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 드러난 과거 (2) (63/101)

#63. 드러난 과거 (2)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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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성환을 태운 차는 동쪽으로 내달려 서울을 벗어났다. 성환은 그대로 강원도에 있는 외딴 별장에 갇히게 되었다. 성환이 움쩍달싹 못하는 사이, 승혜가 출산을 했다. 수축억제제 부작용 때문에 투여량을 낮췄는데 반나절을 못 넘겨 진통이 찾아온 것이었다. 첫 아이가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뒤 진통이 멎었다. 주수가 너무 이르기에 의료진은 긴급 봉합수술을 결정했다. 남은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엄마 뱃속에서 자라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너무 이르게 세상 밖으로 나와 버린 아이, 다현은 엄마 품에 안겨보지도 못하고 신생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소식을 들은 성환은 이성을 잃고 별장을 뛰쳐나가려다 경호원에게 붙들렸다. 태용의 비서가 조용히 휴대폰을 내밀고, 성환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폰을 받아들었다.

16558037080906.jpg[성환 씨…….]

승혜였다.

16558037080906.jpg“승혜야. 괜찮아? 도담이는? 우리 도담이는?”

16558037080906.jpg[난 괜찮아요. 도담이는 아직 입원해 있는데 상태를 지켜봐야 한대.]

두 아이에게 태명을 지어줄 때, 승혜는 위에 자리 잡은 나린에게 ‘누리’라는 태명을, 더 아래 자리 잡은 다현에게 ‘도담’이라는 태명을 붙여주었었다.

16558037080906.jpg“근데 도담이가 언닌데, 가나다 순서에 맞추려면 바뀌어야 하는 거 아냐?”

16558037080906.jpg“누리는 앞으로 평생 도담이 동생으로 살 텐데 가나다순이라도 앞에 오면 덜 억울하지 않겠어요?”

  태명 하나로도 마냥 즐겁고 행복해하던 순간이 떠올라서, 성환의 가슴이 미어진다.

16558037080906.jpg“내가 옆에 있어 줘야 하는데, 미안해, 승혜야.”

16558037080906.jpg[말했잖아요. 나는 괜찮아. 누리도 아직 잘 버티고 있대요.]

원망을 퍼부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위로를 하는 승혜의 덤덤함이 성환을 더욱 아프게 했다. 짧은 침묵 후에 승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16558037080906.jpg[성환 씨. 나 부탁이 있어요.]

16558037080906.jpg“응. 말해. 말해, 뭐든지. 여기서 나가는 대로 다 들어줄게.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착하고 가여운 여자. 저를 만나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너무 많이 겪은 사람. 너를 지켜주기 위해 내 전부를 포기했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다니. 결국 또 널 상처 입히고 말다니. 성환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눈을 손바닥으로 꾹 내리눌렀다. 전화 너머의 승혜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16558037080906.jpg[……회장님 말씀에 따라줘요.]

그렇게 모질게 굴었던 아버지인데도 늘 ‘아버님’이라 부르던 승혜가 처음으로 ‘회장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성환의 눈에서 안개가 걷혔다.

16558037080906.jpg“그게 무슨…….”

16558037080906.jpg[민경 씨가 날 찾아 왔었어요.]

16558037080906.jpg“뭐……?”

승혜는 아직 그가 아버지에게 거짓 약속을 한 사실을 모른다. 혹시 민경으로부터 무슨 오해 살 만한 말을 들은 거라면…….

16558037080906.jpg“승혜야, 그건…….”

성환이 재빨리 변명하려 했지만 승혜는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말끝을 가로챘다.

16558037080906.jpg[그 사람, 성환 씨 많이 사랑하는 것 같더라.]

승혜의 말이 화살이 되어 성환의 심장을 뚫고 지나갔다.

16558037080906.jpg“…….”

16558037080906.jpg[우리 아이들 잘 키워준다고 약속했어요.]

승혜가 하려는 다음 말이 짐작이 되어서, 성환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성환은 가슴 깊이 고인 애절함을 끌어모아 승혜에게 애원했다.

16558037080906.jpg“승혜야,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내가 지금 갈게. 어떻게든 너한테…….”

그러나 승혜는 이미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힘겹게 억눌러왔던 인내심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낸 것이었다.

16558037080906.jpg[나, 너무 지쳤어요. 다 그만두고 싶어. 우리 아기들 살리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요.]

성환의 무릎이 꺾이며 그대로 풀썩 바닥에 부닥치고 만다.

16558037080906.jpg“승혜야, 제발…….”

그의 애원은 아무 위력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인신고부터 할 걸 그랬다. 쌍둥이가 태어나면 마지막으로 허락을 구해보자던 승혜의 동화 같은 제의는 무시했어야 했다.

16558037080906.jpg[우리 도담이, 지금 힘겹게 버티고 있대, 성환씨.]

이런 가슴 아픈 얘기를 이토록 감정 없이 할 수가 있을까. 내가 아는 승혜가 이렇게 독한 사람이었나. 전화 상대가 승혜가 맞는지 헷갈렸다.

16558037080906.jpg[앞으로 얼마나 더 병원 신세를 지게 될지 모른대요.]

16558037080906.jpg“…….”

16558037080906.jpg[성환 씨가 가진 힘으로 우리 도담이 지켜줘요. 그게 내 마지막 부탁이야.]

16558037080906.jpg“안 돼. 안 돼, 승혜야.”

성환이 안 된다고 수도 없이 읊조렸지만 승혜의 태도는 확고했다.

16558037080906.jpg[그동안 고마웠어요.]

16558037080906.jpg“제발 그만해.”

그러나 고작 전화로는 단단히 굳어진 승혜의 결심을 뒤바꿀 수 없었다. 성큼 다가온 이별이 그의 목을 조여 왔다.

16558037080906.jpg[성환 씨와 함께했던 시간들, 후회하지 않을게.]

16558037080906.jpg“승혜야, 제발…….”

16558037080906.jpg[우리 아이들, 잘 부탁해요.]

이 통화가 그와 승혜의 마지막이었다. 전화가 끊어지자 비서는 폰을 도로 회수해갔다. 성환은 어떻게든 탈출하려 해보았지만 혼자서 경호원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그는 별장에 갇혀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자와의 이별도, 오매불망 기다려온 아이와의 이별도. 다현의 출생 4주 후, 나린이 태어났다. 나린은 훨씬 상태가 괜찮아서 두 달 후엔 퇴원이 가능했다. 승혜는 나린을 데리고 보육원으로 향했다. 예전에 봉사활동을 다니며 친하게 지냈던 수녀님이 운영하는 보육원이었다. 유일하게 성환이 모르는 그녀만의 장소이기도 했다. 수녀님은 승혜와 나린을 살뜰히 보살펴주었다. 승혜는 그곳에서 나린을 키우며 조용히 살아갈 결심을 했다. 한편, 민경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잠적했다. 약혼이 깨진 후 쭉 두문불출했기에 공식 석상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오랜 기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다현은 그사이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수술도 여러 번 받았고, 퇴원한 후로도 발달을 위한 재활 치료가 수 년간 이어졌다. 태용은 다현을 치료하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다현은 폐가 계속 약하긴 했어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는 호전이 되었다. 담당 의사는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말했다. 다현의 퇴원이 가시화되었을 때, 태용은 다현을 완벽히 제 세계의 아이로 키울 계획을 세웠다. 의료진에게 거액의 돈을 안겨 입막음을 했고 주환과 채 여사에게마저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부모님과 담판을 지은 민경은 거짓 혼전임신과 비밀 출산을 공식화하며 성환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든 걸 잃은 성환은 허수아비처럼 태용과 민경의 뜻에 따랐다. 그렇게 다현과 나린은 서로 다른 가정에서 자라게 되었다. ***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적절한 답을 찾아내는 채 여사지만, 이 얘기만큼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태용은 채 여사가 받았을 충격을 짐작한다는 듯 쓸쓸히 독백을 이어갔다.

16558037174511.png“그 이후 하늘의 장난인지 다현 어미와 성환이 사이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16558037174516.png“…….”

16558037174511.png“다현 어미는 난임 시술을 원치 않았고, 다현이 하나만 친딸 삼아 정성을 다해 키우겠노라 했지.”

채 여사는 그제야 죽은 성환과 민경의 사이가 이해가 갔다. 그들 내외를 볼 때면 늘 민경이 성환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혼전임신으로 결혼한 사이치고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16558037174516.png‘정말 짝사랑이었구나.’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를 받아들이면서까지 결혼을 강행할 정도로.

16558037174516.png“나린이를 데려오지 않은 건 아까 말씀하신 대로 서방님의 반대 때문이었습니까?”

채 여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태용이 고개를 끄덕인다.

16558037174511.png“그래.”

성환은 한순간에 모든 걸 잃은 승혜가 나쁜 마음을 먹게 될까 두려웠다. 승혜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고자 나린은 남겨주자고 한 것이었다.

16558037174516.png“나린이 친모가 죽었을 때, 나린이를 데려오지 않은 건 다현이 때문이었을 테고요.”

16558037174511.png“그랬지. 성환이는 당장이라도 데려오겠다고 했지만 다현 어미가 눈물로 읍소했다.”

16558037174516.png“…….”

16558037174511.png“나린이를 데려오면 다현이의 비밀이 밝혀지게 될 테니까.”

나린이 오갈 곳 없이 버려졌더라면 성환의 선택은 달라졌을 것이다. 외삼촌에게 맡겨져 잘 크고 있다는 걸 확인한 성환은 다현을 생각해 마음을 바꿨다. 모든 의문이 풀리자, 채 여사는 나린이 걱정되었다.

16558037174516.png“아버님,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채 여사의 물음에 태용이 힘없는 손을 까딱거렸다. 괜찮으니 나가보라는 수신호였다. 채 여사는 묵례만 남기고 태용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 방으로 올라온 나린은 이 집에 올 때 들고 왔던 캐리어부터 꺼냈다. 이상하게 버리고 싶지 않더라니, 결국 이렇게 되려고 그랬나 보다.

16558037211992.jpg‘처음부터 그랬지.’

여긴 너무나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았어. 운이 좋아도 너무 좋더라. 운 좋게 하루아침에 재벌가 손녀가 됐더라. 이런 일이 있었던 줄도 모르고······. 후다닥 쫓아 들어온 세훈은 짐을 싸는 나린을 뜯어말렸다.

16558037211996.jpg“나린아.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올 일이 아냐. 할아버지도 무슨 사정이 있었을 수 있잖아.”

16558037211992.jpg“사정이요?”

세훈을 올려다보는 나린의 눈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16558037211992.jpg“무슨 사정이요?”

16558037211996.jpg“······.”

대답할 말이 없는 세훈의 입이 긴 직선을 그렸다. 무슨 사정이 있겠는가. 한 여자의 남편과 딸을 앗아갈 사정. 한 아이로부터 아빠와 언니를 빼앗을 사정. 그런 못된 사정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 세훈은 그간 나린에게만 유독 관대했던 할아버지의 결정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순전히 참회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였던 것이다. 할아버지 때문에 나린의 가족들은 겪지 않아도 될 이별을 겪었다. 한시라도 빨리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벗어나고 싶을 나린의 심경이 깊이 공감됐다. 그럼에도 세훈에게는 단 하나, 고집을 부려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16558037211996.jpg“기다려. 태워다줄게.”

16558037211992.jpg“아뇨. 혼자 갈 수 있어요.”

16558037211996.jpg“기다리라고.”

그답지 않게 윽박지른 세훈이 문을 닫고 나간다. 세훈은 미옥을 불러 나린이 혼자 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아두라고 일렀다. *** 나린은 거실에 붙잡혀 있었다. 미옥이 무슨 보안 조치를 취했는지 안에서도 현관문을 열 수 없었다. 그사이 채 여사가 거실로 나왔다. 채 여사는 소파에 앉으라고 해도 꿋꿋이 서 있는 나린을 걱정과 안쓰러움이 뒤얽힌 얼굴로 바라보았다. 곧 2층에서 세훈이 내려왔다.

16558037211996.jpg“나가자.”

그가 나린의 손에서 캐리어를 빼앗아 든다. 되찾아오고 싶었지만 완력으로 그를 당해낼 수 없는 나린은 빠르게 단념했다. 현관을 나서기 전 채 여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함이 너무 커서 도리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채 여사의 가슴에 싸한 통증이 찾아왔다. 이대로 보내면 영영 이별일 것 같은 예감이 뇌리를 휘감았다.

16558037211996.jpg‘일단은 나린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감정을 좀 추스른 다음에 설득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할아버지께서 사과를 하신다 한들 귀에 들어올 리가 없으니까요.’

  방금 전 세훈이 찾아와 한 말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붙들어 앉혔을지도 모르겠다.

16558037174516.png‘가여운 아이.’

눈물을 흘려본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 채 여사가 축 처진 나린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푹 고개를 내린 나린은 세훈의 발꿈치만 보며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로는 미옥이 우산을 씌워주며 따라붙었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돌계단을 조심조심 밟아 내려온 나린은 대문 앞에서 윤완을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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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도록 거실에 붙들려 있어야만 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세훈은 나린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윤완의 어깨를 강하게 한 번 탁, 두드렸다.

16558037211996.jpg“부탁해.”

1655803722909.jpg“그래.”

윤완이 고개를 끄덕이고. 캐리어가 볼모가 되어 차에 실리는 걸 본 나린은 얌전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실랑이할 기운도 없을뿐더러, 한시 바삐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운전석에 오른 윤완이 챙겨온 무릎 담요를 나린의 몸에 둘러줬다.

1655803722909.jpg“몸은 말리고 나왔어야지, 이게 뭐야.”

16558037211992.jpg“······.”

나린은 입술만 파르르 떨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1655803722909.jpg“괜찮아?”

16558037211992.jpg“······괜찮아요······.”

떨리는 입술을 따라 나린의 음성이 가느다랗게 진동한다.

1655803722909.jpg“거짓말.”

16558037211992.jpg“······.”

1655803722909.jpg“안 괜찮잖아, 너.”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어. 그건 누구라도 안 괜찮은 일이야. 그러니 안 괜찮다고 해도 되는 일이란 말이야. 많이 추운지, 나린이 담요 안에서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그걸 본 윤완은 히터부터 켰다.

1655803722909.jpg“어디로 갈 거야? 외삼촌 댁?”

나린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안 될 말이었다. 엄마에게 일어났던 비극을 이렇게 예고도 없이 알게 할 수는 없었다. 불과 두어 시간 전,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뼈저리게 체험했기에.

1655803722909.jpg“그럼?”

그러고 나니 달리 갈 데가 없어졌다. 나린이 답을 주지 못하자 윤완이 알아서 목적지를 설정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차가운 빗줄기를 가르며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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