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어디든 같이2021.12.17.
퇴근 시간. 도로로 쏟아져 나온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유리창 너머 줄지어 선 행렬이 장난감처럼 민하의 시선을 앗아간다.
‘나도 빨리 퇴근하고 싶은데.’
초조하게 고개를 돌린 민하는 보고서를 읽고 있는 젊은 CFO의 안색을 살폈다. 저 그린 듯한 눈썹 사이에 실금이라도 가는 날엔 그대로 야근 확정이었다.
“별첨에 있는 표, 상세 데이터 좀 볼 수 있습니까?”
보고서에서 눈을 뗀 윤완이 재무팀장을 보며 물었다. 재무팀장은 당연하다는 듯 민하를 쳐다봤다.
‘하여튼 한 번도 먼저 나서서 커버해주는 법이 없지. 제가 뭘 기대하겠어요, 팀장님께.’
속으로 툴툴대며 민하가 입을 열었다.
“그게……. 연나린 대리가 작업해서 연 대리한테 있습니다. 나가서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민하의 입에서 나린의 이름이 발음되었을 때, 무채색이던 윤완의 얼굴에 반짝 빛이 돌았다. 잘못 본 게 아닐까, 민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고를 받을 때에 윤완은 뱀파이어의 환생, 그 자체였다. 뒷덜미를 꽉 물고, 보고 내용의 허점만 쏙쏙 뽑아내는 잔인함은 뱀파이어를 능가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색이 칠해질 리 없는데.
“이 보고서 연 대리가 썼나요?”
뭔가 마음에 안 드는구나. 야근 확정이구나. 민하는 윤완이 CFO에게 올릴 중요한 보고서를 대리한테 맡겼다고 지적하는 거라고 오해했다.
“초안은 연 대리가 작업했지만, 제가 검토하고 확정했습니다.”
절망감을 감추며 답변을 해주었다. 초안이 훌륭해서 별로 손댈 것도 없었으나 나린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제 책임이라는 걸 열심히 강조했다. 그런데 윤완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알겠습니다. 백데이터는 내일까지 보내주고, 보고서는 이대로 상신하세요. 수고했습니다.”
또다. 또다시 그의 얼굴에 색채가 감돌았다. 심지어 보고도 순조롭게 마무리된 것 같았다.
‘나린 씨 사촌 오빠랑 절친이라더니, 그래서 그런 건가.’
그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보고가 잘 끝났고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리를 정리하던 민하가 순간 멈칫했다. 한방에 통과된 보고서라면 그 공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사장님.”
CFO실로 연결되는 문을 막 밀어 연 윤완이 돌아보았다.
“네.”
공손한 미소를 지어 보인 민하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사실 이 보고서, 연나린 대리가 다 한 겁니다. 제가 피드백 할 게 별로 없었거든요.”
“…….”
“그러니 수고했다는 말은 나린 대리한테 전달하겠습니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나린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윤완의 얼굴에 색이 입혀지는 게 틀림없었다.
“…….”
고개를 까딱하는 걸로 답을 대신한 윤완이 CFO실로 사라진다.
‘부사장님께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 있음 나린 씨한테 부탁해야겠네. 지인 찬스 만세.’
회의실을 나서며 민하는 쾌재를 불렀다. *** 퇴근길. 운전석에 앉은 윤완이 손수 차를 몰아 한 블록 건너 백화점에 이른다. 이곳 주차장은 도일 전자 임직원들의 눈을 피해 나린과 접선하기에 딱 맞춤한 장소였다. 주차장과 연결된 백화점 입구에서 어김없이 나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필리핀 시설투자 네가 검토했다며.”
나린이 조수석에 오른 걸 확인한 뒤, 윤완이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네.”
민하가 봐주긴 했지만 몇몇 자잘한 표현 외엔 지적을 받거나 수정한 게 없었다.
‘오늘 가결산 결과 보고드릴 때 슬쩍 껴서 보고한다고 했는데, 잘 안 됐나.’
“왜요? 수정할 게 많아요?”
제가 쓴 보고서 탓에 고생했을지 모를 민하를 염려하면서 나린이 물었다.
“아니. 그대로 상신하라고 했어.”
“그럼 통과된 거예요?”
“응.”
나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 됐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이틀 연속 야근했거든요.”
그제, 어제 저녁 먹자는 말에 계속해서 튕기던 게 이 보고서 때문이었나 보다. 윤완은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거면 저녁 먹으면서 구두보고로도 충분했잖아.
“말하지 그랬어.”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교과서 같은 아이. 나중에 우리 아이가 딱 널 닮았으면 좋겠네. 윤완의 생각이 속도를 높여 저만치 앞서나간다.
“보고서 훌륭하던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백데이터가 궁금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보고서 한 줄 한 줄, 얼마나 많은 시뮬레이션이 진행되었을지 잘 들여다보였으니까. 뿌듯해진 나린이 턱을 치켜들었다.
“역시, 공부는 끝이 없단 말이 맞나 봐요. 경영 수업이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단지 함박웃음을 터뜨린 것뿐인데 윤완에게는 안아달라는 신호처럼 여겨졌다. 당장이라도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멈추고 싶어졌다.
“수업 받는 건 안 힘들고?”
“재밌어요.”
“그래, 열심히 해. 우리 회사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지.”
윤완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굽이쳐나간다. 깎아놓은 듯한 옆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린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제 곧 같은 회사에서 일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요.’
차마 할 수 없는 말. 알리긴 알려야 하는데. 왜 이직하려 하느냐는 질문에 대처할 적절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금화연 여사와 전쟁을 치르면 치렀지, 절대 이직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우리 사이가 기사로 났을 때를 대비해서요. 이것도 안 되고. 연봉 인상과 창창한 커리어를 위해서요. 이건 믿어줄 리가 없고.
“왜 이렇게 조용해? 피곤해?”
“아, 아뇨.”
좀 더 진전이 생기면 그때 말할까. 이직할 회사가 정해지면 거기에 맞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지이이이잉. 나린이 막 골치 아픈 생각을 털어내는데 폰이 울렸다. 액정 위에 이직을 도와주고 있는 헤드헌터 중한의 이름이 떠 있었다.
‘으아, 어떡해. 지금 받으면 통화소리가 다 들릴 텐데.’
나린은 폰 옆에 돌출되어 있는 버튼을 꾹 눌렀다. 진동소리가 바로 잦아든다.
“왜 안 받아?”
“안 받아도 되는 전화예요.”
‘제발 부사장님이 더 캐묻지 않게 해주세요.’
기도가 통했는지 곤란한 질문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윤완이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나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했다. 디저트 접시까지 싹 비운 나린은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을 둘러보았다.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윤완이기에 약속을 잡았다 하면 어디든 이렇게 통째로 점유되고는 했다. 데이트란 모름지기, 덜 까다로운 사람이 더 까다로운 사람에게 맞춰주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나린은 이따금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그리웠다.
“반지는 잘 가지고 있는 거지?”
출입문으로 향하는 길에 윤완이 물었다.
“그럼요.”
해사한 미소가 사랑스러워서 윤완이 나린의 손을 살포시 쥐었다. 나린도 그의 손을 꼭 맞잡아주었다.
“손잡는 거 좋아요?”
장난기가 인 나린이 그를 올려다보며 생글거렸다.
“너랑 잡는 게 좋은 거야.”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윤완이 대답한다.
“그럼 이렇게 하고 좀 걸을래요?”
윤완과 이어진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면서 나린이 제안했다.
“네가 원하면.”
두 사람은 레스토랑 직원에게 주차시간 연장을 부탁한 뒤 거리로 나섰다. 선선한 봄밤. 서로의 손에서 전달되는 온기가 이보다 더 적당할 수 없는 날씨였다.
“사실은.”
번화한 거리를 벗어나 한적한 공원으로 접어들 무렵 윤완의 음성이 나지막이 울렸다. 비밀 얘기를 속삭이기 전 어린아이처럼 눈빛엔 진지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누구랑 이렇게 나란히 걷는 게 익숙한 편은 아니야.”
그래서 아주 오래도록, 너와 함께 걸었던 싱가포르의 밤을 잊을 수가 없었어. 그날의 열기, 습도. 송골송골 땀이 맺히던 감촉까지 전부.
“왜요? 늘 차로 다녀서 그런가.”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들을 떠올리며 나린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렇더라. 재벌가 자제들은 꼬맹이부터 기사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다니더라.
“그런 것도 있고.”
“…….”
“손잡고 걸어줄 사람이 없었던 것도 있고.”
윤완이 어렸을 때 일현과 화연은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게 바빴다. 조부모님의 호출에 본가에서 살다시피 할 때가 많았고 그룹의 차기 후계자로서 공식 행사에도 꼬박꼬박 얼굴을 비춰야 했다. 윤완을 양육하는 건 전문가들에게 맡겨졌다. 겉으로는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성장 환경 속에서 어린 윤완은 늘 부모님의 부재를 감내해야 했다. 나린이 걸음을 멈추자 윤완이 걱정스레 돌아본다.
“다리 아파?”
고개를 가로저은 나린은 아직 자유롭게 남아 있는 윤완의 다른 쪽 손을 마저 잡았다. 두 손을 꽉 맞잡은 채로 그를 향해 힘차게 웃어준다.
“앞으로는 자주 손잡고 걸어요. 어디든 같이 걸어줄게요.”
해줄 수 있는 위로가 단지 이것뿐. 볼을 붉힌 윤완이 깍지 낀 손을 빼내어 나린의 어깨를 감쌌다. 이어서 뜬금없는 질문이 내던져졌다.
“데이트 많이 해봤어?”
“네?”
앞뒤 연결이 되지 않는 물음에 나린의 동공이 자그맣게 떨렸다. 태준과 잠깐 같은 테이블에 앉은 걸로도, 세훈과 준우만 ‘오빠’라 부르는 걸로도 질투하던 모습이 떠올랐으니까. 이젠 과거마저 캐물으시려는 건가요.
“아니요?”
질투의 화신을 경계하느라 나린의 말끝이 힘껏 들어올려졌다. 윤완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
“다음번엔 네 방식으로 데이트하고 싶어서.”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면서. 웃는 얼굴이 이렇게나 예쁜 사람이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만 하고 살아왔을까. 윤완을 마주보던 나린이 몸을 틀어 그의 옆구리에 꼭 몸을 붙였다. 누군가에게 손을 잡고 같이 걸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게 행복하다. 누군가의 웃음이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뭉클했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무리하는 거 아냐.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뭐든.”
“알겠어요.”
“…….”
“그냥,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나린의 따스한 목소리가 윤완의 청신경을 타고 흐르자 윤완의 왼쪽 가슴이 저릿하게 마비되었다. 연애가 이렇게 좋은 거였나. 이 앨 만나기 전까진 실체가 없는 감정 따위, 성과가 없는 노력 따위 내 알 바 아니었는데. 아무도 가르쳐준 적 없었으니까. 공원을 한 바퀴 돈 두 사람은 레스토랑 주차장으로 되돌아왔다. 발렛 직원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윤완이 나린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뗐다.
“어어? 밖에서 무슨 짓이에요?”
기습에 당한 나린이 이마를 문지르며 윤완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아무도 안 보잖아.”
안아주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아까 손을 잡았을 때부터 얼마나 힘들게 참았는데.
“그래도 밖에서는 안 돼요.”
맞춰주는 것 같다가도 안 되는 일에 있어선 단호한 나린이었다.
“그럼 안에서는 된다는 거지?”
윤완이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잡았다.
“아, 그런 게 아니라…….”
“얼른 가자.”
발렛 직원이 차를 대기 무섭게 윤완이 나린을 조수석으로 이끌었다.
“어차피 저는 저희 집으로, 부사장님은 부사장님 집으로 갈 거잖아요.”
여유를 부리는 나린을 보며 윤완이 더욱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안 보내줄 건데.”
“또 어디 예약해뒀어요?”
“가보면 알아.”
윤완의 차는 회사 근처 높이 솟은 빌딩 지하주차장에 멈춰 섰다. 그의 펜트하우스가 있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방향이 똑같아서 회사로 가나 어리둥절했던 나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출퇴근할 때마다 저런 호화로운 아파트엔 누가 사나 했는데…….’
이런 사람이 사는 성이었구나. 건물은 주차장에서부터 보안이 매우 철저했다. 로비에도 시큐리티 데스크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꼭대기 층에 이른 윤완이 지문을 밀착해 도어락 잠금을 해제했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나린을 끌어안으며 키스를 퍼붓는다. 떨어져 내리는 입술이 마치 유성우 같았다. 이마, 뺨, 입술, 목, 어깨. 어디로 착지할지 모르는 예측 불가한 충돌에 나린의 정신이 아득히 달아났다. 침실까지 이끌려온 나린이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지고. 조금 거리를 벌려 마주한 눈동자는 어스름 속에서도 선연히 빛났다. 흐트러진 눈빛이, 불규칙한 숨소리가 윤완의 심장을 난타했다.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윤완의 손이 나린의 볼을 쓸어내린다. 네 손에 반지를 끼워줬던 네 생일 이후로, 나는 매일 꿈을 꿔. 눈을 뜨면 옆에 네가 곤히 잠들어 있는 아침. 잠들기 전 네게 입 맞춰줄 수 있는 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유가 오직 너인 삶. 어떻게 너를 만났을까. 어떻게 네가 나에게 왔을까.
“예쁘다.”
이성을 거치지 않은 진심이 숨소리조차 조용조용하던 적막을 한순간에 깨뜨렸다. 나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걸 본 윤완은 다시 고개를 내려 깊이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