입수해둔 것이었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사용하는 순간 혜원을 이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리고 말 테니까. 명예욕과 자존심 빼면 시체인 혜원에게 그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참았다. 전시회 때도 재희를 응징한 것과 달리 혜원은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 선택에 천회를 안기듯 혜원의 횡포는 도를 넘어섰다. 그러니 윤완도 이제는 끝장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미 없는 싸움에 그만 마침표를 찍어야겠다. 혜원에게 이 세상엔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교훈을 톡톡히 체득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16558037953096.jpg‘저희 말고 같은 걸 캐는 사람이 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밀 지령을 수행하던 손 차장은 그 말고도 혜원의 약점을 파헤치는 또 다른 이의 존재를 알려 왔다. 그건 공교롭게도 한지아의 지인이라던 정음 일보 장기호 기자였다. 윤완의 비서실은 지아의 취업 문제로 그와 접촉한 적이 있었다. 기호의 의도는 쉽게 파악되었다. 뜻밖의 카드를 또 하나 쥐게 된 손 차장은 기호를 이용한 새 판을 짜 왔다. 전면에 나서는 사람은 정의로운 장기호 기자. 윤완의 비서실은 그의 취재가 순조롭도록 은밀히, 그림자처럼 지원하기만 하면 된다. 지아의 취업을 해결해준 이가 태준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기호는 배후에 도일 그룹이 있으리라고 꿈에도 상상 못할 것이었다. 손 차장의 계획을 보고받은 윤완은 내년에 그를 부장으로 특진시켜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짠 판이 실행되는 걸 구경하는 일만이 남았다. 이름이 새겨진 승리의 트로피를 코앞에 두고도 윤완은 결코 즐겁지 않았다. 그저 이런 소득 없고 피곤한 싸움이 이번이 마지막이기만을 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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