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무슨 일이 벌어지든2022.01.11.
나린이 떠나고 태용은 곧바로 앓아누웠다. 집안 분위기도 따라서 착 가라앉고 말았다. 어쩌면 원래대로 되돌아간 것일 수도 있었다. 집안 곳곳 따스한 기운을 옮기며 돌아다니던 존재가 없던 예전의 일상으로.
“할아버지, 많이 안 좋으시대요?”
키친으로 향하던 세훈이 막 태용의 주치의를 배웅한 채 여사를 맞닥뜨리고 묻는다.
“그냥, 기력이 좀 쇠해지셨대.”
채 여사는 주치의로부터 들은 거짓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였다. 태용이 누누이 입단속을 한 탓에 주치의도 상황의 심각성을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오랜만에 말벗이 되어 드리는 효도가 하고 싶어진 세훈은 푸념을 하며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게나 말이야.”
맞은편에 앉은 채 여사가 나직이 공감을 표했다. 나린이 떠난 집안은 무척이나 쓸쓸하게 느껴졌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던 아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 존재감이 더 컸었나 보다.
“어머니는 그때 전혀 모르셨어요? 작은아버지네 일.”
“몰랐어. 할아버지께서 작은아버지 결혼 문제만큼은 워낙 말씀을 안 하시기도 했고, 나도 너 키우느라 정신없었을 때이기도 하고.”
유모에게 육아를 일임하는 여타 재벌가 사모님들과 달리, 채 여사는 세훈을 키우는 모든 과정을 거의 혼자 힘으로 헤쳐 왔다. 도움을 아주 안 받은 건 아니었지만 세훈의 성장 과정에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 후에 이 사실을 안 세훈은 어머니를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다현이랑 나린이를 봐서라도 적당히 하시지.”
안타까운 마음에 세훈의 입에선 원망의 말이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 할아버지는 무너뜨릴 수 없는 큰 산이었다. 엄하기만 한 아버지를 대신해 의지해온 인생의 롤 모델. 앞으로 회사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의 확고한 이정표. 그랬으니까.
“젊었을 때 할아버지 성정을 생각해보면 놀랄 것도 없지…….”
채 여사는 지금의 태용이 얼마나 사무치게 후회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한 번만 고집을 꺾었더라면. 딱 한 번만 패배를 시인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지금보다는 훨씬 많이 웃을 수 있는 미래가.
“나린이랑 윤완이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세훈은 지나간 일을 왈가왈부하는 대신 현재를 걱정했다. 나린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린과 윤완도 비상식적인 반대에 부딪혀 망가지게 될까 두려웠다. 세훈의 중얼거림에 채 여사는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도일 그룹에서 이 일을 알면…….’
채 여사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길게도 뻗어 나온다.
‘나린이 성격에 그 땅을 증여받을 리도 없고. 그런 조건 없이 도일 그룹에서 나린일 받아줄 리도 없고.’
이젠 땅이 있어도 거부당할 가능성이 높다. 복잡한 출생의 비밀에 테라 호텔가를 뛰쳐나가기까지 했으니. 채 여사의 시선이 쓸쓸히 2층을 향했다.
‘이렇게 훌쩍 떠날 거였으면 정이라도 들이질 말든지.’
한숨이 거듭 길게 뻗어 나왔다. *** 몸살감기를 앓게 된 나린은 오전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수액 주사를 맞고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다. 윤완이 부른 주치의가 떠난 후 비서가 요깃거리를 포장해왔다. 나린은 성의를 생각해서 억지로 몇 술 떠 넣었다. 입안이 뜨겁고 건조하여 먹기가 힘들었다.
“윤완 오빠.”
숟가락을 내려놓은 나린이 윤완을 부른다.
“응?”
걱정 어린 눈길이 나린을 향해 떨어졌다. 따끔한 목 안으로 마른침을 넘기느라 나린이 잠시 인상을 찌푸린다. 바싹 메마른 입술이 힘겹게 달싹여졌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알쏭달쏭한 물음에 윤완의 고개가 사선으로 기울었다.
“무슨 얘기야?”
“신혜원 씨 말이에요.”
“…….”
“뭔가 계획하고 있는 게 있는 거죠?”
전시회장에서 벌인 소동으로 재희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던 윤완이다. 그보다 더 엄청난 일을 벌인 혜원을 그냥 넘길 리 없다는 것쯤 너무도 당연했다. 아픈 나린을 보살피느라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윤완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그걸 네가 왜 신경 써.”
“저 때문에 벌어질 일이니, 저도 알려주세요.”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나린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더 초롱초롱 빛났다. 그 눈빛을 보며 윤완은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맞춰주는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기어이 고집을 꺾어 놓고야 마는 그녀였다. 윤완은 나린에게 그동안 손 차장을 시켜 파악한 사실과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얘기해주었다. *** 내가 왜 그랬을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찾아오지만 혜원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다. 날 때부터 온 세상이 제 왕국이던 혜원에게 잠들기 전 이불 킥을 할 만큼 수치심을 안길 일이 흔할 리 없었다.
[내일 열한 시. Y 호텔 2층 라벤더.]
얼마 만에 온 연락이란 말인가. 윤완의 이름으로 뜬 메시지에 혜원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갔다. 선약도 단박에 취소를 할 만큼 급박하고 간절했다.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나린은 그 길로 테라 호텔 일가를 떠났다고 했다.
‘그럴 줄 알았어. 자존심에라도 더 못 붙어 있었겠지.’
나린이 떠난 건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지만 원인이 무엇이든 결과만큼은 혜원이 바라던 대로였다. 눈엣가시 같던 존재를 내 세상에서 날려버렸다. 앓던 이가 빠지고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다시는 보지 말자, 다시는…….’
승리감에 도취된 혜원은 요 며칠 불쑥불쑥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그리고 윤완으로부터 날아온 메시지는 또 한 번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연나린이 보잘것없는 집안으로 되돌아가고 나니 정신을 차린 건 아닐까. 다시 나와의 약혼이 필요해진 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땐 쓸모없는 진심 따위 갈구하지 않을 거다. 도윤완의 옆자리. 도일 그룹 안주인. 그 타이틀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심산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혜원은 VIP 휴게실에 들러 메이크업 상태를 점검했다. 예쁘게 보이고 싶다. 보는 순간 마음이 동할 만큼. 나를 놓은 걸 땅을 치고 후회할 만큼. 카페로 내려오니 윤완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혜원은 윤완의 이름으로 된 예약을 확인하고 자리를 안내받았다. 그답지 않게 사방이 트인 장소 선정에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설레고 긴장된 마음에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혜원이 카페 입구로 고개를 돌리는데, 뜻밖의 인물이 안으로 들어선다. 혜원의 얼굴이 험악스레 구겨졌다.
“너…….”
창백한 얼굴을 한 상대는 당혹스러워하는 혜원의 반응을 무시하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혜원이 마주한 상대, 나린이 담담하고 평온한 인사를 건넨다.
“네가 왜…….”
그러니까 윤완이 보낸 메시지는 그저 미끼였나 보다. 혜원의 뒷골이 팽팽해졌다. 개방적인 자리를 택한 것도 둘만 있게 하지 않으려는 윤완의 배려였을 거고. 일그러진 질투심이 되살아나며 혜원의 왼쪽 가슴을 콱 깨물었다.
‘모든 걸 다 알고도 저 애를 포기하지 않았단 말이야?’
종업원이 주문을 받아간 뒤 테이블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혜원과 나린, 어느 쪽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안한 건 켕기는 게 있는 혜원이었다. 나린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혜원을 쳐다보았다. 종업원이 차를 내오자, 은은한 차향이 긴장된 분위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평일인데 회사 안 갔나 봐요?”
뻔뻔함을 되찾은 혜원이 먼저 입을 놀렸다. 이 짧은 질문은 나린의 처지를 일깨워줄 의도를 담고 있었다. 너 같이 평범한 회사원 따위 나한텐 아무것도 아니야. 이젠 그나마 있던 테라 호텔 배경마저 사라졌잖아?
“휴가예요.”
그럼에도 나린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얕은수에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 저보다 약한 상대는 어떻게든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이제는 무섭다기보다 불쌍해 보였다. 모두가 선망하는 배경을 갖고 태어났으면서 저렇게 가치 없게 사는 것도 참 딱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비겁하게 윤완 오빠 시켜서 불러내고.”
혜원이 쏘아붙이자 나린이 가만히 시선을 내려뜨렸다.
“……사과받으러 왔어요.”
내려뜨려진 시선과 반대로 말투는 차갑고 뾰족했다. 혜원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무슨 사과?”
“그동안 나한테 했던 행동들 전부요. 전시회장에서의 일. 우리 부모님 과거 캐내서 함부로 폭로한 일…….”
여유로운 미소가 혜원의 입가를 물들였다. 이럴 줄 알고 준비해둔 변명거리가 있었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거죠? 전시회장에서의 일은 재희 언니가 커피를 쏟아서 일어난 거라 나하곤 상관없고…….”
“…….”
“지난 금요일엔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을 알려 준 것뿐이에요. 연 회장님께 속고 있는 그쪽이 안타까워서.”
원래는 윤완이나 세훈을 상대로 써먹을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 못 했으니까.
“…….”
“오히려 어머니의 원통한 사연을 알려준 나한테 고맙다고 하는 게 맞지 않겠어요?”
혜원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참 빈틈없는 시나리오였다. 이런 변명을 하리란 걸 충분히 예견하고 나온 나린은 동요가 없었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나린이 마침내 고개를 치켜들고. 나린의 눈이 매섭게 겨누어지자 혜원은 괜히 긴장이 되어 꼴깍 침을 삼켰다.
“잘못이죠.”
“…….”
“똑같이 물에 빠뜨렸어도 수영을 가르쳐주려는 사람과 익사시키려는 사람이 천지 차이인 것처럼요. 후자는 살인미수거든요.”
나린이 꺼내든 모진 비유에 혜원의 눈썹 사이로 쭈글쭈글 주름이 진다.
“뭐?”
“신혜원 씨는 나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내가 상처받기를 바란 거잖아요.”
“…….”
“물에 빠뜨려 익사하길 바랐던 거…… 아닌가요?”
“자격지심에 소설 쓰지 말아요. 내가 왜 그쪽이 상처받기를 바라요? 그쪽이 나한테 뭐라고?”
정곡을 찔린 혜원은 제풀에 목소리를 드높였다. 나린은 혜원의 적반하장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과하세요.”
“…….”
“나뿐만 아니라 한지아 씨를 포함해서 당신이 잘못한 사람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
“그러면 적어도 나는, 용서해줄게요.”
혜원의 아랫입술이 잘근, 뭉개어졌다. 묘하게 동정하는 것 같은 저 눈빛이 너무 기분 나쁘다. 가진 것 없는 상대의 동정을 받는 것만큼 어이없는 일도 없었다.
“한지아? 그건 또 누구야? 자꾸 이상한 말 하지 말아요. 누가 들으면 진짜로 내가 뭐 잘못한 줄 알겠네.”
그럼에도 여유로운 척을 해 보였다. 상대가 저토록 담담한데 흥분을 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린이 짧게 한숨을 뱉는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였으니까. 막상 일을 벌이긴 했지만, 조금은 뜨끔하지 않았을까. 아주 조금은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그러니 한 번쯤은 만나서 얘기해보고 싶었다. 한 번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바로잡을 기회를. 헛수고일 거라던 윤완을 설득해 이 자리에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받은 대로 돌려주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신혜원 씨 상대로는 그럴 필요도 있다고 생각이 되네요.”
한심하게 바라보는 나린의 눈빛에 혜원은 또 한 번 기분이 상했다.
‘저게?’
그러나 보는 눈도 많고, 무엇보다 윤완이 있어 건드릴 수 없었다. 혜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순간. 막 카페 입구를 통과해 들어오는 남자가 혜원의 시선을 앗아간다. 혜원뿐만이 아니었다. 카페 안의 모두가 힐끔힐끔 그를 곁눈질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목을 잡아채는 존재. 우뚝 솟은 키와 잘난 얼굴을 앞세운 윤완이 혜원과 나린의 테이블에 이르렀다. 로비에서 기다리다가, 얘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와본 것이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할 얘기 남았어?”
윤완의 질문에 나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 했어요.”
대답은 윤완을 향한 것이었지만 시선은 혜원에게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가자.”
윤완이 내민 손에 의지해 일어선 나린은 마지막으로 혜원을 돌아봤다.
“나는 그래도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건 전부 신혜원 씨 책임이에요.”
그러나 혜원에게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윤완이 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 완벽하게 투명인간 취급당했다는 사실만이 온 정신을 압도했다. 만나자는 윤완의 메시지 한방에 옆도 뒤도 안 보고 달려온 게 너무나 후회되고 수치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