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열병2022.01.14.
하루 휴가로 몸을 추스른 나린은 출근하자마자 팀장을 찾아가 퇴직 의사를 밝혔다. 윤완의 허락도 받았겠다, 더는 미룰 이유가 없었다. 나린의 출신이 밝혀졌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예견해온 재무팀장은 굳이 잡으려 시도하지 않았다.
“후임 지정되면 인수인계 빠짐없이 하겠습니다.”
나린은 퇴사하는 순간까지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면담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인사 포털에 접속한 뒤 퇴직원을 제출한다. 절차는 간단했다. 퇴직 날짜를 지정하고 버튼 몇 번 누르는 걸로 끝이었다. 퇴사일은 4주 후로 정했다. 2주는 인수인계를 하고 나머지 2주는 남은 연차를 몰아 쓸 계획이었다. 이렇게 하면 인수인계 기간을 제외하고 한 달 가까운 자유 시간이 확보되었다. 방학이 따로 없는 직장인에게는 놓치기 아까운, 온전한 휴식의 기회였다. 오후에는 업무 리더인 박 부장에게도 퇴사 사실을 알렸다. 새로 업무 분장을 할 수 있도록 담당 업무의 간략한 내용과 수행 주기, 소요 시간을 꼼꼼히 작성하여 메일로 송부했다. 퇴사 소식을 들은 팀원들은 앞다투어 서운하다는 메신저를 보내왔다. 그중 가장 서운해하는 사람은 팀에서 나린을 가장 잘 따랐던 후배 진원이었다.
[선배님, 진짜예요? 진짜 그만두세요?]
[응. 그렇게 됐어.]
[안 돼요. 가지 마세요…….]
메신저 뒤에 붙은 말줄임표가 서운한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커피 사줄까?]
[네…….]
나린은 자꾸 점의 개수로 기분을 표현하는 그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역삼각형 모양의 호출 버튼을 누르자 한 층 위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왔다. 띵. 도착음이 울리고.
“어.”
나린과 진원이 동시에 주춤했다. 좁은 승강기 안에는 윤완이 타고 있었다. 마침 대표이사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미간을 좁힌 윤완은 나린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타자.”
윤완이 내릴 기미가 없자 나린이 진원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진원은 목청 높여 인사했다. 나린 또한 짧게 묵례하였다.
“어디 가?”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답례한 윤완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나린을 보며 물었다. 몸도 안 좋으면서.
“커피 사러요.”
나린은 진원의 눈치를 살폈다. 윤완과의 사적인 친분을 밝히긴 했어도 회사에서 티를 내는 건 여전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퇴사할 거긴 하지만, 그래도.
“지하?”
“아뇨. 밖이요.”
착한 후배에게 마지막으로 사주는 커피이니, 이왕이면 사내 카페 말고 더 비싸고 맛있는 커피를 먹이고 싶었다. 윤완은 이 우연한 만남이 탐탁지 않아졌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카페에서 마주쳤을 때 같이 있던 후배도 저 녀석이었던 것 같은데. 업무가 겹치는 건가. 아니면 친한 후배?
“부사장님은요?”
사무실에서 내리지 않은 걸 수상하게 여긴 나린이 묻는다.
“바람 쐬러.”
윤완의 답은 진실이 아니었다. 원래 그는 나린과 진원이 타기 전에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나린을 보자, 두 다리가 움직이라는 뇌의 명령을 있는 힘껏 거부했다. 윤완은 임기응변을 발휘해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쭉 내려갈 생각이었던 것처럼. 정말 바람 쐬러 나가는 길이었던 양 천연덕스럽게.
“같이 가. 내가 사줄게, 커피.”
로비에 도착한 뒤, 윤완이 나린과 진원 사이로 슥 끼어든다. 윤완이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나린에게 붙어 있던 진원이 서너 발짝 옆으로 밀려났다.
“아. 안 그래도 괜찮은데…….”
나린은 곤란해서 말끝을 흐렸다. 난 괜찮지만, 진원이 같은 일반 사원은 부사장님이랑 같이 걷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한다고요.
“왜? 싫어?”
“아뇨, 그게 아니라.”
나린이 저도 모르게 흘깃 진원을 돌아보자,
“전 좋습니다! 완전 영광이죠. 하하.”
진원은 일 년차 사원의 패기를 담아 커다랗게 외쳤다. 윤완 앞에선 언제나 데시벨이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미안해. 진원아.’
나린은 들키지 않게 입 모양만 해 보였다. 정문을 통과해 실외로 나오는데 심한 어지럼증이 나린을 습격했다. 햇살이 내리쬐는 청명한 날씨에도 시야가 흐릿흐릿하기만 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 안의 기운이 전부 소진되는 기분. 그런 의미에서 가려는 카페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건 참 다행스러웠다.
“먼저 자리 잡고 있어요.”
카페에 도착해서 진원에게 지시한 윤완은 진원을 따라가려는 나린을 붙잡았다.
“연 대리는 나랑 주문하고.”
결국 진원 혼자서 자리를 수배하러 떠난 후.
“너무해요.”
나린이 눈을 흘겼다.
“내가 뭘.”
“퇴사하기 전에 서운해하는 후배 커피 좀 사주겠다는데, 그걸 꼭 이렇게 끼어들어야겠어요?”
“…….”
윤완은 타박을 뒤로한 채 나린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뭐가요?”
“몸 상태.”
“……그럼요.”
더워서 땀이 좀 나는 것 같긴 하지만…….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도 같지만…….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가는 나린의 걸음걸이는 어딘지 무거워보였다. 당장이라도 부축해주고 싶었지만 진원도 있고 다른 보는 눈도 있고,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테이블로 온 윤완은 진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옆자리를 확보해주려 안으로 쏙 들어가는데, 나린이 당당하게 진원의 옆으로 갔다. 윤완의 미간이 티나게 일그러졌다.
“진동벨 주세요, 선배님.”
진원이 손을 내밀었지만 나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바깥에 앉은 김에 내가 할게.”
“아니에요. 이런 건 막내 일이죠.”
“그런 게 어딨어. 아무나 하면 어때서.”
하지만 윤완을 의식한 진원은 기어코 진동벨을 빼앗아갔다. 진동벨을 두고 아옹다옹 하는 모습이 막역해보여서, 윤완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근데 선배님, 몸 안 좋으세요?”
진원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나린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챈 것이었다.
“응.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오전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하루 더 쉬라는 부사장님…… 아니, 윤완 오빠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보다. 진원이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반차 쓰긴 아까운데……. 퇴근 때까지 괜찮으시겠어요?”
“응…….”
“몸도 안 좋으시면서 무슨 커피를 사주신다고…….”
대화에서 철저히 배제된 윤완은 소외감을 느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훼방 놓아야겠는데. 커피가 나오면 바로 일어나야겠다. 조직의 수장이 들어가겠다는데 안 따라올 순 없을 테니까.
‘둘 다 인건비가 얼만데, 근무 시간에 놀게 둘 순 없지.’
어디까지나 원가 관리의 막중한 소임을 맡은 CFO로서 내린 결정이라고, 윤완은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지이이이잉. 진원의 손에 들린 진동벨이 요란하게 울어댄다. 진원이 커피를 가지러 떠나자, 윤완은 한마디 할 작정으로 운을 뗐다. 연나린 한정 질투의 화신이란 건 공공연한 비밀이니 거칠 것이 없었다.
“연나린.”
그러나 나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감기어진 눈. 송골송골 이마를 덮은 식은땀. 사색이 된 윤완은 본능이 조종하는 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한 달음에 달려온 그가 키를 낮추는데, 기다렸다는 듯 나린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러고는 스르르, 그에게로 기울어졌다.
***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드라마에서 보면 병원 천장이 이런 무늬였던 것 같기도 하고……. 나린이 눈동자를 굴리며 끊어져 버린 기억을 이으려 노력하는 사이, 윤완의 얼굴이 불쑥 앞에 놓였다.
“정신이 들어?”
“여기가 어디예요?”
“병원.”
“…….”
“쓰러졌어, 너. 열 때문에.”
“아.”
윤완은 윗입술로 지그시 아랫입술을 눌렀다. 질투에 눈이 멀어 나린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제 혜원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부터 말렸어야 했는데.
“괜찮아?”
“네.”
윤완의 손등이 나린의 이마 위를 덮고,
“다행히 열은 내린 것 같네.”
떨어진 나린의 체온을 따라 윤완의 심장 박동 수도 안정을 되찾는다. 침대 위 동그란 호출벨을 누르자 간호사가 달려왔다. 이어서 바로 담당 의사도 도착했다. 세심한 문진과 꼼꼼한 진찰에, 나린은 고작 감기에도 과잉 서비스가 이어진단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저,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퇴원해도 될까요?”
나린이 물었지만 담당 의사는 완곡하게 만류했다.
“열도 내렸으니 수액만 다 들어가면 퇴원하셔도 될 것 같긴 합니다만, 괜찮으시면 하루 더 계시죠.”
의료진이 떠난 후 나린이 윤완에게 거듭 부탁했다.
“저 퇴원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의사의 권유대로 하루 더 있으라는 윤완의 설득에도 나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담당의와 좀 더 얘기를 나눠보기로 한 윤완이 병실을 나가고, 혼자 남은 나린은 폰을 찾았다. 통화 어플에서 수정의 이름을 검색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아프고 나니 제일 먼저 보고 싶은 얼굴. 내 일을 누구보다 제 일처럼 가슴 아파하고 걱정해 줄 소중한 사람들.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다. 진짜 집으로 돌아가자. 이제는 그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연락을 받은 수정은 만사 제쳐놓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퇴원을 해서 외삼촌 집으로 향하는 길. 운전대를 잡은 윤완 대신 수정이 나린의 곁을 지켰다.
“먼저 올라갈래?”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뒤 나린이 수정에게 이른다.
“알았어. 가서 이불 펴놓을게.”
차에서 내리기 전, 수정은 윤완을 힐끔거렸다.
‘사람이 간다는데 잘 가라는 인사조차 없네.’
진짜 나린이 아니면 일절 관심 없는 것 하나만큼은 인정해줘야겠다. 차 문을 닫으며 일소하였다.
“잠깐 있어.”
무슨 생각이 났는지 윤완은 급히 수정을 따라 내렸다.
“수정 씨.”
“네?”
간다고 할 땐 모른 척하더니 뒤늦게 쫓아 나온 그를 돌아보며 수정이 갸우뚱한다.
“전화번호 좀 알 수 있습니까?”
“네?”
“나린이랑 가까운 사람 연락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아, 네.”
“…….”
“아픈 애 너무 오래 붙잡고 있진 마시고요.”
수정은 그의 폰에 번호를 찍어주며 당부했다. 차로 돌아온 윤완은 나린이 있는 뒷좌석으로 갔다. 파리한 얼굴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애태우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예뻐서. 사랑스러워서. 아파서.
“아프면 무리하지 말고 다음에 얘기하는 게 어때.”
걱정이 된 윤완이 제의했지만 나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외삼촌도 아셔야죠.”
“정말 괜찮겠어?”
“네.”
“힘들면 같이 올라가줄게.”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누구보다 내 편인 사람들이니까. 내…… 가족들이니까.
“내일 하루 더 휴가내고 쉬어.”
“괜찮아요.”
“또 말 안 듣지.”
“진짜 괜찮아요.”
“왜 고집 부리는데. 꼭 처리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거야?”
“……네.”
“뭔데?”
답을 들어 보고 가능하면 납기를 미루거나 담당자를 바꿀 요량에서 윤완이 캐물었다. 기운 없는 나린의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번진다.
“윤완 오빠 얼굴 보는 거요.”
“뭐…….”
윤완이 미간을 찡긋거리는데, 나린이 그의 팔에 덥석 제 팔을 감았다. 윤완의 어깨 위로 살포시 자그마한 얼굴이 내려앉았다.
“이제 출근해서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러니까 하루도 빼먹기 싫어요.”
나린의 목소리는 나긋나긋 상냥하고 사랑스러웠다. 윤완은 붙잡히지 않은 쪽 팔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보내기 싫다. 이대로 들여보내고 나면 얼마나 또 내 애를 태울지. 아마, 밤새도록 네 생각을 하겠지. 심장이 마구 뛰어서 잠도 잘 수 없을 거야…….
“이따가 자기 전에 전화해도 돼요?”
윤완의 속도 모르고 나린이 태평하게 물었다.
“응.”
“못할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지는 말고요. 열두 시 넘으면 안 할게요.”
“괜찮으니까 하고 싶을 때 편하게 해. 새벽이어도 상관 안 하니까.”
“그럼, 조심히 가세요.”
인사를 건넨 나린은 날아가듯 차에서 내렸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윤완의 눈이 흠뻑 애수에 젖어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놓쳐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 분명 연인이란 이름으로 옆에 있는데도.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기분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는 윤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