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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당신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해줘서 (54/101)

#54. 당신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해줘서202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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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규격의 4인용 식탁은 윤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비좁았다. 수저를 들 때마다 팔꿈치가 옆 사람에게 자꾸 부딪혔다. 팔이 닿는 상대가 나린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식사를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에다 이미 저녁 식사를 한 뒤라 소화 기관들이 동시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꾸역꾸역 힘겨운 목 넘김이 계속되었다.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워냈다. 오는 길에 비서로부터 받은 조언을 쏙쏙 흡수한 결과였다.

16558035274022.jpg“강 과장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조용하던 차 안 공기를 흩뜨리는 낮은 음성에 강 비서는 긴장을 했다.

1655803527403.jpg“예.”

  강 비서가 최근 수행한 업무 리스트를 곱씹으며 예상 질문을 추려보던 그때,

16558035274022.jpg“여자친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서 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물음이 던져졌다. 윤완을 보좌한 이래 최초로 받아보는 인간적인 질문이었다.

1655803527403.jpg“일반적으로 말씀이십니까?”

  강 비서는 출제 의도를 재확인했다. 윤완이 속한 세계의 방식과 자신이 속한 세계의 방식은 엄연히 다를 터였다.

16558035274022.jpg“네.”

1655803527403.jpg“보통은 싹싹하게 굴고…….”

  이건 하루아침에 안 되는 거니까 패스.

1655803527403.jpg“아, 준비해 주신 음식 잘 먹고요. 보통 장모님들은 잘 먹는 사위를 좋아하시거든요.”

  저녁 시간 지나서 가는 거니까 이것도 패스.

16558035274022.jpg“더 없습니까?”

  없긴요. 돈이 많으면 됩니다. 저 두 개를 다 못해도 돈만 많으면 만사 끝이죠. 그러나 이 말은 할 수 없었다. 돈이 많은 걸로는 대한민국에서 그를 능가할 자가 몇 안 될 테니 어차피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1655803527403.jpg“예. 그런 것 같습니다.”

  강 비서의 말에 윤완은 별거 없다고 안심을 했다. 하루 두 번 저녁 식사를 해야 할 운명에 처할지도 모르고. 수정은 잘 먹는 윤완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1655803527403.jpg‘의외네. 초일류 셰프가 요리한 거 아니면 안 먹게 생겨가지고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 나린이 말이 맞았나. 엄마의 음식을 공유한 것만으로도 평가가 조금 후해진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후식은 거실 테이블에 별도로 준비가 됐다. 그를 바닥에 앉혀야 하는 상황에 나린이 난감해하는데, 윤완은 꺼릴 게 없다는 듯 양반다리를 하고 탈싹 주저앉았다.

1655803527403.jpg“선물 풀어 봐도 돼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수정이 다과상 대신 쇼핑백 앞에 쪼르르 다가앉으며 물었다.

16558035274022.jpg“네.”

윤완의 허락에 수정의 손이 쇼핑백을 헤집는다. 그 사이 지숙이 녹차를 내왔다. 일회용 티백이 퐁당 빠져 있는 찻잔을 보며 나린은 아차 싶었다.

16558035297745.jpg“마실 거, 다른 거 줄까요?”

줄 만한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16558035274022.jpg“아니.”

그러더니 거부감 없이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남들에겐 별일도 아닐 이 모습도 나린에게는 깊은 감동을 안겼다. 노력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와서. 늦은 저녁 식사에 열중하느라 대화를 나눌 여력이 없었던 승태는 뒤늦게나마 여자친구 아버지 역할을 해보기로 했다. 이 녀석이 우리 나린이랑 교제를 해도 될 만큼 제대로 된 놈인지 그 면면을 속속들이 파헤쳐 주리라.

1655803527403.jpg“그래, 이름이 뭐라고?”

그 시작은 아까 얼핏 들은 것도 같은 그의 이름 석 자를 확인하는 데서부터.

16558035274022.jpg“도윤완입니다.”

도윤완? 특이한 이름이네.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고.

1655803527403.jpg“직업은?”

16558035274022.jpg“도일 전자에 다니고 있습니다.”

직장은 뭐, 합격이로군.

1655803527403.jpg“그럼 우리 나린이랑은 회사에서 만난 거로구만. 직급은 대리? 과장?”

16558035274022.jpg“……부사장입니다.”

1655803527403.jpg“풉.”

승태의 입에서 녹차가 뿜어져 나오고, 이 대화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수정은 웃음을 터뜨렸다. 본의 아니게 승태를 곤경에 빠뜨리게 된 나린은 조용히 면구스러워 했다.

1655803527403.jpg“아니, 젊은 친구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진급을 했지? 능력이 아주 좋은가 보네.”

1655803527403.jpg“아빠. 도윤완. 이름 들으면 딱 모르겠어? 도일 그룹, 도일현 부회장 아들이잖아요.”

승태가 더 이상 소외되지 않도록 수정이 그의 신분을 일러 주었다.

1655803527403.jpg“뭐?!”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내질러지고,

1655803527403.jpg“저, 정말이냐, 나린아?”

혼돈에 휩싸인 그는 말조차 더듬거렸다.

16558035297745.jpg“네.”

수정은 망연자실해 하는 승태의 팔에 제 팔을 감았다.

1655803527403.jpg“뭘 그렇게 놀라? 우리 나린이도 이제 테라 호텔 손녀신데 이 정도는 만나 줘야지.”

수정의 애교에도 승태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잠잠하기만 하던 지숙이 풀쑥 입을 열었다.

1655803527403.jpg“우리 나린이랑은 사귄 지 얼마나 됐어요?”

16558035274022.jpg“한 달 반 정도 되어 갑니다.”

윤완의 차분한 답에 나린은 슬쩍 놀라워했다.

16558035297745.jpg‘그것밖에 안 됐나. 체감으로는 더 된 것 같은데.’

여느 한 달 반 된 연인들보다 만남의 횟수가 훨씬 잦았으니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 기본적으로 주 5일은 얼굴을 봐야 했고, 주말엔 윤완의 고집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끼 이상 식사를 함께했다. 그러니 그간 한 번도 안 만난 날은 손에 꼽는다.

1655803527403.jpg“양가 어른들께서는 두 사람 만나는 거 다 알고 계세요?”

16558035274022.jpg“네.”

1655803527403.jpg“다른 말씀은 없으시고요?”

16558035274022.jpg“……없으셨습니다.”

이건 나린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다행이다. 부모님들께서 반대하지 않으신다니.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잡음은 좀 있었지만 내막을 까맣게 모르는 나린은 자그맣게 안도했다.

1655803527403.jpg“그렇다면 안심이네요.”

테이블 아래에 있던 지숙의 손이 나린의 손을 꼬옥 쥔다. 나린은 지숙의 진심에 울컥했다. 윤완이 가진 어마어마한 배경 앞에서 얼씨구나 하기보다 나린이 받을 상처를 먼저 살피는 그 신중함이 여지없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어떤 고관대작이 와도 제 자식보다 귀하지 않은 엄마의 마음. 지숙 덕분에 나린은 엄마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 나린이 지닌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씨는 지숙의 애정과 희생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는 윤완은 승태와 지숙 앞에 홀연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승태와 지숙이 몸을 들썩거린다.

16558035274022.jpg“오늘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뵙는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나린이가 못 오게 할 것 같아서 이런 선택을 하게 됐습니다.”

1655803527403.jpg“아, 아니에요. 우리야 만나서 반갑고 좋지, 뭐. 언제든 편하게 놀러 와요.”

깍듯한 윤완의 태도에 승태는 도리어 안절부절못해 했다.

16558035274022.jpg“나린이가 두 분께 감사한 마음이 큰 것 같아서 저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뵙고 나니 정말 좋은 분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1655803527403.jpg“우리야말로 나린이한테 고마운 게 많은 사람들이에요. 해준 것도 없는데 혼자 잘 커 줬거든.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고 속 한 번 썩여 본 적이 없었으니까…….”

승태의 말에 지숙은 슬그머니 눈물을 훔쳤다. 지켜보는 나린의 가슴도 덩달아 뭉클해졌다.

1655803527403.jpg“그래서 나는 속 썩였다 이거예요?”

신파극으로 빠지는 게 싫은 수정이 과장해서 볼멘소리를 내보았지만 윤완이 그걸 신경 쓸 리 없었다. 윤완은 다시 준비해온 말들을 이어나갔다.

16558035274022.jpg“두 분께서 나린이를 아끼시는 마음 그대로, 저도 똑같이 아끼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라는 말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1655803527403.jpg“…….”

16558035274022.jpg“나린이를 이렇게 예쁘게 키워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윤완이 고개를 조아리고, 지숙의 흐느낌은 한 단계 더 성량을 키웠다. 승태 역시 눈물을 참으며 얼굴을 돌린다. 나린이 촉촉해진 눈으로 윤완을 바라보았다. 차츰 시야가 흐려지면서 윤완의 얼굴이 뿌옇게 변했다. 눈물이 나는데도 가슴은 전혀 아프지 않은 색다른 경험. 무한한 행복으로 빼곡히 채워진 마음은 윤완의 마음에 똑똑 노크를 했다. 부사장님. 그거 아세요? 내 출신이 밝혀지고 수정이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행운이라고 했지만 전 걱정이 앞섰어요. 혼외자인 신분을 알게 된 것도 싫고, 자유가 구속당하게 된 것도 싫고. 윤재오 남매나 신혜원 씨 같은 사람들도 마주치고 싶지 않고. 그렇지만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내가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가게 된 건 다신 없을 행운이었다고……. 세상에 나보다 더 행운아는 없다고. 도망치지 않을게요. 버겁고 힘들어도 부사장님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노력할게요. 두렵지 않아요. 부사장님만 있어 주면 그 어떤 어려움도 전부 감당해낼 수 있으니까. 고마워요. 나를 선택해줘서. 당신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해줘서. *** 나린은 윤완을 배웅하러 따라 나왔다. 둘만 남게 된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고픈 윤완이 산책을 제안했다. 깍지 낀 손을 한 두 사람은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조경이 잘 꾸며져 있어 산책 삼아 거닐기 딱 알맞았다. 바닥에 촘촘히 박힌 동그라미 조명들이 걸음걸음 발밑을 보살핀다. 반 바퀴쯤 걸었을 무렵, 하루 두 차례 저녁 식사를 하고 속이 더부룩해진 윤완이 무심결에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과식을 한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니 소화 기관들이 말썽을 일으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6558035297745.jpg“왜 그러세요? 체했어요?”

16558035274022.jpg“……조금.”

16558035297745.jpg“어떡해요? 약 먹어야겠다.”

나린이 약국 위치를 검색하려 폰을 꺼내는데 윤완이 제지했다.

16558035274022.jpg“걸으면 괜찮아질 거야.”

16558035297745.jpg“그래도요. 음식이 너무 기름졌나.”

16558035274022.jpg“그런 거 아냐. 걱정 마.”

나린은 윤완의 등을 찬찬히 쓸어 주었다.

16558035297745.jpg“부사장님도 이런 자리는 긴장이 되나 봐요. 신기하다.”

윤완은 체증을 느끼는 진짜 이유를 함구했다. 미련하게 하루 두 번 저녁을 먹다니. 털어놓기엔 너무 멋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대신 언젠가 따져야지 했던 호칭 문제를 거론하기로 했다.

16558035274022.jpg“근데, 세훈이도 오빠고 준우도 오빠인데, 왜 나만 계속 부사장님이야?”

16558035297745.jpg“아.”

윤완의 등을 쓸던 나린의 손이 멈추었다.

16558035274022.jpg‘나도 오빠라고 해줘. 아님 걔네를 오빠라고 부르지 말든지.’

윤완의 마음 안에서 질투심이 빠끔 고개를 들었다. 나린을 알기 전까지는 누굴 부러워 해본 적 없었는데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이 유치한 감정에. 나린이 옆에 있는 한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신이 질투의 화신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인정하고 나면 편했다. 이렇게 불만을 다 드러낼 수도 있고.

16558035297745.jpg“그렇지만, 부사장님은 부사장님이잖아요.”

16558035274022.jpg“그건 회사에서만이지.”

16558035297745.jpg“회사에선 부사장님이라고 부르고, 회사 밖에선 다른 호칭 쓰고 그러면 헷갈린단 말이에요. 다른 직원들 앞에서 실수하면 어떡해요.”

일리 있는 말이긴 했다. 재무팀장이나 박 부장 앞에서 ‘오빠’라고 부르기라도 하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대참사.

16558035274022.jpg“그럼 같은 회사 다니는 한 쭉 부사장님이야?”

16558035297745.jpg“사장님으로 진급하면 사장님이요.”

16558035274022.jpg“장난치지 말고.”

봄에 태어난 아이답게 나린이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어딘가 꿍꿍이가 감추어져 있는 것도 같아 윤완은 긴장을 했다. 이 여우.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불쑥 까치발을 든 나린이 윤완의 귀에 대고 손나팔을 만든다. 뭐라 뭐라 속삭이자 하얀 가로등 불빛 아래 놓인 윤완의 얼굴이 점차 붉게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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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035274022.jpg“너…….”

윤완이 입술을 움직이는데, 듣지 않겠다는 듯 나린이 잽싸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윤완은 쫓아갈 생각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콕 박혀 있었다. 방금 전 들은 귓속말이 주문을 걸어서.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가슴을 막고 있던 체기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표정을 식별할 수 있을까 말까 한 거리에서 멈춰 선 나린이 윤완을 돌아보며 휘휘 손을 흔들었다.

16558035297745.jpg“너무 늦으면 삼촌이랑 숙모 서운해하시니까 먼저 들어갈게요. 조심히 가세요.”

그리고 총총 달려가 버리는 모습이 꼭 어릴 적 뮤지컬에서 본 시계 토끼 같다. 쫓아갔다간 이상한 나라에 끌려가 풀려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그대로 보내주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사가 잠깐 차를 대고 소화제를 사러 간 사이, 윤완은 나린으로부터 들었던 마법 같은 말을 되새겨 보았다.

16558035297745.jpg‘결혼하면 그땐 다른 호칭으로 불러줄게요.’

  그의 입꼬리가 귀에 닿을 듯 긴 곡선을 그리고.

16558035297745.jpg‘결혼하면.’

16558035297745.jpg‘결혼.’

  특별한 단어가 행성이 되어 그의 심장 주위를 빙글빙글 공전한다. 그러니까 프러포즈를 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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