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너에게 소중한 사람은 (53/101)

#53. 너에게 소중한 사람은202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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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일 전자 본사 29층, CFO실. 전화기에 손을 올린 윤완이 무언가 골똘하고 있다. 아침부터 연 회장에게 전화를 걸지 말지 계속 고민하는 중이었다.

16558035068707.jpg‘테라 호텔 손녀랑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이어가도 좋다.’

  어제저녁, 갑작스럽게 허락이 떨어졌다. 이 말을 할 때에 아버지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옆에 있던 어머니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던 걸로 보아 부모님들께서 직접 내린 결정은 아닌 것 같았다.

16558035068711.jpg‘그럼에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더 위에서부터 내려온 지시. 윤완은 전화기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할아버지밖에 없지. 그리고 할아버지를 움직일 사람은…….

16558035068715.png‘나는 나린이를 지키고 싶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협상을 할 생각이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애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 약속하겠느냐?’

  전화는 하지 않기로 했다. 기껏 물어도 속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16558035068711.jpg‘대체 무얼 주신 겁니까.’

무얼 주는 대가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신 겁니까. 한편 고마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거래가 오갔을 거란 사실에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나린은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존재인데. 그 어떤 조건도 달 필요 없이.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윤완은 유리 벽으로 다가섰다. 망가진 기분을 전환하는 데 그녀를 보는 것만큼 마침맞은 게 없었다. 불투명 처리가 되어 있지 않은 부분으로 나린이 있는 자리를 들여다 본다. 눈 안에 실루엣이 담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온해졌다. 초봄. 나린이가 태어난 계절. 세상의 색이 변했다. 앞으로 누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봄이라고 대답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다시 자리로 되돌아왔다. *** 침실로 돌아온 연주환 부회장과 채윤희 여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무거운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다. 부부는 막 연 회장의 방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16558035068707.jpg“아무리 도일 그룹에 시집보내기 위해서라지만 삼성동 땅을 내어 주시겠다니.”

주환은 아까 아버지 앞에서 감히 꺼내지 못했던 불만을 아낌없이 분출해냈다.

16558035068732.png“…….”

16558035068707.jpg“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네. 성환이한테 못 해 준 걸 나린이한테 다 해 주겠다, 뭐 그런 건가.”

채 여사는 주환보다는 한결 차분했다. 애초에 나린 몫으로 주어질 시아버지의 재산에까지 탐을 낼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16558035068732.png“어쨌건 그 애가 도일 그룹에 들어가는 건 잘된 일이잖아요. 세훈이한테도 큰 힘이 될 거예요.”

채 여사의 일깨움에 주환도 수긍을 한다.

16558035068707.jpg“하긴. 세훈이한테 나쁠 게 없기는 해…….”

그러다가 새삼 나린의 능력이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놀라움을 넘어서 위대할 지경이었다.

16558035068707.jpg“진짜 대단한 애네. 아버님에, 도윤완 부사장에. 핵심만 쏙쏙 골라서 제 편으로 만들었잖아. 온 지 얼마 안 된 애가 도일 그룹 며느리 자리를 꿰찬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16558035068732.png“……좋은 애예요.”

채 여사는 잠옷을 건네며 지그시 쏘아붙였다. 잠옷을 받아들던 주환의 손이 멈칫했다.

16558035068707.jpg‘이제는 내 아내까지.’

그의 눈이 나린이 있을 2층, 천장 쪽으로 향했다. 그는 단추를 풀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경이롭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 나린은 쉬이 거실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주저거렸다. 여기야말로 내 집 같아야 할 곳인데 왜 이리 조심스러운 건지. 지숙도 가만히 나린을 지켜보고만 서 있다. 두 사람의 얼굴은 곧 눈물을 쏟을 듯 울먹울먹했다. 지숙의 뒤에선 수정이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이 절절한 상봉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들썩이는 입술이 수정도 눈물을 삼키느라 애를 먹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울먹임 끝에 먼저 반가운 마음을 터뜨린 건 나린이었다.

16558035095837.jpg“외숙모.”

나린은 평생 엄마를 부르는 마음으로 불러왔던 그 다정한 호칭을 오랜만에 입에 담았다.

16558035068707.jpg“어서 와, 우리 나린이.”

마주 안은 지숙의 손이 쉬지 않고 나린의 등 위를 돌아다닌다. 오늘 방문은 나린의 청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이틀 전 채 여사가 성대한 생일 파티 개최를 제안해왔다. 파티 계획을 극구 사양한 나린은 용기 내서 조심스레 다른 선물을 부탁했다.

16558035095837.jpg“파티 대신 부탁이 있는데요, 큰엄마.”

16558035068732.png“부탁? 뭔데?”

16558035095837.jpg“저, 외삼촌 댁에 다녀오고 싶어요.”

거절당해도 어쩔 수 없지 하고 내질러본 것이었는데 채 여사는 선뜻 허락했다.

16558035068732.png“그래, 여기 오고서 한 번도 못 갔으니 갈 때도 됐지. 이번 금요일에 다녀오렴. 하룻밤 자고 와도 되고. 아버님껜 내가 말씀드릴게.”

허락이 떨어지자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린은 즉시 이 기쁜 소식을 단체 메시지 창에 알렸다. 얼어 있던 메시지 창이 활기를 되찾았다.

16558035068707.jpg[잘 됐다. 안 그래도 생일인데 얼굴도 못 보나 서운해했더니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숙모가 다 해놓을게.]

  감격스러워하는 지숙의 메시지에 이어,

16558035068707.jpg[금요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퇴근할 거다.]

  외삼촌 승태의 다짐이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손꼽아 기다리던 금요일이 찾아온 것이었다. 저녁 식사는 승태를 기다리느라 한참 늦추어졌다. 승태는 일곱 시 반을 훌쩍 넘겨서야 헐레벌떡 퇴근했다. 이것도 최선을 다해 일찍 퇴근한 축에 속했다. 그가 씻는 사이 세 여인은 오순도순 저녁상 차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딩동, 별안간 초인종이 울린다. 여섯 개의 눈이 일제히 아리송한 빛을 띠었다.

16558035068707.jpg“인테리어 업체에서 동의서 받으러 왔나?”

조리도구를 정리하던 수정이 인터폰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16558035068707.jpg“신축 아파트인데 누가 인테리어를 해?”

지숙이 흘려듣고 반박했다.

16558035068707.jpg“오래 살 생각으로 하고 들어오는 사람도 꽤 있…….”

인터폰 화면을 확인한 수정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16558035068707.jpg“나린아…….”

수정의 부름에 나린이 냉큼 인터폰 쪽으로 달려간다.

16558035095837.jpg“왜?”

하다가 나린도 그만 말문이 막혔다. 인터폰 화면에 그려진 얼굴이 일순간에 발화 능력을 앗아갔다. 흐린 화질을 뚫고 나오는 빛나는 얼굴에 나린은 제 눈을 의심했다.

16558035095837.jpg‘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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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035068707.jpg“도윤완 부사장도 오기로 했어?”

그와 만난 적 있는 수정이 나린에게 속살거렸다.

16558035095837.jpg“……아니.”

외삼촌 댁에 가서 자고 올 거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와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 여기 주소는 더더군다나 가르쳐 준 적 없고.

16558035068707.jpg“그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딩동.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리고, 나린은 일단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어떤 사정으로 오게 됐든 문전박대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6558035095837.jpg“어떡해?”

얼결에 문을 열어주고서는 수정에게 도움을 청해본다.

16558035068707.jpg“나야 모르지.”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인 수정은 나린에게 쏘아준 뒤 부엌에 있는 지숙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16558035068707.jpg“엄마, 밥 넉넉히 했어?”

16558035068707.jpg“밥? 넉넉히 하긴 했는데, 왜?”

지숙의 대답은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16558035068707.jpg“근데, 이런 밥은 먹을 수 있는 사람인가?”

수정은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질문을 던지며 얼굴을 찡그렸다. 수정이 기억하는 도윤완 부사장은 태준과는 차원이 달랐다. 태준에게서는 어느 정도 소탈함이 느껴졌는데 윤완에겐 그런 면이 하나도 없었다. 같은 재벌이라도 재계 1위 그룹 후계자는 뭔가 다른가 보다 하며 재수 없어 했던 기억이 난다.

16558035068707.jpg‘나는 이태준 씨가 백만 배 더 나은 것 같지만 도윤완 부사장이 더 부자니까 너한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할게.’

  윤완을 만난 다음 날 수정이 나린에게 들려준 총평은 악플이나 마찬가지였다.

16558035095837.jpg‘아니야. 알고 보면 진짜 진짜 좋은 사람이야.’

16558035068707.jpg‘이태준 씨보다 더?’

16558035095837.jpg‘응.’

16558035068707.jpg‘아무래도 콩깍지 같은데…….’

  그를 위한 나린의 항변에도 수정은 좀처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딩동. 그가 현관 앞에 당도했음을 알리는 초인종이 또 한 번 청아하게 울렸다. 긴장된 얼굴로 문을 연 나린이 그가 들어오기도 전에 선수를 쳐 바깥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잠기지 않도록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쥔다.

16558035095837.jpg“어떻게 된 거예요?”

나린은 복도의 울림이 집 안까지 전달되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16558035068711.jpg“인사드리러 왔어.”

16558035095837.jpg“말도 없이 갑자기요?”

16558035068711.jpg“말했으면 못 오게 했든지, 신경 쓴다고 스트레스받았든지, 둘 중 하나였을 거잖아.”

16558035095837.jpg“…….”

그건 그렇지. 가급적 전자가 되도록 최선을 다했겠지.

16558035095837.jpg“여긴 어떻게 알았는데요?”

16558035068711.jpg“세훈이가 비서실에 물어봐 줘서.”

그랬다. 이 집은 할아버지가 비서실을 통해 장만해준 집이었다. 나린의 눈이 곧 쇼핑백을 한 아름 들고 서 있는 강 비서에게 닿았다.

16558035095837.jpg“저건 또 다 뭐고요.”

16558035068711.jpg“인사 오면서 빈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

사면초가였다. 선물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그를 매몰차게 돌려보낼 순 없는 노릇이다. 나린은 문득 윤완을 이렇게 오래 문밖에 세워두는 게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대받진 않았어도 손님은 손님이니까.

16558035095837.jpg“들어오세요.”

그래서 잡고 있던 현관문을 활짝 열어 그가 들어올 수 있게 해주었다.

16558035068707.jpg“누구니?”

주방에서 나온 지숙의 눈이 윤완과 강 비서 사이에서 갈 곳을 잃는다. 키 큰 장정 둘이 들어오자 궁궐이라고 분에 넘쳐 했던 34평 신축 아파트도 비좁게 느껴졌다.

16558035068707.jpg“누구야?”

지숙은 만만한 수정의 귀에 대고 자그맣게 물었다.

16558035068707.jpg“나린이 남자친구랑…… 옆엔 비서인가 보다. 높으신 분이거든.”

16558035068707.jpg“뭐?!”

수정의 대답에 지숙이 물기 어린 손을 앞치마에 부벼대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16558035068711.jpg“안녕하십니까. 도윤완이라고 합니다.”

윤완이 단정히 허리를 숙인다. 막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차림으로 거실로 나오던 승태는 얼결에 인사를 받고 허둥지둥했다.

16558035068707.jpg“아, 어서 와요. 오는 줄도 모르고 내가 편하게 있었네. 잠깐만 기다려요.”

승태는 다시 옷을 갈아입으러 안방으로 쏙 들어갔다.

16558035068707.jpg“나린이 너는 미리 말을 좀 해 주지.”

사태의 발단을 오인한 지숙은 나린을 타박했다.

16558035095837.jpg‘그러고 싶었지만, 저도 오는 줄 몰랐거든요.’

그러나 윤완의 첫인상을 위해 이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 인사드리는 건데 말도 없이 들이닥치는 예의 없는 인물로 만들 수는 없었다.

16558035095837.jpg“죄송해요.”

하지만 나린이 대신 잘못을 뒤집어쓰는 걸 두고 볼 리 없는 윤완이 나서서 사실관계를 정정했다.

16558035068711.jpg“아닙니다. 제가 얘기 안 하고 왔습니다. 두 분을 뵙고 싶은 마음에 결례를 무릅썼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더니 뒤에 서 있는 비서에게 눈짓을 했다. 비서는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거실 입구에 차례로 내려둔 뒤 집을 떠났다.

16558035068707.jpg“뭐예요?”

명품 로고들을 일망한 수정의 눈이 호기심 반, 기대감 반으로 꽉 들어찼다.

16558035095837.jpg“선물이래.”

나린이 답을 해 주는 것과 거의 겹쳐서,

16558035068707.jpg“저녁은 먹었어요?”

지숙이 물음이 윤완을 향했다. 윤완은 망설였다. 식탁 위에 정갈히 차려진 음식은 한눈에 봐도 아직 식사 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저녁 시간을 피하고 싶어서 일부러 지금을 고른 건데.

16558035068711.jpg“……안 먹었습니다.”

그의 답에 지숙은 걱정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을 했다.

16558035068707.jpg“배고팠겠네. 어서 앉아요. 차린 건 없지만…….”

윤완이 나린을 쳐다보자 나린은 그의 뜻을 알아채고 왼편에 난 문을 가리켰다.

16558035095837.jpg“거기가 욕실이에요.”

윤완이 욕실로 들어간 뒤 나린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머릿속이 온통 시끄러웠다. 이 집에 도윤완 부사장님이 오다니! 부사장님이 외삼촌과 외숙모와 만나다니! 윤완과 외삼촌, 외숙모가 함께 있는 모습은 상상도 해본 적 없다. 무의식중에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구분 짓고 살아왔는지도 몰랐다. 욕실 안에서 꼼꼼히 손을 씻은 윤완은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았다. 이런 곳에서의 식사는 초등학교 때 멋모르고 따라간 친구 집 이후 처음이었다.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됐지만 그래도 해내야만 한다. 저분들은 나린에게 소중한 존재이니까. 나린에게 소중한 사람은 그에게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와 두 번째인 저녁 식사. ‘미션 임파서블’이지만 윤완은 나린을 떠올리며 힘을 내기로 했다.

16558035068711.jpg‘할 수 있어, 도윤완.’

비장한 각오를 삼킨 윤완이 욕실 바깥으로 힘찬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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