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대답은 일 년 뒤에2021.12.14.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연 대리님 생일 축하합니다.”
‘연 대리님’ 부분에 이르러서는 호칭이 뒤죽박죽되어 정체불명의 소리가 됐지만, 어쨌든 팀원들은 정성을 다해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린은 후후 입김을 불어 초를 껐다. 회사에서 개인사로 이목을 끄는 건 달갑지 않기에, 공개적으로 축하를 받게 된 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윤완은 사회생활을 모른다.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사회생활을 아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했다. 회식이 끝나고 모두가 저마다의 귀가 수단을 찾아 떠난 뒤 나린이 가장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터덜터덜 택시 승강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전화가 울린다.
[어디야?]
아까 재무팀장의 배웅을 받고 가장 먼저 떠난 윤완이었다.
“택시 타러 가고 있어요.”
[회사 앞 횡단 보도에서 기다려. 데리러 갈 테니까.]
“누가 봐요. 위험해요.”
[그럼?]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이 문장 앞에서 입술이 멈췄다. 그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다짐한 게 방금 전이었는데. 깨달음과 함께 반항도 그친다.
“위치 캡쳐해서 보낼게요.”
나린은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장소를 골라 지도 사진을 전송했다. 바쁘게 걸어 지정한 장소에 도착하자 윤완의 차도 딱 맞게 등장했다. 나린을 태운 차는 낯선 방향으로 달렸다.
“어디 가는 거예요?”
“Y 호텔.”
“집이 아니라요?”
“자정 지날 때까지 같이 있어. 채 이사님께는 내가 말씀드렸어.”
큰엄마의 동의가 있었다니. 이로써 거절할 핑계는 사전에 차단된 셈이었다. 열두 시 지날 때까지. 다시 말하면, 생일이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생일을 챙겨주려나 보다. 그에게도 이런 낭만적인 면이 있었나, 새삼스럽게 생각되었다. 실용성 없는 기념일 따위 허깨비 취급할 줄로만 알았는데. 15분 거리에 있는 Y 호텔에 도착해서 그가 뜻밖에 체크인을 했다. 라운지에 가려나 했던 나린은 허둥대는 손길로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룸으로 가는 거예요?”
“응.”
“……왜요?”
별 뜻 없이 묻고 제풀에 당황을 했다. 답을 하기에도 이상하고 안 하자니 또 음흉스러운 질문. 그러나 이어지는 답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씻고 싶어. 한시라도 빨리.”
그럴 만도 했다. 고기 냄새에 찌든 도윤완 부사장이라니. 옆에서 보기에도 이렇게 낯선데 당사자로선 더욱 견디지 못할 고통일 게 뻔했다.
“그러니까 누가 오래요?”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린이 타박했다. 얌전히 집에 있었으면 불쾌한 냄새가 밸 일도 없고, 팀원들이 당황할 일도 없고. ……내 마음도 편하고. 모두가 해피했을 것을.
“생일날 도망간 여자 친구가 문제지.”
윤완이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으며 심드렁히 대꾸하였다.
“회식 때문에 어쩔 수 없었잖아요. 조직 생활은 그런 거예요. 개인 일정을 희생해야 할 때도 있는 거라고요.”
나린은 이런 인생도 있다는 걸 일깨워줄 목적으로 쏘아붙였다. 모두가 그와 같이 황금빛 인생을 사는 건 아니라는 걸 주지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의 침묵을 긍정의 표시로 여기고, 이해한 건가, 역시 머리가 좋구나 싶은 찰나.
“인사팀에 조직 문화 개선안 올리라고 해야겠네.”
하. 그럼 그렇지. 기대한 내가 바보지. 나린은 다급히 손을 휘저어댔다.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문서 몇 장으로 바뀌지도 않을 문화, 괜한 일거리 늘리지 말라고요.
“아냐. 개선안도 시행하고 임원 평가에도 반영할 거야. 회식 강요 문화 같은 건 사라져야 해. 회사를 위해서도.”
고집스럽게 일자를 그린 그의 입술을 본 순간 나린은 더 이상의 저항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인사팀장님, 죄송합니다.’
속으로 조용히 사죄할 따름이었다. 삐비빅, 카드 키를 태그해 룸 안으로 들어간 윤완은 재킷부터 벗어 던졌다. 역삼각형을 그리는 그의 상체가 불시에 탄탄한 자태를 드러내고. 고작 재킷을 벗은 것뿐인데도 나린의 눈은 정착할 곳을 모르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지. 아니지……. 이렇게 밝은 데서는 처음인가. 나린은 슬쩍 윤완을 곁눈질했다. 수도 없이 안겼던 품인데 어쩐지 당당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셔츠 핏이 저토록 완벽한 남자는 없을 것이다. 회사 일에 치이고 틈틈이 연애도 하느라 시간이 없을 텐데, 언제, 어떻게 저런 그림 같은 몸을 유지하는지. 감탄을 넘어 존경스러웠다. 그러다가 딱 눈이 마주쳤다. 놀란 마음에 나린의 어깨가 들썩였다. 단추를 차례차례 풀어가던 그의 손이 멈췄다.
“안 씻어?”
“……네?”
하나 남은 단추에 손가락을 올리며, 그가 안쪽을 향해 턱짓했다.
“침실 써. 내가 여기 욕실 쓸 테니.”
“아, 네.”
후다닥 침실로 도망을 친 나린은 문을 꽉 닫았다. 세찬 심장박동과 함께 가쁜 숨이 쏟아져 나오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열기가 바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 긴 시간을 들여 샤워를 하고 머리도 꼼꼼히 말린 뒤 욕실 문을 열려던 나린이 주춤한다. 곤혹스러운 사실이 떠올랐다. 옷이 없다. 갈아입을 옷이. 기름기와 냄새로 범벅인 옷을 다시 입을 수도 없고. 이렇게 샤워가운 차림으로 계속 있을 수도 없고.
‘어떡하지?’
하지만 욕실에 내내 갇혀 있는 건 더 말이 안 됐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샤워가운을 단단히 여미며 욕실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침대 위에 놓인 선물 상자 두 개가 깜짝 나린을 반겼다. 란제리 브랜드명이 적힌 기다란 상자와 리본이 예쁘게 매어진 무명의 정사각형 상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사각형 상자부터 리본을 풀어 여니, 우아한 홈드레스가 자태를 드러내며 감탄을 자아냈다. 쨍한 오렌지 빛은 싱가포르에서 그가 사주었던 칵테일을 연상시켰다. 윤완의 세심함에 나린이 미소를 머금었다. 마법사 같은 사람. 늘 마법을 부려 최고의 것만 선물해주는 남자. 선물들을 빠짐없이 착용한 나린은 산뜻한 걸음을 침실 바깥으로 옮겼다. 소파 위, 캐주얼 차림을 한 윤완이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니트에 청바지 차림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셔츠핏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캐주얼도 정장만큼이나 잘 어울렸다. 뭘 입어도 찰떡같이 소화해내는 모델 같은 남자가 내 연인이라니. 나보다 더 운 좋은 사람은 없을 거야. 장난기가 인 나린은 그를 간질여줄 마음에서 살금살금 다가갔다. 고지에 다다른 순간, 길고 굵은 팔이 기습적으로 뻗어지며 나린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나린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의 무릎 위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몸이 쏟아지는 동시에 그의 손이 날렵하게 그녀를 받아 안았다. 간질여주려던 계획이 되레 반격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부사장님.”
“……응?”
부르려던 건 아닌데 놀라서 호칭이 튀어나왔다. 이런 식의 신체 접촉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아 엉망진창이다. 어깨가 돌돌 말리고 손발이 저릿저릿했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아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안 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연나린. 어색해지지 않으려면…….
“피곤하면 침대에서 편히 자세요.”
그가 감고 있던 눈을 게슴츠레 떴다.
“침대로 가자고?”
“네? 아, 아뇨?!”
이게 어떻게 그런 말이 되지? 울상이 된 나린이 깜찍해서 윤완이 쿡 웃음을 터뜨렸다. 나린이 새침한 얼굴로 부끄러워하는 사이, 윤완이 등 뒤에서 자그만 상자를 꺼낸다. 또 선물. 무슨 생일 선물을 이렇게나 여러 번……. 나린의 눈이 큰 동그라미를 그리는데 윤완이 무심한 손길로 상자를 열었다. 나린의 시선이 머무는 위치에 상자를 얹은 커다란 손바닥이 가만히 놓이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빛이 나린의 눈동자를 욱신욱신하게 만들었다. 하얀 링 위로 영롱하게 솟은 다이아몬드. 쓸데없는 장식 없이, 불필요한 치장 없이, 프러포즈링의 정석과도 같은 디자인이었다. 시선과 마음을 한꺼번에 잡아끄는 화려한 존재감에 나린의 손가락이 저절로 이끌린다.
“와.”
반지 바로 앞에서 손이 멈추며 무의식중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윤완은 나린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태어난 날, 주고 싶었어.”
“…….”
“연나린.”
그녀를 안은 손이 단단해졌다.
“나랑 결혼해줄래.”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 꿈결 같은 고백. 감히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바로 대답을 해도 되는 건지. 무서워서. 대답하는 순간 꿈이라고 할까 봐. 현실이 아니라고 할까 봐.
“부사장님…….”
나린이 멍하니 그의 호칭만 되뇌는데, 그가 반지를 꺼내 나린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지 조금 헐거웠다. 윤완은 반지가 예쁘게 자리 잡은 나린의 손에 살그머니 깍지를 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나지막하게 속닥였다.
“대답은 일 년 후에 들려줘.”
잠깐 정적이 흘렀다.
“……네?”
어떻게 승낙을 해야 좋을지를 고민하던 나린은 순간적으로 맥이 풀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프러포즈를 해놓고 대답은 일 년 뒤에 하라니.
“일 년 동안 충분히 고민해보라고.”
의문이 나린을 휘감았다. 지금 당장 대답해도 거절하지 않을 텐데, 왜……. 나린이 혼란스러워 보이자 윤완이 다시금 입술을 들먹인다.
“아직 많이 부족하니까, 일 년 동안 더 노력할게. 그러니까 일 년간 지켜봐 줘.”
“…….”
“그리고 네가 허락하면 그때 같이 반지 줄이러 가자. 네 손에 꼭 맞게.”
“…….”
“……아마, 다음번 네 생일이 되겠지.”
한 글자 한 글자 여실히 전달되어 오는 진심에 나린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직 부족하다니. 일 년 동안 더 노력하겠다니. 지금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나린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가만히 손을 올린 윤완이 볼에 닿을락 말락 번진 눈물을 지워주었다. 그 마음을 다 알겠다는 듯. 그러니 아무 걱정 말라며, 그의 손끝이 마음을 토닥였다. 윤완이 이런 결정을 한 건 당장 나린을 구속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두 사람의 결혼이 공식화되는 순간 도일 그룹으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제약이 그녀를 꽁꽁 옭아맬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조금만 더 이대로 자유롭게 두고 싶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내 세상에 들어오는 건 천천히 해도 늦지 않으니까……. 기다릴게, 얼마든지.’
그럼에도 프러포즈는 미룰 수 없었다. 나린의 외삼촌 댁에 갔던 날 들었던 그 사랑스러운 귓속말에 답을 해주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어서.
‘결혼하면 그땐 다른 호칭으로 불러 줄게요.’
회사에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잠자리에 들다가도, 불쑥불쑥 떠오르며 그를 웃게 했던 고백. 많이 놀랐는지 나린은 말이 없었다. 윤완은 굳어 있는 나린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마음에서 나린의 이마에 대고 콩 손가락을 튕겼다. 행여 아프게라도 할까 봐 아주 살포시, 조심스럽게.
“대답 안 해?”
나린이 와락, 윤완의 품으로 안겨든다. 오른손이 그의 목을 휘감고, 행복에 젖은 얼굴이 그의 뺨에 착 밀착되었다.
“……알겠어요.”
숨결 때문에 귀가 간질간질했다. 윤완의 볼이 빨갛게 물들며 호흡이 가빠졌다.
“일 년 동안 지켜볼게요. 눈도 떼지 않고.”
윤완을 안은 나린의 팔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노력할게요.’
부사장님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도록. 미처 소리 내어 전하지 못하겠는 진심. 소리 내는 순간 그저 그런 미사여구가 되어버릴까 봐. 윤완은 깍지 낀 손을 빼내 나린의 허리춤에 얹었다. 나린의 얼굴이 천천히 들리며 그와 눈을 맞추고,
“네가 태어나서 기뻐.”
윤완의 음성이 나린의 귓가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살짝 시선을 내린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자정 5분 전.
“5분밖에 안 남았네.”
다시 나린과 눈을 맞춘 윤완은 그대로 나린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입술을 건드리는 부드럽고 달콤한 촉각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나린의 마음 안에 두려움마저 생겨났다. 두려우리만큼 행복한, 단연 생애 최고의 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