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취기를 빌려2021.12.24.
준우가 막 테라 호텔 2501호로 들어선다. 윤완은 준우를 보고도 알은체하지 않았다.
“어제 나린이랑 싸웠나 봐.”
진열장에서 위스키를 고를 때 세훈이 다가와 슬쩍 귀띔을 해주었다. 윤완이 저기압인 이유를 파악한 준우는 들고 온 위스키를 새 잔에 채워 그의 앞에 놔주었다.
“말 못 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나린이가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어.”
“…….”
사람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윤완은 묵언으로 일관했다.
“무슨 소리야?”
이 싸움에 준우가 얽혀 있는 것 같자 궁금해진 태준이 물었다.
“나린이가 이직하려고 준우네 회사 면접을 본 모양인데 윤완이한테 미리 말을 안 했대. 준우는 며칠 전에 알고도 비밀로 해줬고.”
세훈이 태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준우가 윤완을 쳐다보며 자기변호를 시도했지만 윤완의 묵언 수행은 계속되었다. 그 모습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보던 세훈의 얼굴에 개구진 미소가 떠올랐다. 비장의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폰을 꺼내든 세훈은 윤완을 향해 어깃장을 놓았다.
“그래서 진짜 화해 안 할 거야?”
“뭐 하려고?”
태준은 세훈의 행동을 불안하게 주시했다.
“지금부터 다 조용히 해. 나린이한테 스피커폰으로 전화할 거니까.”
“뭐? 야!”
태준이 말릴 새도 없이 통화 버튼이 밀렸다. 세훈은 연결음이 요란하게 울리는 폰을 보란 듯이 테이블 중앙에 위치시켰다. 윤완이 움찔하며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다. 준우가 온 이래 최초로 보인 움직임이었다. 곧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나, 세훈이.”
[안녕하세요.]
“아직도 인사냐. 안 해도 된다니까.”
[죄송해요…….]
“사과할 것까진 없고. 지금 어디야?”
[집이에요…….]
윤완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나린의 말끝이 하염없이 늘어지는 게 심상치 않았다. 그러고 보면 연락을 안 한 지도 어언 24시간 째. 아까 사무실에서 얼굴을 보긴 했지만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두 사람의 직급 차이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메신저라도 할까 하다 만 건 괜한 자존심 때문이다. 그 전엔 자존심이고 뭐고 잘도 내팽개쳐 놓고.
‘무슨 일 있는 건가. 전화라도 해보는 건데.’
기운 없는 나린의 목소리에, 후회가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집에서 뭐 하는데?”
[그냥…… 와인 마시고 있었어요…….]
“너 와인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래서 말인데 올 때 소주 좀 사다 주시면 안 돼요……?]
“소주?”
[네. 안 바쁘시면요……. 와인은 마셔도, 마셔도 안 취하는 거 같아요…….]
저기, 이미 취한 것 같거든. 통화가 이쯤 되니 세훈도 윤완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도윤완이 내가 외간 남자가 아닌 가족이라는 사실을 정상 참작해줄까. 아닌 것 같다. 이마를 뚫고 나갈 것 같은 저 눈썹을 보니 절대 아니었다. 세훈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건 제 선택을 후회했다. 어떻게 잘 구슬려서 윤완이랑 화해시켜 볼까 했는데.
‘역시, 연인 사이에 끼어드는 건 올바른 행동이 아니었어.’
세훈이 후회막심이던 그때,
[근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나린이 물었다.
“아, 그냥……. 너 뭐 하나 하고.”
세훈은 슬슬 진땀이 났다.
[바쁘시면 부탁한 건 잊으셔도 돼요……. 제가 나가서 사와도 되니까.]
“아냐, 아냐. 내가 사 갈게. 그러니까 얌전히 집에 있어. 알았지?”
[……고맙습니다…….]
“금방 갈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
[네…….]
윤완의 눈치는 보였지만 나린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세훈이 따스한 당부를 반복하였다. 연나린, 내가 널 위해 목숨을 건다.
“끊자.”
세훈이 막 종료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데, 또다시 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세훈 오빠…….]
“……어?”
연나린. 이제 제발 끊자. 도윤완 폭발하겠다.
[고마워요…….]
“에이. 갑자기 무슨.”
나린의 말은 감동적인 것이었지만 세훈은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세훈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나린은 폭탄을 얹었다.
[제가 오빠 좋아하는 거 알죠……?]
“…….”
[항상 잘해주셔서 고마워요. 이 집에서 세훈 오빠가 제일 좋아요…….]
안 취했다며! 와인은 마셔도, 마셔도 안 취하니 소주를 마셔야겠다며!
“그, 그래. 금방 들어갈게. 끊는다.”
뚝. 전화를 끊은 세훈은 다급히 윤완을 찾아 손을 내저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명준우, 너도 이런 심경이었구나.
“됐어. 얼른 가 봐. 이 밤에 소주 사러 뛰쳐나갈라.”
윤완이 나직이 일렀다. 세훈은 오로지 나린이 연관돼 있을 때만 드러나는 윤완의 인간적인 면모에 소리 없는 경의를 표했다.
‘싸우고도 걱정되는 건 별수 없나 보지, 너도.’
다른 일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던 세훈이 멈칫 윤완을 내려다봤다.
“너도 갈래?”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제의였지만, 윤완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끌어모아 힘겹게 거절했다.
“아니…….”
“진짜 안 가?”
“…….”
“진짜지?”
“…….”
“셋 센다.”
“…….”
“하나.”
“…….”
“두우울.”
“…….”
“세에엣.”
*** 집안은 온통 고요했다. 어두컴컴한 거실 안엔 간접 조명 서너 개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미옥이 문을 열어주러 나오기에 무리가 없는 양의 빛이었다.
“나린이는요?”
세훈이 묻자 미옥은 하품을 참으며 답했다.
“아까 다이닝룸에 있는 것 같았는데……. 뭐 속상한 일 있는지 와인을 찾더라고요.”
“좀 말리지 그랬어요.”
“말리려고 했는데 괜찮다면서…….”
“어머니는 별말씀 안 하셨고요?”
“먼저 주무셔서 모르세요.”
“네. 수고했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네.”
미옥은 꾸벅 인사를 하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세훈의 등 뒤에서 윤완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괜찮긴 무슨. 지난번 싱가포르 출장 때 그렇게 경고했건만.’
그래도 여긴 집이니 그때처럼 위험에 노출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금방 취한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내려놓은 만큼 알코올의 침투력도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까 2501호에서 세훈의 카운트 다운은 매우 효과가 좋았다. 윤완은 극한에 내몰린 사람처럼 ‘셋’하는 구령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리게 감기 되어 있던 나린의 전화 목소리가 마음을 온통 들쑤셔 놓은 탓이었다. 안 괜찮은 목소리 때문에 그녀의 안위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다만 화해와 허락을 별개의 문제로 구분 지어야겠단 결심을 했다. 널 보러 가지만 그게 곧 이직에 동의해준단 의미는 아냐. 특유의 고집은 강철처럼 꽝꽝 담금질 됐다. 세훈은 곧장 다이닝룸 문을 밀고 들어갔다.
“연나린! 내가 너 때문에 친히 소주를 다 샀…….”
소주병이 담긴 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던 세훈이 입을 멈춘다. 그는 황급히 윤완을 돌아보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윤완은 세훈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쭉 빼서 상황을 확인했다. 바닥난 두 개의 와인병 앞에 나린이 철퍼덕 엎어져 있었다. 새근새근 숨소리에 맞춰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등이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찌릿 감전되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세훈이 곤란해하는데 윤완이 성큼 나린에게로 다가섰다. 윤완은 거침없이, 그리고 사뿐히 그녀를 걷어 안았다. 가지런히 뻗친 윤완의 팔 위에서 나린의 몸이 축 처지며 능선을 그렸다.
“야, 너…….”
싱가포르에서도 있었던 일이라 윤완은 덤덤했지만, 처음이라 당황한 세훈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래도 되는 건가? 가족인 내 앞에서?’
하지만 이게 유일한 해결책이기는 했다. 여기서 재울 수도 없고, 윤완을 제치고 자신이 안아 들고 갈 수도 없으니.
“나린이 방 어디야?”
“아, 따라와.”
세훈은 윤완을 2층으로 안내했다. 윤완보다 대여섯 걸음 빠르게 이동한 그는 냉큼 침대 맡 스탠드를 켰다. 나린이 깨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명을 선정한 것이었다. 따라 들어온 윤완이 침대 옆에 이르자 세훈이 재빨리 이불을 걷었다. 윤완은 그 자리에 살포시 나린을 내려두었다. 세훈이 이불을 덮어주려는데 순식간에 손아귀가 허전해진다. 어느 틈에 이불을 채간 윤완이 나린의 목 끝까지 꼼꼼히 덮어주고 있는 게 보였다. 세훈은 뱁새눈을 떴다.
‘손도 못 대게 하네, 아주.’
따지고 보면 억울했다.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니 엄밀히 말하면 내가 더 가까운데……. 그러나 불평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나린을 바라보는 윤완의 눈빛이 모든 걸 초월하게 만들었다.
‘그래. 가족이 다 무슨 소용이야.’
저 앨 저런 눈으로 보는 사람인데. 마법 같은 눈빛은 심술 맞던 세훈의 마음도 관대하게 만든다.
“좀 더 있다가 가든지. 방에 가 있을 테니 나갈 때 연락해.”
이렇게 이른 세훈은 몇 발짝 못 가서 다시 홱 몸을 돌렸다.
“밤새 있는 건 안 된다. 딱 삼십 분만 줄 거야.”
관대함에 단서를 붙인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세훈이 나가기를 기다린 윤완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스탠드 불을 끌까 하다가, 나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 손을 거두었다.
“흐으음…….”
속이 아픈지 나린이 인상을 쓴다. 괴로워하는 소리가 윤완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마시래.’
얼굴 위를 침범한 머리카락이 금방이라도 입에 들어갈 것 같아 손가락으로 가만히 넘겨주었다.
“미안해. 속상하게 해서.”
윤완의 얼굴이 점차 하강하더니 방금 전 손길이 닿았던 위치에 멈추었다. 머리카락이 얹어져 있던 위치에 그의 입술이 살포시 안착했다.
머리를 정리해 준 목적이 원래는 이게 아니었는데……. 코를 타고 스며드는 짙은 알코올 향마저도 기분이 좋다. 나린의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순간 나린의 두 눈이 희미하게 떠졌다. 막 입술을 떼던 윤완은 못된 짓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을 붉혔다.
“여기가 어디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나린은 다시 눈을 감더니 스스로에게 물었다.
“네 방.”
윤완이 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누르며 나긋이 대답해주었다.
“이상하다……. 분명 다이닝룸에 있었는데.”
취기 때문에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나린은 계속 혼잣말을 했다.
“이상할 것 없어. 내가 데려왔어.”
“부사장님……?”
“그래, 나야.”
“근데 우리 싸웠는데…….”
아직 정신이 또렷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린의 몽롱한 눈빛과 어눌한 말투가 그걸 알려 주었다.
“아, 꿈인가 보다…….”
“…….”
멋대로 꿈이라고 단정 짓는 나린을 보자 윤완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꿈인 건지, 주정인 건지. 이마에서 손을 떼고 스르르 팔을 내린 나린은 살포시 미소를 띠었다.
“있죠, 아까 혼자 술 마시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요…….”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윤완의 상체가 나린에게로 수그러졌다. 어디, 꿈에선 무슨 말을 하는지 두고 볼까.
“제가 이직하면 좋은 점도 있어요…….”
“…….”
“그럼 이제 부사장님이라고 안 불러도 돼요…….”
“…….”
“어때요……? 좋죠……?”
“…….”
“정 싫으면 안 옮길게요…….”
“…….”
“잘못했어요…….”
“…….”
“그러니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윤완의 손이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손도, 움켜쥐어진 심장도 모두 저릿저릿했다. 꿈이라며. 꿈인 줄 알고도 이렇게 유혹하나? 단단히 담금질 해두었던 고집은 어느새 흐물흐물 녹아내린 뒤였다. 나린이 어떤 회사를 다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싶었다. 한강이 연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는, 되도 않는 소릴 했다던 전 남자친구 회사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 싶은 심정이었다.
“알았어.”
“…….”
“알았으니까, 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
네가 원하는데.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미워하지 않아.”
허리를 낮춘 윤완이 다정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미워할 수 없어.”
대답이 없는 걸로 보아 나린은 재차 깊은 잠에 빠져든 듯했다. 윤완은 애가 탔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연인을 앞에 두고도 마음껏 안아줄 수 없다는 게 심장을 타들어 가게 했다. 여기가 그녀의 집이 아니었더라면. 세훈의 감시가 없었더라면. 아니, 오히려 그런 제약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들끓는 본능을. 달아나 버리려는 이성을. 곧 세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30분 지났다. 얼른 나와라.]
나린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서너 배는 더 빠르게 흐른다. 일 분 일 초가 아쉬운 윤완에게 허락된 삼십 분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