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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드러난 과거 (1) (62/101)

#62. 드러난 과거 (1)2021.12.31.

속 시원히, 아주 제대로 분풀이를 했다. 득의양양한 혜원은 테이블 위 너저분하게 흩어진 서류뭉치와 증언이 담긴 녹음기를 갈무리했다. 상대가 받은 충격을 증명하듯 건넸던 서류들은 멀찍이도 날아가 있었다.

16558036858186.jpg“우리, 괜찮을까?”

재오가 걱정을 했다.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일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었다.

1655803685819.png“안 괜찮으면, 뭐? 우린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한 것뿐이잖아?”

웬만해선 저를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혜원은 자신만만했다. 오늘 한 행동으로 문제가 생긴다 해도 딸 바보 신 회장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도윤완 혼자서 신 회장이라는 강철 방패를 뚫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일현 부회장이나 금화연 여사가 혜원을 공격하는 걸 도울 리도 없고. 무엇보다 이 사실을 다 알고도 도윤완이 계속 그 애 편일지가 궁금했다. 그런 복잡한 사연을 가진 아이를 계속 사랑해줄지.

1655803685819.png‘내 예상대로 연나린이 테라 호텔을 떠나준다면 그보다 금상첨화는 없을 텐데.’

윤완이 나린을 선택한 데에 테라 그룹 배경이 크게 일조했다고 믿는 혜원은 원대한 희망을 품었다.

16558036858186.jpg“진짜 괜찮겠지?”

반면 그룹 내 입지가 좁은 재오는 안절부절못해 했다. 혜원을 따라 일을 치긴 했는데, 막상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나린의 얼굴을 보고 나니 주변 사람들이 걱정됐다. 도윤완은 가만히 있을까. ……연세훈은? 연 회장님은? 그에겐 그들 남매를 호시탐탐 노리는 공공연한 적이 있었다.

16558036858186.jpg‘부디 큰아버지 귀에만 안 들어가면 좋겠는데…….’

누나 재희가 윤완에게 당했던 게 불과 두 달 전이었다. 재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 세훈은 나린을 부축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나린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정차하기 무섭게 차 문을 박차고 뛰쳐나간다.

16558036858202.jpg“엇! 오 기사, 차 넣어 놓고 퇴근해요.”

운전기사를 향해 다급히 이른 세훈은 얼른 뒤따라 내렸다. 대문 앞에서 겨우 나린을 붙잡은 그가 다그쳤다.

16558036858202.jpg“대체 왜 그래, 너.”

나린은 응답하지 않았다. 초점을 되찾은 두 눈엔 대상을 알 수 없는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나린을 안 이래 한 번도 본 적 없는 원망과 서러움의 눈빛.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세훈은 꿀꺽 침을 삼켰다. 나린은 바들바들 몸을 떨어댔다. 비를 쫄딱 맞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대문이 열리자, 나린이 또다시 직진을 감행했다. 세훈은 거의 뛰다시피 하는 나린과 속도를 맞추느라 보폭을 키웠다.

16558036858186.jpg“어머. 두 분 왜 이렇게 젖으셨어요? 우산 가지고 나오라고 하시죠. 아유.”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본 미옥이 법석을 떨어대고, 소파에 앉아 있던 채 여사도 기함하며 일어섰다.

16558036858213.png“아니. 오 기사는 대체 뭐하고…….”

집안의 금지옥엽들이 비를 맞고 들어왔으니 눈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16558036858217.jpg“……할아버지는요?”

나린은 나긋하지만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나린의 목소리를 확인한 세훈은 안심을 하면서도 그 내용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16558036858202.jpg‘다짜고짜 할아버지는 왜…….’

16558036858213.png“서재에 계셔. 인사드리기 전에 옷부터 갈아입고…….”

채 여사가 문장을 다 완성하기도 전에 나린이 서재를 향해 진격한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질펀질펀 물이 고였다. 불길한 예감이 퍼뜩 세훈의 머리를 스쳤다.

16558036858202.jpg‘저 눈에 들어찬 원망의 표적이 어쩌면…….’

급하게 말리려 해보았지만 나린은 이미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힌 뒤였다. 채 여사와 세훈도 한 박자 늦게 서재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때,

16558036858217.jpg“할아버지.”

나린이 싸늘한 어조로 태용을 불렀다. 어여쁜 손녀의 음성이 들려오자 태용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16558036883501.png“나린이 왔느냐. 아니, 근데…….”

비에 홀딱 젖은 몰골을 본 그의 눈이 순식간에 부리부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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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036883501.png“대체 어쩌다가……. 얼른 올라가서 옷부터 갈아입어라. 감기 걸릴라.”

다감한 타이름에도 나린의 시선은 금방이라도 태용을 벨 듯 날카롭기만 했다.

16558036858217.jpg“저, 여쭤볼 게 있어요. 할아버지.”

16558036858213.png“얘, 뭐든 몸부터 말리고…….”

채 여사가 한 발짝 다가서는데 나린의 입에서 얼음 창고에 처박혀 있었던 것 같은 서늘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16558036858217.jpg“저랑 다현 언니가 쌍둥이였다는 게 정말이에요?”

16558036903.jpg“…….”

방 안의 모두가 화석이 되었다. 용암에 굳어진 듯. 땅에 파묻힌 듯. 하지만 나린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다시 입을 연 그녀에게선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16558036858217.jpg“저랑 언니가 쌍둥이였는데 언니가 먼저 태어나게 됐고, 할아버지가 저희 치료를 두고 아빠랑 협상을 했다는 게, 다 사실이에요?”

16558036883501.png“…….”

경악스럽다는 표현으로도 채 형용할 수 없는 이야기. 그 와중에도 정신줄을 부여잡은 세훈은 문부터 닫아걸었다. 얘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해야겠단 판단을 한 것이었다. 서재 안의 모두를 졸도시키고도 남을 만한 얘길 던진 나린은 여전히 원망 어린 눈으로 태용을 쏘아보았다. 그러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태연했다. 얼굴을 적시고 있는 건 오로지 빗물이었고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떨구지 않았다. 촉촉한 얼굴과 달리 푸석푸석한 목소리를 한 채, 나린이 추궁을 이어간다.

16558036858217.jpg“할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갈라놓았다는 게…….”

16558036883501.png“…….”

16558036858217.jpg“우리 치료를 돕는 대가로 아빠와 엄마를 헤어지게 했다는 게…….”

16558036883501.png“…….”

16558036858217.jpg“전부, 사실이에요?”

태용은 깊이 침음하며 눈을 감았다.

16558036883501.png“흐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고 했던가. 그렇게 꼭꼭 숨겼건만.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결국 이렇게, 가장 몰랐으면 했던 사람의 귀에……. 체념하고 그간 혼자 떠안고 있던 과거의 진실을 세상에 내어놓기로 한다. 내내 그의 심장을 무겁게 짓누르던. 짓누르다 못해 병들게 했던. 그와 아들 사이를 좀먹게 한 잔인한 과거.

16558036883501.png“……너도 데려오려고 했었다.”

제기된 의혹을 전부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는 태용의 답에 채 여사와 세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16558036883501.png“나는 너희 둘 다 데려오라고 했지만 네 아비가 반대했다.”

16558036858217.jpg“…….”

16558036883501.png“너마저 잃으면 네 어미는 살아갈 희망이 없다고. 그러니 너만큼은 네 어미에게 남겨주자고…….”

16558036858217.jpg“…….”

16558036883501.png“나는 너도 우리 집안에서 키우려고 했었다, 나린아.”

태용의 대답을 들으면서 나린은 이걸 해명이라고 하는 건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린의 몸이 양옆으로 크게 휘청이고. 세훈의 두 눈이 걱정스레 나린을 주시했다. 지금의 나린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금방이라도 어둠에 잠식되어버릴 것 같았다. 허탈한 얼굴이 된 나린이 터덜터덜 발길을 되돌린다.

16558036858202.jpg“나린아, 잠깐만!”

세훈이 황급히 쫓아나간 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은 채 여사가 태용 가까이로 다가섰다.

16558036858213.png“괜찮으세요, 아버님?”

침착하게 시아버지의 상태부터 살피는 모습은 가히 친아들보다 더 총애를 받는 며느리다웠다.

16558036883501.png“난 괜찮으니 나린이한테나 가봐라.”

태용은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답게 겉보기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채 여사가 꿈쩍도 않자, 태용이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16558036883501.png“너한테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하구나.”

16558036858213.png“아닙니다.”

이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자신뿐이라 생각한 채 여사는 태용의 맞은편에 단정히 자리하고 앉았다.

16558036858213.png“아버님.”

16558036883501.png“…….”

채 여사의 부름에 태용이 눈짓으로만 반응한다. 채 여사는 조심스레 다시 입을 뗐다.

16558036858213.png“돌아가신 서방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재차 태용의 눈이 감기고. 오랜 시간 품어 온 후회와 죄책감이 물살처럼 휘몰아치며, 이마 위로 깊은 골짜기를 이루었다. *** 그때의 태용은 아들을 상대로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총명하고 사리판단이 분명해 장남보다 더욱 사랑받던 둘째였다.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서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고작 그런 결혼을 하게 둘 순 없었다. 그러나 아들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여자 하나 때문에 제 손에 쥐어진 모든 영광을 포기하겠노라 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아들은 가출을 단행했다. 태용이 패배감에 몸서리치던 어느 날. 집 나간 성환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납작 엎드린 아들은 다짜고짜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울었다.

16558036858186.jpg“승혜와 뱃속의 아이들이 위험합니다, 아버지.”

16558036883501.png“…….”

16558036858186.jpg“살려주세요. 아버지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제발 살려주세요.”

아들이 만나는 아이가 임신했다는 소식은 이미 비서를 통해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 양수가 새는 증상으로 긴급 입원하게 됐단 소식 또한 점심 즈음 보고받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태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잘못되어 가던 아들의 인생을 바로잡아 줄 마지막 기회였다.

16558036883501.png“도와주면 넌 내게 무엇을 해주겠느냐.”

성환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눈물이 일시에 그쳤다. 손녀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데 이 와중에도 거래를 하려 들다니, 소름이 돋다 못해 온몸의 털이 곧추설 지경이었다.

16558036858186.jpg“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16558036883501.png“집으로 돌아와라.”

16558036858186.jpg“…….”

16558036883501.png“돌아와서 다시 호텔 경영에 참여해. 그게 내 조건이다.”

16558036858186.jpg“…….”

성환은 귀를 의심했다. 아주 잠시, 아버지가 승혜와 아이들도 함께 받아주려는 게 아닐까 하는 희망도 품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이 그 기대를 흔적도 없이 박살내버렸다.

16558036883501.png“아이들은 부족함 없이 크도록 도와주마. 너는 집으로 들어와서 조민경 이사랑 결혼해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성환의 잇새로 실소가 삐져나온다. 그래도 핏줄인데. 당신의 손녀들인데.

16558036858186.jpg“역시 제가 잘못 찾아왔네요.”

한순간에 얼이 빠져버린 성환은 비틀거리며 몸을 돌려세웠다. 태용은 붙잡으려는 시늉조차 없이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태용의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성환의 얼굴은 실성한 사람처럼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 그러나 성환의 고집은 얼마 가지 못했다. 사실을 안 승혜가 태용의 뜻에 따르라고 설득에 나선 것이었다.

16558036858186.jpg“당신이랑 우리 도담이, 누리를 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게 조건이야.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이야?!”

성환이 울분을 토하자, 24시간 수축억제제를 투여하느라 주사바늘이 꽂힌 승혜의 손이 애처롭게 내밀어졌다. 승혜는 가만히 성환의 뺨을 어루만졌다.

16558036858186.jpg“아이들을 지키는 일이에요. 뭐든 해야지. 나, 아무 생각 안 해. 그저 무사히 우리 아기들이 태어날 수만 있으면 돼요.”

16558036858186.jpg“…….”

16558036858186.jpg“부탁이야. 내 생각은 하지 말고 아이들만 생각해줘요.”

승혜의 눈물이 성환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온종일 앉지도, 서지도, 씻지도 못하고 주사를 매단 채 누워 지내면서도, 승혜는 오로지 뱃속의 쌍둥이 생각뿐이었다. 엄마가 무너지면 안 된다며 이를 악물고 울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가 보인 눈물 앞에서 성환은 결국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6558036858186.jpg‘일단은 아버지에 뜻에 따르는 척해서 승혜를 전원시키자.’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모든 게 간단해 보였다. 최고의 의료진, 최첨단 의료기기가 있는 최상의 환경에서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날 때까지만 맞춰주면 된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면 약속을 번복하고 승혜에게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으니 어긴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 따위 가질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성환은 다시 태용을 찾아갔다.

16558036858186.jpg“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승혜가 한국병원 VIP 병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손써주십시오.”

태용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그도 아들을 꺾기 위해 태연한 척했을 뿐 줄곧 초조해했다. 정식으로 인정할 생각은 없는 아이들이었지만, 어찌 됐든 그의 핏줄이고 손녀들이었다.

16558036883501.png“당장 조치하라고 하마. 오늘 안에 최대한 안전하게 이송될 수 있도록 하겠다.”

성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막혀 있던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VIP 병동으로 간다고 해서 승혜의 증상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위기가 닥쳤을 때 상황 대처는 조금이라도 더 나을 것이다. 아이들이 주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다 해도 후속 조치 또한 그 어떤 병원보다 훌륭할 것이었다.

16558036858186.jpg‘죄송합니다, 아버지.’

성환은 거짓말을 하게 된 데에 작은 죄책감을 품었다.

16558036883501.png“차 대기시켜놨으니 타고 집에 가 있어라.”

태용이 성환에게 이르고, 당분간 명령대로 따라야 하는 성환은 순순히 로비로 향했다. 그때의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얼마나 지독하고 철저한 사람인지. 그날 이후 성환은 다시는 승혜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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