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봄비 내리는 날2021.12.28.
‘미워하지 않아.’
‘미워할 수 없어.’
냉장고 문을 열자 냉기와 함께 되살아나는 목소리에 나린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잠결에 얼핏 윤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정말 그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걸까. 부사장님이 그 시간에 우리 집에 있었을 리도 없는데.’
갈증 해소가 시급한 나린은 보리차가 담긴 유리 병부터 찾았다. 병을 꺼내자마자 한 컵 꽉 채워 벌컥벌컥 들이켠다. 수분 충전을 마친 뒤 쌩쌩해진 세포의 힘을 빌려 댕강 잘려나간 기억의 조각을 되찾으려 해보았다.
‘마지막 기억은 다이닝룸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던 장면이었고…….’
그런 뒤 찾아온 뇌의 정전.
‘하. 대학 땐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나이가 들면 주량도 약해지는 모양이다. 앞으로는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미옥 아줌마.”
“네.”
미옥이 빙글, 고개를 돌렸다. 미옥은 막 굴국이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를 식탁 위에 올려두던 참이었다.
“혹시 저 어젯밤에 어떻게 방에 올라갔는지 아세요?”
“어머, 기억이 안 나세요?”
“네.”
“글쎄요. 세훈 부사장님이 데려다주셨을 것 같은데요.”
윤완과 나린의 사이를 잘 모르는 미옥은 두 유력 후보 중 세훈 쪽에 무게를 실어 답하였다.
‘흐어. 망했다.’
한집에 사는 가족이라도 예의를 갖춰야 할 사이인데, 아직은. 미옥이 반찬 그릇들을 정갈히 배치하는 사이 나린은 엽렵하게 수저를 가지러 갔다. 나린의 손이 수저통을 헤집느라 달그락 소리를 내는데,
“어제 도 부사장님도 오셨는데. 두 분이 같이 옮기셨나.”
미옥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아……?
“도윤완 부사장님이요?”
나린은 재차 확인을 했다.
“네.”
이럴 수가.
‘미워하지 않아.’
그럼 역시…….
‘미워할 수 없어.’
꿈이 아니었던 거야……? 식탁으로 되돌아가는 나린의 걸음걸이는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한껏 둥실거렸다. 조금만 멀었더라도 도중에 주저앉아 버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 그럼에도 여전히 윤완로부터 먼저 연락이 오진 않았다. 적절한 멘트를 찾지 못한 나린은 메시지를 보내려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어젯밤에 무거우셨죠? 죄송해요.’
이건 너무 느닷없고.
‘혹시 어제 다녀가셨어요?’
이건 기억을 못 하는 티가 나서 창피하고. 역시 딱딱한 텍스트보다는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전화가 낫겠다. 퇴근 후에 전화를 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본격적인 화해는 뒤로 미루었다. 한창 업무 메일을 작성하던 중에 나린의 폰이 울린다. 액정을 내려다보니 캘린더 앱에서 온 알림이 떠 있었다. - PM 8:30 신혜원 씨 M 호텔 22층 레스토랑.
‘아. 그렇지.’
윤완과 다투는 바람에 깜빡했다. 오늘 혜원과 만나기로 한걸. 그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었다. 고민하다 받았는데 뜬금없게도 혜원이 건 전화였다. 만나자는 말에 거듭 거절의 뜻을 전했지만 혜원이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꼭 할 말이 있어요. 절대 지난번 전시회장 같은 일은 없을 거예요. 정 불안하면 경호원을 데려와도 좋아요.]
나린은 폰을 들고 전화 부스로 갔다. 사무실 한편에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는 작은 부스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세훈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언젠가 윤완에게 말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에게라도 꼭 얘기해달라고 당부했던 게 기억이 난 것이었다.
[어, 나린아. 출근했어? 속은 좀 어때? 머리는 안 아파?]
전화가 연결된 즉시 세훈의 걱정이 우수수 쏟아진다.
“괜찮아요. 어제 기다린다고 해놓고 죄송해요.”
[아냐. 무슨 일이야?]
나린은 세훈에게 혜원과 만나기로 한 일을 전했다. 나린이 혜원을 만나러 간단 얘길 들은 세훈은 우유를 흠뻑 뒤집어쓴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되었다.
[꼭 가야 하는 거야?]
“저도 거절했는데 꼭 와달라고 사정해서요.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거 같았어요.”
‘신혜원이 사정을 하다니. 그게 더 수상한데.’
한참 만에 세훈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데려다줄게.]
“아뇨. 안 그러셔도 돼요. 한 비서님이랑 같이 갈게요. 혹시 몰라서 알리는 것뿐이에요.”
한 비서는 전시회장 일로 채 여사가 나린에게 붙여준 비서였다. 그러나 세훈은 양보가 없었다.
[내가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안심이 될 것 같아. 마침 다른 일정도 없으니까 부담 갖지 마.]
그의 음성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져서 나린도 더는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만날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자 든든함이 갑옷처럼 둘러진 기분이 들었다. 선물처럼, 여동생이라면 끔뻑 죽는 바보 오빠를 얻게 된 것 같았다. *** M 호텔 입구. 세훈의 차가 서서히 정지했다. 경쟁 호텔 부사장이지만 VVIP이기도 한 그의 차량을 알아본 도어맨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비서가 운전을 해주었기에 발렛은 따로 필요 없었다. 도어맨들의 극진한 에스코트를 물리친 세훈은 나린과 단둘이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얘기 끝나면 바로 내려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세훈이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네.”
“30분 지나면 메시지 보내주고. 메시지 없으면 쳐들어갈 거니까.”
“그럴게요.”
나린의 대답에 자그마한 웃음이 섞인다. 일상에서 쉬이 들을 수 없는 쳐들어간다는 표현이 재미있었다. 나린을 올려보낸 세훈은 프런트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나왔다. 소파에 자리를 잡은 뒤 머지않아 개방된 공간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세훈을 알아본 프런트 직원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것도 정중히 거절했다.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으니 눈에 띄는 곳에 있어 주고 싶었다.
[항상 잘해주셔서 고마워요. 이 집에서 세훈 오빠가 제일 좋아요…….]
내가 고작 그런 사탕발림에 홀랑 넘어갈 줄은 몰랐네. 하지만 이 아이의 위대함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감히 이 몸을 이런 데서 삼십 분씩이나 기다리게 만들다니.
‘과연 도윤완이 반할 만한 여자네.’
나린에게 찬사를 보내며 지그시 미소를 지어 본다. 도윤완이 사랑하는 여자. 한때는 태준이가 약혼하기를 원했던 사람. 준우와 그에겐 친동생처럼 소중한 아이. 이토록 특별한 존재는 다현 이후 처음이었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다현을 잃은 후 세훈이 느낀 상실감들도 어느덧 종잇장처럼 엷디엷어져 있었다. 부지불식중 나린이 다현의 빈자리를 꼭꼭 메워 준 것이었다.
‘그렇다고 널 잊은 건 아니니까 너무 서운해하진 말아줄래, 다현아…….’
호선을 이룬 세훈의 입가에 슬픈 그림자가 졌다.
‘너도 나린일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우리보다 네가 그 아일 몇만 배는 더 귀여워했을 텐데……. 과거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래도, 우리가 막내를 조금만 더 일찍 찾았더라면……. 그래서 우리 셋, 조금이라도 함께 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누구보다 마음이 잘 맞는 삼총사였을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버지의 과거 외도 사실에 상처를 받을지라도, 다현은 결코 죄 없는 나린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더 안쓰러워하고 챙겨줬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천사 같고 사리 분별이 명확한 아이였으니까. 준우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예쁘고 맑은 아이였으니까. 감상에 잠긴 얼굴을 무심코 들어 올리니 통유리창 가득 우중충한 물감이 칠해져 있는 게 보였다. 어둑어둑한 풍경에도 습윤한 기운이 확연히 느껴졌다.
‘봄비가 내리려나.’
비 오는 날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세훈은 얼굴을 찡그렸다. 다현의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날 한바탕 비가 퍼부었던 기억이 아픈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래도 잘됐네. 나린이 우산 없었을 텐데.’
이래저래 나린을 태워 오길 잘했다며, 세훈은 제 선택을 뿌듯해했다. *** 얼마 안 가 세훈이 걱정한 대로 비가 쏟아졌다. 일기예보도 놓친 깜짝 장대비 소식이었다. 시원스럽게 내리붓는 빗소리는 도리어 세훈의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로비에 터를 잡고 앉은 지 한참 된 그는 모바일 결재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용을 진득이 읽어 볼 시간이 주어진 만큼 질문의 양도 늘어만 간다. 보완이 필요한 사안들을 골라 기안자와 심사자에게 장문의 메일을 써서 보냈다. 다양한 지시사항들을 폰으로 타이핑하려다 보니 집중력이 꽤나 많이 요구됐다. 그는 잠시 시공간을 잊고 몰두했다. 하지만 이곳에 온 근원적인 목적까지 잊진 않기 위해 나린이 연락을 주기로 한 시각에 맞춰 알람을 설정해 뒀다.
[30분 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삼십 분 전, 나린이 보내온 메시지에 맞춰 다시 삼십 분 후로. 아홉 시 반이 되자, 띠리링 띠리링, 알람이 울린다.
‘또 삼십 분이 지났다고?’
그러나 새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은 없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무슨 일 생긴 건가.’
불안해진 그는 저릿한 두 다리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아무래도 올라가 봐야겠다.’
막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떼는데, 마침 터덜터덜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는 나린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아. 저기 내려왔네. 별일 없었구나.’
세훈은 나린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로비에 죽치고 앉아 있던 보람도 없이 나린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만 있었다. 이제 몇 걸음만 더 떼면 출입문을 벗어나기 직전이다.
“어라.”
세훈은 메일을 작성 중이었단 것도 잊고 열심히 나린을 뒤쫓았다.
“나린아!”
그의 부름에도 멈추지 않는 게 이상했다. 거리상 들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 꼭 들리지 않는 것처럼.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직진, 또 직진. 그러고 보니 나린의 걸음이 평소와 달랐다. 꼭 최면에 걸린 양 어딘가 허영거리고 있었다. 이미 문을 통과한 나린은 서너 발자국만 더 나가면 캐노피마저 벗어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다음 기다리고 있는 건, 이름은 따뜻해 보여도 실상은 시리도록 차가운 봄비.
“연나린!”
세훈의 외침도 소용없이 나린이 빗속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직진 말고 다른 방향은 모른다는 듯. 쏴아아. 쏴아아. 나린을 집어삼킨 빗줄기는 더욱 맹렬해졌다. 이대로 저 앨 놓치면 사달이 날지 모른다. 또다시 소중한 동생을 잃을 순 없다. 그런 경험은 한 번도 너무 많았다. 세훈은 더 생각할 겨를 없이 나린을 따라 빗속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사월인데도. 그러니 완연한 봄인데도 섬유 사이를 뚫고 들어온 차가움은 피부가 아릴 지경이었다.
“나린아…….”
겨우 좇아온 세훈의 손이 나린의 어깨를 붙잡고. 나린의 몸이 반강제로 빙글, 회전했다. 그런 세훈이 맞닥뜨린 건,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 흐리멍덩한 나린의 눈빛을 본 세훈의 심장이 쿵 북소리를 내었다.
“나린아…….”
재차 불러 보았지만 나린은 응답이 없었다. 세훈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무언가 엄청난 얘길 들어 버린 사람처럼. 울고 있는 걸까. 비 때문에 식별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저런 눈으로 울고 있는 것도 이상할 것 같다. 영혼이 사라져 버린 듯한 저런 메마른 눈으로…….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불길한 예감은 세훈의 척추를 건드렸다. 두 발이 굳어버려서 나린을 데리고 빗속을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무슨…… 일이야?”
나린은 계속 말이 없었다. 세훈은 저도 모르게 나린을 꼭 끌어안았다. 애처로운 모습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괜찮을 거야. 내가 해결해 줄게.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줄게. 그러니까 걱정 마…….”
나린을 토닥이면서 혜원을 향해 바드득 이를 간다.
‘신혜원. 무슨 짓을…….’
이 애한테 대체 무슨 짓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참 다행이었다. 나린을 여기 데려온 사람이 그라서. 지금 이 모습을 마주한 사람이 도윤완이 아니라서. 이 눈을 마주한 게 윤완이었더라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으니. 시야에 잡힌 모든 것들이 그의 손에 아작나버렸을지도 모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