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뾰족한 말끝은 엉뚱하게2021.12.21.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준우가 멈추어 선다. 반가운 얼굴을 보고 손을 흔들려던 그는 이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열렸던 자동문이 스르르 닫혔다. 준우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인 지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재빨리 몸을 숨겼다. 반가워야 할 사람을 본 건 맞는데 타이밍과 장소가 너무 생뚱맞았다.
‘영업도 아니면서, 나린이가 우리 회사엔 웬일이지?’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퇴근길 차 안에서 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대에 그 층에서 있었던 회의들을 확인해보면 방문 목적을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딜 가나 임직원들의 주목을 받다 보니 몸가짐, 마음가짐을 삼가는 게 몸에 배어 있는 탓이었다. 준우의 전화를 받은 나린은 좀 놀란 듯했으나 곧 담담한 어조로 답을 해주었다.
[실은 면접 때문에 갔어요. 이직 준비를 하고 있거든요.]
헤드헌터 중한으로부터 받은 TO가 딱 두 개였는데, 그중 하나가 매우 곤란하게도 준우의 회사였다. 그렇지만 고작 두 자리밖에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기가 아까웠다. 고민을 거듭하던 나린은 너무 소심해지지 않기로 했다. 마케팅팀장이 재무팀 인력 충원까지 보고받지는 않겠지. 그러나 우연의 장난처럼 같은 시간, 같은 층에서 준우가 참석하는 회의가 있었던 것이다.
“이직?!”
준우가 화들짝 놀라자 운전석에 있던 기사가 힐끗 돌아보았다. 준우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질문을 이었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그럼 부정이니까요.]
다시 적막이 흐르고,
[저기, 준우 오빠.]
한층 느릿해진 속도로 그의 이름이 불렸다.
“응.”
달라진 분위기에 긴장하며 준우가 답을 해 준다.
[혹시 오늘 저 본 거 부사장님한테 말했어요?]
“윤완이? 아니.”
준우는 이 물음이 의미하는 바를 곧장 알아챘다.
“설마 윤완이는 모르는 거야?”
[네.]
모른 체할걸. 괜히 전화했구나. 준우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까딱하다간 연인 사이에 끼여 난처한 입장이 될지도 몰랐다.
“나중에 알면 화낼 텐데.”
준우는 강한 염려를 담아 말했다.
[알고 있어요. 조만간 말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비밀로 해달라는 거지?”
[네. 그래 주실 수 있으세요?]
이 부탁은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타인의 입을 통해 이직 얘기를 전달받았을 때 윤완이 보일 반응은 오래 그를 알아 온 준우조차 짐작 불가였다. 나린을 만난 뒤로 완전 딴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알았어. 근데 너무 오래는 못 기다려줘.”
준우는 하루빨리 윤완에게 알리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나까지 혼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헤드레스트로 고개를 젖힌 준우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 두 번의 면접은 빠르게 결론이 났고 나린은 합격과 불합격 통보를 한꺼번에 받았다. 합격한 회사는 공교롭게도 케이콤 통신이었다. 이제는 정말 최후의 관문만이 남은 상황. 이걸 어떻게 얘기하나. CFO실을 쳐다보는 나린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거렸다.
“후우.”
옆자리에 민하가 있다는 것도 잊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웬 한숨? 무슨 고민 있어?”
“아, 과장님. 아뇨.”
“…….”
“네.”
마음을 고쳐 잡은 나린은 대답도 고쳤다. 팀에서 가장 먼저 이직 사실을 알려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민하일 것이었다.
“커피 한잔하러 가자.”
눈치 빠른 민하는 그 길로 나린을 데리고 나왔다. 두 사람은 회사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길 건너 카페까지 털레털레 걸어갔다.
“대체 뭔데 그래?”
커피를 받아서 자리에 앉기 무섭게 민하가 다그쳤다.
“아직은 비밀인데요.”
“응.”
“저, 퇴사하려고요.”
“뭐?!”
민하가 크게 동요하면서 손에 쥔 컵 안에 파도가 친다. 컵을 이탈한 커피가 민하의 손등을 흠뻑 적셨다. 냅킨을 가져온 나린은 급한 대로 한 뭉텅이 민하의 손에 쥐여주고, 남은 한 뭉텅이로는 열심히 테이블에 생긴 웅덩이를 지웠다.
“진짜야? 아니, 왜? 잘 다니고 있었는데 왜? 무슨 일로?”
민하는 손을 닦는 둥 마는 둥하고 질문 공세를 퍼부어댔다. 결국엔 ‘왜?’로 귀결되는 하나의 물음이긴 했지만.
“어른들께서 그만두라고 하셔?”
나린이 테이블을 수습하느라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민하가 멋대로 추측을 한다. 이것도 맞긴 하지만…….
“그런 건 아니고요. 이직을 하게 됐어요.”
“이직?!”
“네. 케이콤 통신으로요.”
민하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도 부사장님 때문이야?”
“네……?”
제 발 저린 나린은 은연중에 어깨를 들썩였다.
‘뭐지. 벌써 무슨 소문이라도 난 건가.’
땀으로 손이 미끌거렸다.
“아니, 지난번 회식 때 부사장님이랑 사적으로 아는 사이인 거 알려져서, 불편해서 그런 거 아닌가 하고.”
다행이다. 아직 사귀는 사이인 걸 들키지는 않았구나.
“그런 것도 없잖아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후일 기사를 접하게 될 민하가 또 커피를 쏟는 일이 없도록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지금은 짐작조차 못 하겠지만, 나중에 기사를 보게 되면 이 발언을 기억하고 이직 결정을 지지해줄 게 분명했다.
“아무튼 잘 된 거지? 나만 서운해하면 되는 거고.”
그래도 민하는 금세 나린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저도 서운해요.”
“됐어. 남몰래 갈 회사까지 다 결정해 놓고 무슨. 인수인계나 잘하고 가. 받을 애가 있나 모르겠다만.”
“팀장님께 보고 드리는 즉시 인수인계 파일 만들게요.”
“뭘 또 파일까지. 역시 성실하다, 나린 씨는.”
그래서 내가 참 예뻐했다는 걸 알려나. 정을 주었던 몇 안 되는 회사 동료인 나린을, 민하가 시원섭섭하단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인생 선배로서 따뜻하고 냉철한 조언을 건넸다.
“나린 씨, 나 재무팀에 처음 왔을 때 엄청 힘들었던 거 알아?”
“왜요?”
“해외 영업밖에 해본 게 없는데 업무가 너무 다른 거지. 뭘 하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누구한테 문의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
“같은 회사 내 다른 부서로 이동한 것도 그랬는데 회사를 옮기는 건 어떻겠어.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가야 해.”
“그럴게요.”
“그래. 나린 씨는 겉보기엔 여려 보여도 속은 단단한 사람이니까 많이 걱정 안 해. 이직해서도 계속 연락하고.”
“그럼요.”
그렇게 민하와 얼마간 수다를 떤 후 사무실로 돌아온 나린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숙제를 맞닥뜨렸다. 고개를 들 때마다 CFO실이 시야에 걸렸고, CFO실이 시야에 걸릴 때마다 그 방의 주인이 마음에 걸렸다. 윤완도 민하처럼 금방 이해하고 받아들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잘 알았다. 분명한 건 정식으로 퇴직 신청을 하기 전에 반드시 알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입을 통해, 그것도 보고라는 형태로 들었을 때 그가 느낄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나린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메신저를 보냈다.
[오늘 같이 퇴근할 수 있어요? 좀 늦어도 돼요. 기다릴게요.]
[안 늦을 거야. 일곱 시쯤 가자.]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평소와 같은 다정한 답을 보내주었다. ***
“저, 퇴사하고 이직해요. 벌써 합격 통보도 받았고, 다음 주에 연봉 계약서 사인하러 갈 거예요.”
두 눈을 내리깐 채 연습해 온 대사를 속사포처럼 줄줄 읊었을 때,
“뭐?”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리란 것도 알았고, 입술이 삐뚜름해질 거라는 것도 알았고, 미간에 주름이 질 거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게 예상한 대로였지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반응을 예측한들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해결책이 나오는 건 아니었으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얼굴만큼이나 일그러진 목소리는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나린 앞에서는 잃어버린 지 오래인 까칠함이 그의 어조를 지배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예요.”
나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고, 나름의 상황 분석에 돌입한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단서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윤완이 질문을 던진다.
“누가 괴롭혀?”
“아니요.”
“일이 많아서 버겁나?”
“아니요.”
“그럼?”
계속 모르쇠를 놓을 순 없었다. 뭐라도 답을 주긴 해야겠는데……. 믿든 안 믿든.
“그냥, 이직하려면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아서요. 연봉도 제법 올려서 가고요.”
“어딜 가든 여기보다 성과급을 더 주진 않을 거 아냐. 총소득은 줄어들 텐데.”
“…….”
본질을 꿰뚫는 사람 앞에선 역시나 무용지물이었지만.
“어디로 가는데?”
드디어 마지막 질문에 답할 차례가 된 나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케이콤 통신 경영지원실이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느라 윤완의 사고가 일시정지했다.
“하.”
기가 차다는 듯 그가 강하게 헛숨을 내뿜었다.
“준우도 알아?”
“…….”
나린이 답을 못하자 윤완의 표정이 굳었다. 나린은 준우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서둘러 변명을 했다.
“준우 오빠는 우연히 안 거예요. 면접이 있던 날 회사에서 봤대요. 비밀로 한 것도 제가 부탁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화내지 마세요. 준우 오빤 아무 잘못 없어요.”
“연나린.”
“……네.”
두 사람이 내는 음계가 저음 경쟁이라도 하듯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이유가 뭐야.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
“나랑 같은 회사, 같은 부서인 게 걸린다고 어른들께서 지적하셨나?”
무서운 통찰력. 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든 안 하든 그는 제 추리의 결과만을 맹신할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니 뭐라 반박한들 맥을 못 출 게 뻔했고. 긴 한숨과 함께 윤완의 등이 운전석 등받이를 내리눌렀다. 회사 문제를 압박할 어른들이라면 나린의 큰어머니, 아니면 자신의 어머니일 것이다. 둘 중에선 후자일 가능성이 좀 더 높았다. 그렇더라도, 왜 하필 나린이일까. 그런 얘긴 나한테 했어도 되잖아. 같은 회사, 한 부서는 모양새가 안 좋은 듯하니 대책을 강구해 봐라. 그렇게 일렀으면 얼마든지 방법을 찾잖아, 내가.
“이직 취소해. 그런 이유면.”
윤완이 단호히 일렀다. 나린의 눈꼬리가 바닥을 향해 휘어진다.
“어떻게 그래요. 이미 합격했는데.”
“…….”
“그리고 어른들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나중에 우리 사이가 알려졌을 때 같은 회사면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나올 거예요.”
윤완은 나린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넘어 용납하기 어려웠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네 힘으로, 네 노력의 결과로 들어온 회사라고. 온전한 네 것이라고.”
“…….”
“근데 고작 어른들 몇 마디에 포기하는 게 말이 돼?”
이직하게 된 배경을 다 알고도 윤완은 매정히 내쏘았다.
“꼭 어른들이 강요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그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
회사의 미래를 짊어질 윤완이 도일 전자를 떠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떠나는 사람은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의 냉정함이 나린의 가슴을 아프게 짓누른다. 작게 심호흡을 한 나린은 마음을 다잡고 재차 설득에 나섰다.
“사내 커플들은 공개되고 나면 한쪽이 부서를 옮기잖아요. 그거랑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줄 수 없을까요?”
“…….”
“부사장님이랑 전 일반적인 커플도 아니고. 같은 회사에 계속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윤완의 화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멋대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법이 어딨어.”
이 지적만큼은 나린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그와 의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그가 어머니와 싸우게 될까 봐. 그의 반대로 이직하지 못하게 될까 봐. 그러나 이 모두가 변명일 뿐이었다. 나린은 푹 고개를 숙였다.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해요. 그렇지만 큰엄마랑 빠른 시일 내 옮기겠다고 약속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윤완은 원인 모를 짜증을 느꼈다. 나린을 회사에서 몰아낸 어른들에게 화가 난 건지, 이렇게 될 때까지 감감 모르고 나린 혼자 고군분투하게 한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뾰족한 말끝은 엉뚱하게 나린을 향했다.
“채 이사님하고 한 약속만 중요하고 난 안중에도 없었던 거지.”
윤완의 고개가 차갑게 돌아간다. 날카롭게 벼린 윤완의 언어에 나린의 양쪽 입 끝이 무너질 듯 씰룩거렸다. 나린의 표정을 본 윤완은 아차 싶었으나 온 힘을 다해 모르는 척했다.
“먼저 들어갈게요. 조심히 가세요.”
윤완의 얼굴에서 싸늘한 기색이 사라질 기미가 없자, 나린은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더 같이 있다가는 아픈 말만 잔뜩 듣게 될 것 같았으니까. 가슴에 이는 싸한 통증을 참으며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 몇 초간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뜸을 들여 보았으나 윤완은 끝내 와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