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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출생의 비밀 (55/101)

#55. 출생의 비밀2021.12.07.

막 경영수업을 마친 나린이 응접실을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16558035458967.jpg“사모님께서 찾으세요.”

미옥의 전언에 발길을 돌린 나린은 채 여사의 방으로 갔다. 나린이 맞은편에 앉기를 기다려서 채 여사가 용건을 꺼낸다.

16558035458973.png“어제 도일 그룹 금화연 여사님이 다녀가셨어. 너 출근한 사이.”

전엔 그저 다니는 회사의 오너 일가 중 한 명이었는데 지금은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연인의 어머니께서 다녀가셨단 말에 긴장감이 식은땀인 양 나린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16558035458973.png“약혼 얘긴 이르다고, 천천히 진행하자고 하시더라. 그래서 그러자고 했어. 너희 사귀는 거 인정하기로 하신 모양이야.”

삼성동 부지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던 채 여사였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했다. 나린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내막이었다. 결혼을 허락한 이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걸 알면 마음이 다칠 게 뻔하니까. 아직 이 세계의 셈법이 익숙지 않을 아이이니 배려해주고 싶었다. 채 여사의 말을 들은 나린은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이처럼 쉽게 떨어진 승낙은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16558035458985.jpg‘대체 어떻게 설득을 한 걸까, 부사장님은.’

결과적으로는 일이건 사랑이건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고 감탄하게 되었다. 채 여사가 화제를 전환했다.

16558035458973.png“그리고 너 회사 다니는 것 좀 조치해 달래.”

16558035458985.jpg“네?”

조치라니.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데에 어떤 조치가 필요한 건지 하나도 모를 일이었다.

16558035458985.jpg“회사 다니는 게 왜요?”

채 여사의 눈엔 참 당연한 걸 나린은 감조차 잡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채 여사의 입에서 나지막이 헛숨이 샜다.

16558035458973.png“도 부사장이랑 결혼할 건데 그 밑에서 일하는 것도 좀 그렇잖니. 알려지면 온갖 추측기사가 쏟아질 텐데.”

16558035458985.jpg“아…….”

그런 생각은 또 못 해 봤네. 내 결혼이 기삿거리가 되어 세상에 알려질 거라는 생각은……. 그러나 나린은 이 문제에서만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6558035458985.jpg“그렇지만 저는 계속 회사를 다니고 싶어요.”

사회적인 성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너무 불안했다. 아직은 온전히 내 것인 무기가 필요했다. 고작 탱크에 맞서는 단도에 불과할지라도.

16558035458973.png“왜 고집하는 거니? 쓸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닐 텐데.”

16558035458985.jpg“꼭 돈을 떠나서,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먹으면 너무 쓸모없는 사람 같아서요.”

피트니스 클럽에 가고 스파를 받고 피부 숍에 다니고 쇼핑을 하고. 취미생활만으로도 문제없이 굴러가는 삶.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넘쳐나는 생활. 잠깐의 일탈이라면 누려보고도 싶었지만 일상이 되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 그건 자아를 갉아먹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채 여사는 달라도 너무 다른 나린의 사고방식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괴리감을 느꼈다. 채 여사에게는 돈 몇 푼 벌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나린의 삶이 오히려 헛수고처럼 보였다. 편하고 안락한 길이 버젓이 놓여 있는데. 아무 대가 없이 제 몫으로 주어진 것이라는데. 어쩌면 아직도 이 집과 선을 긋고 있는지 모르겠다. 언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반쪽짜리라며. 두 사람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을 것 같던 그때, 나린이 절충안을 제시했다.

16558035458985.jpg“이직할게요. 도일 전자 아닌 다른 회사로.”

회사생활 자체는 포기할 수 없으나 윤완과 같은 회사인 것만큼은 포기하는 게 맞겠다는 판단이 섰다. 연인 사이가 공표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세간의 입방아를 피하려면. 지난번 준우의 약혼 파티 때 만난 무례한 여자들이 떠오르며 결정에 확신이 더해졌다.

16558035458973.png‘드디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결심이 선 건가.’

채 여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16558035458973.png“우리 호텔로?”

16558035458985.jpg“네?”

채 여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나린이 손바닥을 쫙 편 채 마구 흔들어댄다.

16558035458985.jpg“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16558035458973.png“…….”

난감한 얼굴 위로 멋쩍은 미소가 자연스레 따라 나왔다.

16558035458985.jpg“죄송해요. 그렇지만 전에도 말씀드렸듯 테라 호텔로는 안 가고 싶어요. 이직할 회사는 제 힘으로 알아볼게요.”

16558035458973.png‘역시 별난 애야.’

여전히 이해는 안 가도 채 여사는 뜻을 거두기로 했다.

16558035458973.png“그래, 알았다. 그렇게 하렴.”

연 회장도 내버려두는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권한 밖의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16558035458973.png“대신 서둘러야 해. 언제 기사가 날 지 모르니까.”

16558035458985.jpg“네.”

채 여사가 노파심에 한 번 더 당부하고, 나린은 야무지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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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오가 기다리고 있는 레스토랑 다이닝룸 안으로 혜원이 들어선다. 오늘 아침, 재오가 중간보고를 하겠다며 다짜고짜 혜원을 불러냈다. 선약이 있다는데도 무조건 오늘 봐야 한다고 생떼를 쓰는 통에 혜원도 별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약속을 취소하고 나니 잘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린의 약점이 뭔지 어서 듣고 싶었으니까. 복수할 수단을 손에 넣고 나면 질투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조금이나마 회복될 것 같았다.

16558035513121.png“뭐 좀 건졌어?”

혜원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재오가 시시콜콜한 얘기로 진을 빼기 전에 선수를 칠 작정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라면 이 뒷조사 건 빼고는 절대 사절이다.

16558035458967.jpg“뭐가 그렇게 급해? 아직 주문도 안 했거든.”

혜원의 의도를 읽은 재오는 애를 태울 마음에서 딴청을 피웠다. 좋아하는 여자의 우위를 점하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짜릿했다.

16558035513121.png“아무거나 시켜. 그리고 빨리 얘기해 봐.”

선약이 있다고 튕기더니 혜원도 꽤나 조바심을 내고 있던 모양이다. 저와 같은 부류이면서 전혀 다른 부류인 윤완에게 목을 매는 혜원을, 재오는 측은하게 바라봤다. 뒷조사 결과를 손에 쥔들 할 수 있는 건 고작 분풀이뿐일 텐데 뭘 저렇게 아등바등할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윤완은 이미 떠난 버스인데. 직원을 호출한 재오는 주문부터 했다. 단, 식사는 삼십분 후에 준비해줄 것을 요청했다. 더 이상 애를 태웠다간 혜원의 심장도 같이 타 없어질 것 같으니 보고를 먼저 진행할 심산이었다.

16558035458967.jpg“연나린 과거는 별 게 없어서 손 뗐어. 대학 때 시시한 연애 몇 번 한 게 전부더라고.”

실망스러운 내용의 첫 번째 보고. 그새 인내심이 바닥난 혜원이 짜증을 낸다.

16558035513121.png“겨우 그 얘기 하자고 꼭 오늘 봐야 된다고 한 거야?”

16558035458967.jpg“그럴 리가.”

재오는 관계가 역전된 지금 이 상황을 몹시도 즐겼다. 언제나 애가 타는 쪽은 그였고, 애를 태우는 쪽이 혜원이었는데.

16558035513121.png“그럼? 뭐가 있기는 해?”

16558035458967.jpg“어. 친모 쪽에.”

16558035513121.png“친모 쪽? 연나린한테 타격을 입힐 만한 거야?”

16558035458967.jpg“모르겠어.”

16558035513121.png“…….”

무책임한 답변에 더는 참을 수가 없어진 혜원이 거칠게 일어나더니 출입문 쪽으로 걸어간다.

16558035458967.jpg“조민경 이사장, 출산 기록이 없대.”

문을 나서기 직전 재오가 미끼를 투척해 혜원의 입에 물렸다. 막 손잡이를 비틀려던 혜원은 동작을 멈추고 재오를 돌아봤다.

16558035513121.png“조민경 이사장님이면, 연다현 엄마?”

16558035458967.jpg“응.”

미스터리한 얘기에 혜원이 자리로 되돌아왔다.

16558035513121.png“그게 말이 돼? 딸이 있는데 출산 기록이 없다니. 그럼 연다현은 누가 낳은 건데?”

혜원은 표적이 다현이 아닌 나린이란 것도 잊은 채 단박에 이 출생의 비밀에 빠져들었다. 잠깐의 기다림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16558035513121.png“빨리 말해 봐. 궁금해 죽겠어.”

16558035458967.jpg“얘기해줄 테니까 진정해.”

적극적인 호응에 퍽 만족한 재오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16558035458967.jpg“나도 저기까지 보고 받았을 땐 의아했지. 연다현이 조민경 이사장님 친딸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소문이 안 났을 수 있나 싶어서.”

스릴러 영화 같은 흥미진진한 전개에 혜원은 더욱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16558035458967.jpg“근데 그 무렵 연성환 부회장이 가출을 했었나 봐.”

16558035513121.png“가출?”

16558035458967.jpg“어. 그렇지만 대외적으로는 가출한 게 아니고 조민경 이사장님이랑 별장에서 지낸 걸로 되어 있어. 그때 임신을 하게 돼서 결혼을 서두르게 된 걸로.”

혜원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16558035513121.png“근데 조민경 이사장님은 출산 기록이 없다며.”

16558035458967.jpg“좀 참고 들어봐. 지금부터가 하이라이트니까.”

얘길 하다 보니 흥이 돋는지 재오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16558035458967.jpg“연다현 출생 기록을 찾아봤는데 거기서 놀라운 걸 발견했어.”

16558035513121.png“놀라운 거, 뭐?”

16558035458967.jpg“진짜 연다현의 생모 말이야.”

16558035513121.png“어.”

16558035458967.jpg“따로 있었어.”

혜원의 눈매와 입매가 동시에 지렁이 모양이 되었다. 이쯤 되니 재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기분이 든다.

16558035513121.png“같은 얘길 대체 몇 번째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한 박자 뜸을 들인 재오 입에서 낯선 이름이 툭 튀어나왔다.

16558035458967.jpg“강승혜.”

16558035513121.png“강승혜?”

야비하기 짝이 없는 재오의 표정이 혜원의 눈동자 안에 딱 들어맞았다.

16558035458967.jpg“연나린의 친엄마.”

재오가 친절하게 첨언했다.

16558035513121.png“뭐?!”

뛸 듯이 놀란 혜원은 까딱 잘못하여 앞에 놓인 물 잔을 엎을 뻔했다.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재오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도 딱 저런 반응이었으니까.

16558035513121.png“말도 안 돼. 둘이 동갑 아냐? 그럼, 쌍둥이였단 말이야?”

혜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댔다.

16558035458967.jpg“응. 이란성 쌍둥이였대.”

사실이라면 기절초풍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 누구보다 이 세계의 공주님 같던 연다현이 실은 혼외 자식이었다니. 그러다가 혜원은 곧 맥락이 맞지 않는 점을 발견해냈다.

16558035513121.png“근데 그걸 사람들이 왜 몰라? 둘이 생일이 같을 거 아냐.”

기다린 질문이라는 듯 재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6558035458967.jpg“생일이 달라.”

16558035513121.png“……뭐?”

쌍둥이가 생일이 다르다니. 누굴 바보로 아나. 김이 새려는 순간 재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16558035458967.jpg“흔한 케이스는 아닌데 시간을 두고 쌍둥이를 출산하는 경우가 있대.”

재오가 하는 얘기는 점점 알아들을 수 없게 변해 가는 중이었다. 혜원은 홀린 듯 질문을 던졌다.

16558035513121.png“왜 그렇게 하는데……?”

16558035458967.jpg“굉장히 드물지만, 산모가 조산을 할 때 상황에 따라 그런 선택을 하기도 하나 봐. 첫째는 일찍 낳더라도 둘째는 조금이라도 더 뱃속에 품고 있으려고.”

16558035513121.png“…….”

16558035458967.jpg“병원 기록 보니까 연다현은 28주에, 연나린은 32주에 태어났어. 둘 다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고. 특히 연다현은 꽤 오래 병원 신세를 졌던 것 같아.”

이 얘길 할 때엔 후안무치한 재오의 말투도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예상보다 더 충격을 받았는지 혜원은 말이 없었다.

16558035458967.jpg“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알아낸 거고, 그 뒤에 둘이 떨어져서 크게 된 배경은 지금 파보는 중이야.”

말을 잃은 혜원을 두고 재오가 길었던 얘기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로써 지금까지 캐낸 비밀에 대한 공유가 마무리되었다.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운 암암한 과거에 두 사람 사이로 잠시 침묵이 내리깔렸다. 이윽고 냉정을 되찾은 혜원은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건지 그 본래 목적을 상기해냈다.

16558035513121.png“오래전 일인데 알아낼 수 있을까?”

혜원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16558035458967.jpg“예전 측근들 위주로 접선 중인데, 연 회장 쪽 사람들은 회유가 쉽지 않대. 대신 조민경 이사장 쪽에서 한 명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16558035513121.png“누구?”

16558035458967.jpg“조 이사장님 결혼하실 때 연 회장님 댁에 같이 들어갔다가 사고 직후에 그만둔 가정부.”

16558035513121.png“아.”

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지척에 있던 사람이라면 사정을 모두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16558035458967.jpg“마침 사업에 실패한 아들이 하나 있어서 그쪽을 공략해 보는 중이라고 전달받았어.”

재오가 덧붙이자 혜원이 도도하게 턱을 괴었다.

16558035513121.png“확인되는 대로 바로 알려줘.”

16558035458967.jpg“근데 이게 쓸모가 있겠어?”

재오가 묻는다. 확실히 흥미로운 얘기이기는 하나 나린을 공격할 거리는 못된다고 생각했다. 터뜨려서 가십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16558035513121.png“어.”

하지만 혜원은 자신만만해했다. 재오는 궁금증이 일었다.

16558035458967.jpg“어떻게?”

혜원의 한쪽 입술 끝이 위로 찬찬히 끌어당겨졌다.

16558035513121.png“생각해 봐. 저 과정엔 분명 연성환 부회장 본인, 아니면 연태용 회장이 관여돼 있겠지. 그분들이 좋은 마음으로 모녀 사이를 갈라놨을 리 없고.”

16558035458967.jpg“그래서?”

16558035513121.png“테라 호텔에서 과거에 자기 엄마와 언니에게 한 짓. 그게 밝혀지면 연나린이 계속 그 집에 있으려고 할까?”

혜원의 비상한 두뇌 회전에 재오가 무릎을 탁 쳤다. 그저 놀랍다고만 생각했던 출생의 비밀이 쓰기에 따라 상대를 이 세계에서 날려버린 폭탄이 될 수도 있었다니. 짧은 순간에 그런 성찰을 해낸 혜원을 재오는 감탄하는 눈으로 우러러봤다. 기고만장한 표정이 된 혜원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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