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생일2021.12.10.
달력 어플과 백화점 홈페이지를 번갈아 보는 나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채 여사가 생일맞이 쇼핑을 가자며 지정한 날은 눈을 씻고 봐도 백화점 정기 휴일이었다. 이 의문은 금방 풀렸다. 백화점이 문을 닫는 것도 맞았고 쇼핑을 할 수 있는 것도 맞았다. 몰랐던 건 쇼핑이 문 닫힌 백화점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VVIP의 한적하고 여유로운 쇼핑을 위한, 알려지지 않은 서비스. 구입할 물건을 결정하는 건 채 여사의 몫이었고 운반하는 건 비서의 몫이었다. 아무 역할이 없는 나린은 빈손으로 털레털레 채 여사를 쫓아다녔다. 그때 정장을 깔끔히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다가와 살갑게 알은체를 했다.
“어머, 오셨어요, 채 이사님.”
백화점 대표이사, 김하영. 장영균 회장의 신임을 얻어 Y 그룹 최초로 여성 CEO 자리를 꿰찬 신화적인 인물이다.
“오랜만이네, 김 사장.”
채 여사가 우아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오실 거였으면 미리 연락을 주시죠.”
“뭐 하러. 서로 바쁜 처지에.”
“하긴, 이렇게 뵙게 되니 더 반가운 것도 같네요.”
하영의 접대성 멘트를 미소로 넘긴 채 여사는 바로 나린에 대한 소개로 넘어갔다.
“이 앤 돌아가신 서방님 아이.”
이 한 마디로 모든 게 설명됐다. 하영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는 표정을 했다.
“그렇군요.”
“나린아, 인사드리렴.”
“안녕하세요. 연나린입니다.”
“반가워요. 김하영이에요.”
공손히 접었던 상체를 편 나린은 하영의 뒤에 선 아는 얼굴에게로 시선을 뻗었다. 하영의 반 발짝 뒤에 서 있는 그녀, 지아는 한눈에도 비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취직에 성공했구나. 다행이다.’
신화 화학에서 비서로 근무했던 경험과 PK 백화점에서 일했던 경력이 합쳐져 긍정적인 작용을 했나 보다. 채 여사가 수백만 원짜리 가방을 결제해주었을 때보다도 더 기분이 좋아졌다. 지아의 눈도 슬그머니 나린을 향했다. 태준과 멀어진 만큼 나린에 대한 감정도 옅어졌다. 이제 나린을 봐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받았던 친절이 생각나며 호감마저 생겨버린 듯했다. 끝난 듯 끝나지 않던 태준 오빠와 내 사이에 마침표를 찍은 여자.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게 착하고 용감한 사람. 지아가 살짝 고갯짓을 했다. 그게 저에게 건네는 호의의 표시라는 걸 안 나린도 똑같이 고개 인사를 해주었다. 다시 얼굴을 올려 마주한 지아는 어딘가 더 단단해진 것처럼 보였다. 지금 태준이 그녀를 본다면 또 한 번 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린의 머리를 스쳤다. *** 나린은 이직 준비에 돌입한 사실을 윤완에게 차마 얘기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금 여사가 회사를 그만둘 것을 권했다는 얘기는 비밀로 해야 했다. 윤완이 승태와 지숙에게 보여줬던 극진함을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었으니까.
‘아직 이직에 성공한 것도 아닌데, 뭐.’
어떻게 말할지는 결정되고 고민하기로 하고 잠시 미뤄둔다. 이직 준비를 도울 헤드헌터는 전전임 CFO로 선정했다. 퇴임한 지 3년째인 전전임 CFO 중한은 이직을 원하는 도일 그룹 후배들을 타 회사에 소개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 민하로부터 들은 걸 기억하고 연락을 했는데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답을 들었다. 그제, 나흘에 걸쳐 작성한 이력서를 마지막으로 퇴고한 뒤 중한에게 전송했다.
“이걸로 된 것 같긴 한데…….”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
“뭐가 돼요?”
집게를 들고 열심히 고기를 뒤집던 진원이 물었다. 혼자 생각한 줄 알았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이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오늘은 나린의 생일이자 팀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나린은 회식 일정에 간섭하려는 윤완을 말리느라 무척 애를 먹어야 했다.
“날짜 바꾸라고 할게.”
“안 돼요. 보름도 더 전부터 정해진 거예요. 결산 일정 피해서 겨우 맞춰놨는데 그러지 마세요.”
“그럼 그 보름도 더 전부터 막았어야지. 네 생일이라고.”
“괜찮아요. 매년 돌아오는 생일. 외삼촌댁에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큰엄마한테서 선물도 잔뜩 받고, 세훈 오빠랑 준우 오빠도 따로 챙겨줬어요. 축하는 이미 넘치게 받았는걸요.”
답답한 건 윤완뿐이고 나린은 계속 괜찮다고만 했다.
‘넌 괜찮아도 난 안 괜찮다고.’
모든 걸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가 양보의 미덕이 밴 나린과 보조를 맞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입씨름은 나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나린이 작심하고 우기면 윤완도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윤완은 뜻깊은 날의 주인공을 자신의 회사에 양보하게 되었다. 어제, 때 이른 생일 기념 저녁을 사주면서 줄곧 성에 안 차 했지만 나린은 마냥 행복해했다.
“이번 생일만큼 과분하게 보낸 적도 없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집에 들어가기 전 나린이 그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며 속살거렸다. 나린의 속살거림은 언제나 마음 깊숙한 곳까지 간질인다. 윤완으로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는 강력한 무기였다. 다시 재무팀 회식 자리.
“나린 대리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진원이 열심히 고기를 익히는 사이 진원과 동기인 부서 후배 진우가 눈을 빛냈다.
“뭔데?”
“민감한 질문인데, 해도 돼요?”
“야, 너 대리님 곤란하게 왜 그래.”
진원이 중간에서 방어막을 쳐주었지만 후배가 마냥 귀여운 나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괜찮아. 해도 돼.”
귀여움이 자칫 발칙함이 될 수도 있음을 깜빡하고서.
“재벌 생활은 어때요?”
“어……?”
“너무 궁금해요. 그렇다고 도 부사장님께 여쭤볼 수도 없고.”
진우가 헤헤 웃었다. 고기가 다 익기도 전에 술을 잔뜩 먹었는지 얼굴이 한껏 불콰해져 있었다.
“정신 차려. 취했어?”
대화에서 물러나 있던 민하가 참전하여 한마디 한다. 주변에 피해만 안 주면 뭐든 상관없다는 신조로 살아가는 그녀가 듣기에도 진우의 질문은 도를 지나친 것이었다.
“궁금한데…….”
진우가 구시렁거리더니 다시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했다.
“제가 궁금한 게 딱 두 개거든요. 연예인 생활이랑 재벌 생활. 대리님은 서민으로도 살아보고 재벌로도 살아봤으니 차이점을 더 잘 아실 것 같아요.”
나린은 뭐라 대답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이전의 삶이 그립다고 하면 저 앤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러다 불현듯 간과한 요소가 생각이 났다.
‘아니지, 이젠.’
이전의 삶엔 부사장님이 없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리워할 수 없는 삶이 되었다. 되돌아가고 싶지 않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그가 없던 시절, 그가 없는 세상으로는.
“막 재벌 인맥들끼리 파티 같은 것도 하고 그래요?”
파티. 가본 적이 있긴 했다. 두 번이나. 이 정도는 답을 줘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응, 뭐……. 가끔?”
“와. 그럼 거기 도 부사장님도 오세요?”
파티 방식에 대해 물어보나 했는데 곤란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윤완과 관련된 얘기는 함부로 할 수 없어서 주저하는 사이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린은 도일 전자 재무팀원들의 시선이 날아든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윤완이 깜짝 출현해 있었다.
‘말도 안 돼! 부사장님이 여길 왜…….’
나린의 머리와 가슴이 혼돈에 빠진 새.
“부사장님. 오실 거면 미리 연락을 주시죠.”
재무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짧게 스캔을 마친 윤완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빈자리에 착석했다. 마침 나린 옆에 빈자리가 있었다. 테이블은 달랐지만 딱 붙어 있는 옆자리. 역시 운명인가 보다. 이 애와는. 졸지에 윤완과 같은 테이블이 된 박 부장이 사색이 된 반면, 간택을 받지 못한 재무팀장은 뻘쭘해 했다. 나린은 예고도 없이 회식 장소에 들이닥친 그를 보고 시한폭탄을 떠안은 기분이 됐다.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회식에 빠지라는 말을 들을 걸 그랬다. 윤완의 등장으로 진우는 합죽이가 됐다. 민하는 진우에게 본때를 보여 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진우 씨, 마침 오셨으니까 궁금한 거 직접 여쭤보면 되겠네.”
“네? 아, 아니에요.”
“왜? 나린 대리한테 묻는 것보다 부사장님께 직접 묻는 게 더 좋지 않겠어?”
나린이 진우를 구해주려 입술을 들썩이는데 윤완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
“뭡니까?”
“아. 이 친구가 나린 대리한테 파티는 자주 하는지, 파티에서 부사장님이랑 만나기도 하는지 궁금하다고 물어보고 있었거든요.”
몇 번 대면보고를 해서 그와의 대화가 어색하지 않은 민하가 날름 대답했다. 재벌 생활은 어떻냐고 물어보고 있었거든요, 무례하게. 원래는 이렇게 고자질하고 싶었지만 이건 너무 가혹하니 그나마 순화한 것이었다. 윤완의 시선이 사정없이 진우에게 내리꽂혔다.
“네, 있습니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은 나린이 테이블 아래에서 슬쩍 윤완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기요, 부사장님.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그럼 제가 또 팀원들 기피 대상 1순위가 되고 말잖아요.’
나린이 걱정한 대로 윤완의 목소리가 닿는 사정권내 모두가 뜨악한 얼굴을 했다. 연나린 대리랑 도윤완 부사장이 사적으로 아는 사이래. 숙덕거리는 소리가 나린의 귀에까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러나 윤완은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묻지도 않은 사실까지 털어놨다.
“파티에서 만나는 건 당연한 거고, 연나린 대리 사촌 오빠랑은 친한 친구고…….”
그리고 이 앤…… 내 인생을 뒤흔든 여자고. 마지막 말은 나중에 둘만 남았을 때를 대비해 아껴두기로 한다.
“이만하면 답이 됐습니까?”
차가운 말투가 진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숯불이 내뿜는 열기가 이렇게도 뜨거운데 기이할 노릇이었다.
“네.”
대답하지 않으면 얼음 화살을 맞을 것만 같아서 진우의 입술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민하는 나린을 향해 눈동자를 줄였다가 늘렸다가 하며 표정 대화를 시도했다. 보고가 잡힐 때마다 나린에게 그의 험담을 늘어놨던 게 떠올라서 심장이 덜컹거렸다.
‘나린 씨. 도 부사장님이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면서 왜 말 안 했어? 그런 줄 알았으면 입 조심했지, 내가.’
뜻하지 않게 속이게 된 게 짓쩍은 나린은 두 손바닥을 맞대어 가슴께에서 찰랑 흔들어 보였다. 방금 삼킨 숨이 목구멍을 역주행해 입까지 도달했지만 윤완에게 들릴까 봐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이러다가 사내 연애를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이직은 꼭 필요한 일이었어.’
결심이 더욱 더 확고해졌다.
‘근데…….’
회식이 다시 떠들썩한 분위기를 되찾고, 여유가 생긴 나린은 윤완을 흘깃 쳐다보았다. 윤완은 나린을 등진 채 박 부장과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설마 부사장님이 여길 올 줄이야.’
냄새나고 기름 튀고. 이런 덴 가장 질색팔색할 사람인데. 의아함을 품는 순간, 이번엔 나린이 질색팔색할 일이 벌어졌다. 윤완의 비서가 손에 케이크를 들고 등장한 것이었다. 망했다……. 나린은 울상이 되었다.
“웬 케이크입니까, 부사장님?”
박 부장이 민첩하게 반찬 접시들을 재배열해 공간을 만들며 물었다.
“오늘 연나린 대리 생일이거든요.”
비서가 케이크를 올려두고 떠난 뒤 그가 무심히 답을 했다. 또 한 번 분위기 얼음. 나린의 후회는 바닥을 쳤다.
‘역시 말을 들었어야 했어. 거짓말을 해서라도 회식을 빠졌어야…….’
고작 말 한 번 안 들었다고 이런 식으로 골탕 먹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윤완의 행동엔 악의가 없었다. 이 회식 자리도 나린을 태워다주려고 온 것이었고, 케이크도 원래는 집 앞에서 안겨주려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진우의 질문으로 나린과 사적으로 왕래하는 사이인 게 밝혀지게 됐다. 그러고 나니 더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게 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나린은 팀원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대리님,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미리 알려주셨으면 제가 챙겼죠.”
태세를 전환한 진우가 아부 발언을 던지고,
“아. 미리 인사 포털 들어가서 확인해볼걸. 죄송해요.”
진원도 눈썹을 아래로 늘이며 미안해했다.
“아냐. 괜찮아.”
한순간에 바늘방석에 올라앉은 나린은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요구를 최우선으로 들어주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