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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찬란하게 행복했기를 (64/101)

#64. 찬란하게 행복했기를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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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1호의 주인들이 모였다.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비장미가 흘러넘쳤다. 특히 세훈은 곧장 링 위에 올려도 손색없을 정도의 살기를 발산하였다. 이 기세 그대로 신혜원, 윤재오를 찾아가 한바탕 뒤엎고 싶었지만 윤완이 말렸다. 엎을 때 엎더라도 철저하게 엎자는 것이었다. 다시는 이 따위 짓을 하지 못하도록.

16558037312498.jpg“너넨 그날 나린이 얼굴을 못 봐서 그래.”

빗속에서 보았던 나린의 표정을 회상한 세훈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허벅지를 내리쳤다.

16558037312498.jpg“내가 진짜……. 윤완이, 네가 안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니까.”

그러나 윤완은 보지 않고도 충분히 분노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들을 무너뜨려 줄까, 그 고민으로 하루 종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16558037312506.jpg“뭐부터 하면 돼?”

늘 침착하던 준우가 조급하게 굴었다. 다현의 쌍둥이 동생이었다고 하니 나린이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나린이의 적은 다현이의 적. 그러니 나의 적. 타도 신혜원, 타도 윤재오의 의지가 강건해진다.

1655803731251.jpg“준우, 넌 윤재오 심복 쪽을 맡아. 이 일을 캐내려 발로 뛴 작자들.”

윤완은 혜원과 재오의 결탁 구조를 훤히 꿰뚫었다. 결재자 신혜원, 실무자 윤재오. 그리고 윤재오를 위해 봉사했을 음지의 세력들. 빤한 일이었다.

16558037312506.jpg“그러니까 신혜원, 윤재오가 나린이한테 보여준 증거들 직접 수집한 사람들 말하는 거지?”

1655803731251.jpg“응.”

16558037312506.jpg“알았어.”

이 일에 재오도 관여한 건 세훈이 알아 온 정보였다. 어제 그렇게 정신없는 가운데서도, 세훈은 나린을 붙잡고 혜원과 만난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캐물었다. 그들은 세훈의 예상보다 훨씬 치밀하고 악독했다. 증인의 녹음, 그 옛날 병원 기록까지 제시했다는 말에 분노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1655803731251.jpg“태준이 너도 준우 좀 도와주고.”

윤완은 태준에게도 도움을 부탁했다. 일이 빠르게 처리되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16558037312531.jpg“그럴게.”

16558037312498.jpg“나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은 세훈이 안달을 하자, 윤완은 우선 그를 진정시켰다.

1655803731251.jpg“너는 일단 집에 집중해. 특히 연 회장님 잘 살펴드리고.”

16558037312498.jpg“그건 당연한 거고. 나도 뭐 할 일 좀 줘 봐. 윤재오 맡을까? 아님 신혜원?”

윤완의 고개가 가로로 돌아갔다.

1655803731251.jpg“아니. 둘 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얘기할게.”

16558037312498.jpg“무슨 생각?”

1655803731251.jpg“윤재오야 약점이 뻔하고, 신혜원도……. 작업 중이던 게 있거든.”

16558037312498.jpg“벌써?”

1655803731251.jpg“응. 혹시나 싶어서. 그 카드는 안 쓰고 싶었는데…….”

준우와 세훈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미래를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도윤완이 우리 편이라서 참 다행이었다.

1655803731251.jpg“아. 어제 나린이 너네 회사 가는 거 동의했어.”

윤완이 준우를 보며 불쑥 내뱉었다.

16558037312506.jpg“아, 그래?”

준우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번에 봤을 땐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기세더니. 결국 나린이는 이길 수 없다, 이건가.

1655803731251.jpg“잘 부탁해.”

뭐. 나린이가 알아서 잘할 테지만.

16558037312506.jpg“알겠어.”

때가 때이니만큼 준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8037312531.jpg“어제 나린 씨는 괜찮았어?”

태준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윤완에게 물었다.

1655803731251.jpg“응. 생각보다.”

16558037312498.jpg“많이 울진 않았고?”

세훈이 이어서 질문을 던진다. 이 말엔 답을 할 수 없었다.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나린의 얼굴이 눈앞에 선연해지는 기분이었다. *** 어제 윤완은 나린을 태우고 한참이나 차를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지난번에도 한 번 나린을 데려온 적이 있던 그의 펜트하우스였다. 하우스키핑 서비스도 잘 되어 있고, 커뮤니티 시설도 훌륭하고, 회사도 가깝고. 무엇보다 보안이 철저해서 나린 혼자 지내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1655803731251.jpg“당분간 여기 있어.”

윤완이 아일랜드 식탁 아래 캐리어를 내려놓으며 일렀다. 대리석 상판이 새것처럼 반들거렸다. 나린의 고개가 더욱 깊숙이 아래로 떨어졌다.

16558037345758.jpg“며칠만 신세 질게요.”

신세라니. 거리를 두는 듯한 표현에 윤완의 가슴이 휑뎅그렁해진다.

1655803731251.jpg“계속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너에게 주지 못할 게 뭐가 있을까. 내 마음을 다 가져간 너에게.

16558037345758.jpg“…….”

윤완은 말을 잃은 나린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작고 동그란 어깨에 살포시 두 손을 올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이 느릿하게 들어 올려졌다. 마음을 투명하게 내비치던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변해버렸다. 늘 생기로 가득하던 그녀가.

1655803731251.jpg“연나린…….”

여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 번도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 없는 삶이 처절하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16558037345758.jpg“부사장님…….”

1655803731251.jpg“응?”

처연히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의 마음을 시릿하게 만들었다.

16558037345758.jpg“저 이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해요.”

1655803731251.jpg“…….”

나린의 눈 끝에 눈물 구슬이 방울방울 아롱졌다. 저 구슬들이 굴러 내리는 순간 그의 심장도 함께 추락해버릴 것이었다. 나린은 서럽게 말을 이었다.

16558037345758.jpg“다시는 부사장님이 사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알아버렸으니까. 그 세상이 엄마에게 한 짓을. 나와 내 가족에게 한 짓을. 나린의 어깨를 그러쥐고 있는 윤완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차츰 악력을 더하던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렸다. 제 손 안에 있는 게 나린이란 걸 깨닫지 못했더라면 뼈를 으스러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안 돼. 안 돼, 연나린. 손을 뻗어서라도 나린의 입을 막아야겠다는 위기감이 온몸을 휘감는 그때.

16558037345758.jpg“……그래도 괜찮아요?”

비눗방울 터지듯 톡 터진 나린의 질문은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비껴간 것이었다. 나린의 눈에서 뚝뚝,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16558037345758.jpg“내가 부사장님 세상에 살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린이 양손을 번갈아 올려 눈물을 닦아낸다. 울먹이는 와중에도 고운 목소리는 또렷이 들려 왔다.

16558037345758.jpg“다시는 부사장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1655803731251.jpg“…….”

16558037345758.jpg“그렇다고 해서 부사장님이 없는 세상으로도 돌아갈 수가 없어요…….”

1655803731251.jpg“…….”

16558037345758.jpg“내가…… 테라 호텔 손녀가 아니라도 부사장님은 괜찮…….”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앙증맞은 입술이 탄탄한 가슴에 부닥치고. 그 바람에 나린의 말이 뚝 끊어졌다.

1655803731251.jpg“무슨 소릴 하는 거야.”

16558037345758.jpg“…….”

1655803731251.jpg“그런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16558037345758.jpg“…….”

1655803731251.jpg“제발 네 걱정만 하라고…….”

나린을 껴안은 윤완의 팔에 어지러이 힘줄이 그어졌다. 윤완의 등 위에서 나린의 두 손이 꽈악 깍지를 꼈다. 나는……. 못된 나는……. 대문 밖에 서 있는 부사장님을 보자마자 그런 걱정부터 했어요. 이곳을 떠나서도 계속 부사장님 곁에 있을 수 있을까. 계속 부사장님의 사랑스러운 연인일 수 있을까. 아빠도, 엄마도, 언니도 다 잊어버리고, 너무 이기적이게도. 깍지 낀 나린의 손이 단단히 조여졌다.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서. 결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서. 미안해요. 나만 행복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눈 감아 주세요. 부디, 이 한 사람만큼은. 나린의 눈물이 촉촉이 그의 가슴을 적신다. 설운 울음이 모두 잦아들 때까지 윤완은 그녀를 따스히, 꼭 안아주었다. *** 까만 밤. 하늘거리는 커튼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고층 빌딩들조차 빛을 잃은 어둠의 시간. 침대 위에 윤완과 나린이 마주 보고 누워 있다. 주먹 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나린의 눈꺼풀이 굳게 닫혔다. 윤완은 그의 팔 위에 살포시 머리를 얹은 나린을 애틋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16558037345758.jpg“부사장님…….”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나린이 그를 불렀다.

1655803731251.jpg“응?”

윤완은 나린의 어깨에 머물러 있는 이불을 목까지 잡아당겨 주었다. 비를 많이 맞은 탓에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자못 걱정이 됐다.

16558037345758.jpg“어제 집에 왔었다면서요. 세훈 오빠랑 같이.”

1655803731251.jpg“응.”

16558037345758.jpg“그럼, 방에 데려다준 사람도 부사장님이었어요?”

1655803731251.jpg“응.”

역시. 그랬구나.

16558037345758.jpg“고마워요.”

1655803731251.jpg“…….”

16558037345758.jpg“그리고 미안해요. 만날 폐만 끼쳐서…….”

1655803731251.jpg“그런 말, 나한텐 안 해도 돼.”

나는 널 안을 수 있어서 좋았으니까. 널 눕혀주고, 네 꿈 얘길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으니…….

16558037345758.jpg“…….”

1655803731251.jpg“나린아.”

16558037345758.jpg“네……?”

1655803731251.jpg“잠결에 했던 말 기억나?”

16558037345758.jpg“……제가 무슨 말을 했어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1655803731251.jpg“응.”

16558037345758.jpg“무슨 말이요……?”

1655803731251.jpg“이직하면 좋은 점도 있다고. 더 이상 부사장님이라고 안 불러도 된다고.”

16558037345758.jpg“아…….”

와인을 홀짝이면서 쥐어 짜낸 우스운 변명을 취중에 꺼내 놓았나 보다. 창피해서 얼굴을 가리는 나린을 보며 윤완의 입가에 평화로운 미소가 내려앉았다.

1655803731251.jpg“그래서, 마음을 바꿔볼까 봐.”

16558037345758.jpg“어떻게요?”

1655803731251.jpg“호칭 바꾸면 이직 허락해줄게.”

나린의 눈이 번쩍 뜨였다.

16558037345758.jpg“정말이죠?”

1655803731251.jpg“응.”

16558037345758.jpg“근데, 뭘로요?”

1655803731251.jpg“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16558037345758.jpg“음…….”

아이디어를 떠올리느라 나린의 몸이 이리저리 뒤척였다. 윤완은 품 안에서 사부작대는 나린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까 담요 아래서 오들오들 떨던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눈으로만 예뻐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16558037345758.jpg“아무거나 다 돼요?”

1655803731251.jpg“응.”

16558037345758.jpg“불러 보고 싶은 게 있긴 했는데…….”

1655803731251.jpg“뭐?”

16558037345758.jpg“윤완아……?”

침대에 누운 이래 사라진 적 없는 그의 미소가 자취를 감추고. 나린은 당황스러워하는 그의 얼굴에 대고 소리 내어 웃었다. 윤완은 한쪽 눈썹을 씰룩이며 완강히 거부했다.

1655803731251.jpg“……안 돼.”

16558037345758.jpg“왜 안 되는데요? 아무거나 다 된다면서요.”

1655803731251.jpg“안 된다면 안 돼.”

나린의 입에서 다시 한번 쿡쿡 웃음소리가 났다.

16558037345758.jpg“그럼 하나밖에 없네요.”

1655803731251.jpg“뭐?”

16558037345758.jpg“윤완 오빠.”

1655803731251.jpg“…….”

16558037345758.jpg“이건 마음에 들어요?”

준우도 오빠고 세훈이도 오빠긴 하지만…….

1655803731251.jpg“그래.”

16558037345758.jpg“그럼 앞으로는 새 호칭에 익숙해지도록 열심히 부를게요.”

1655803731251.jpg“…….”

16558037345758.jpg“윤완 오빠.”

윤완이 나린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잠시간 머물렀다 멀어진 입술에선 미처 다 놓고 오지 못한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1655803731251.jpg“예쁘다.”

16558037345758.jpg“…….”

쑥스러운지 나린의 몸이 오그라들었다. 윤완은 나린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1655803731251.jpg“나린아.”

16558037345758.jpg“네. 윤완 오빠.”

호칭이 바뀌니 모든 게 새로웠다. 윤완은 마음가짐을 새로 했다. 더 강해져야 한다. 이 앨 지켜줄 수 있도록.

1655803731251.jpg“아프지 마.”

16558037345758.jpg“…….”

1655803731251.jpg“힘들어하지도 말고.”

16558037345758.jpg“…….”

1655803731251.jpg“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어.”

16558037345758.jpg“…….”

1655803731251.jpg“너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거야.”

16558037345758.jpg“…….”

1655803731251.jpg“……알았지?”

내가 꼭 그런 세상을 선물해줄게. ……너에게. 윤완의 음성이 잦아들자 나린의 손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16558037345758.jpg“네, 윤완 오빠.”

말끝마다 꼬박꼬박 새 호칭을 붙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윤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넌 날 웃게 하는구나.

1655803731251.jpg“뭐든 열심히 하는 거 보기 좋네.”

윤완은 더 바짝 다가가 나린을 와락 품에 안았다. 사랑스러움이 가슴을 간질인다.

1655803731251.jpg“자. 너 잘 때까지 이렇게 안아줄게.”

16558037345758.jpg“네, 윤완 오빠…….”

1655803731251.jpg“…….”

16558037345758.jpg“먼저 잠들면 안 돼요, 윤완 오빠.”

1655803731251.jpg“응…….”

윤완의 손이 나린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유리구슬을 두드리듯. 따스한 체온 속에서, 나린은 편안한 얼굴을 하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그렇게 슬픈 사실을 알아 버리고도. 그토록 아픈 과거를 들어 버리고도.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빠. 나와 눈이 꼭 닮았다는 쌍둥이 언니. 그럼에도 나는 너무 행복했어서. 외삼촌네에서도, 할아버지 댁에서도 나 혼자만 너무너무 행복했어서. 그게 참 미안하고 가슴이 아파……. 언니는 행복했을까. 나와 꼭 닮은 그 눈은 늘 웃음을 머금었을까. 아빠랑 엄마는……? 두 분은 행복했나요? 함께하는 동안엔 원 없이 사랑하며 행복했어요? 있잖아요.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짧은 생이었지만 찬란하게 행복했기를. 지금의 나린이만큼이나. 잠들기 직전 나린은 조만간 세훈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만나서 아빠와 언니가 묻힌 곳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해야겠다. 이번에 두 사람을 찾으면 그때엔 아주 아주 해줄 말이 많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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