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협상 (52/101)

#52. 협상2021.11.26.

윤완은 나린을 데리고 2층 로비로 나왔다. 볼룸 안만큼은 아니었지만 로비도 제법 붐볐다. 오가며 마주쳐 인사를 나누는 이들로 북적북적 활기가 넘친다. 윤완은 한갓진 모퉁이로 나린을 데려갔다.

16558034832949.jpg“태준이가 뭐라고 했어?”

16558034832954.jpg“별 얘기 안 했어요.”

16558034832949.jpg“왜 멋대로 사라진 건데?”

16558034832954.jpg“얘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서요.”

꼬박꼬박 답을 하던 나린은 돌연 마음이 상했다. 잘못한 것도 없이 심문을 당하는 것 같아서. 이런 파티, 준우 오빠 약혼식이 아니었다면 안 왔을 텐데. 괜히 이상한 여자들이나 만나고.

16558034832954.jpg“저 먼저 집에 가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

16558034832949.jpg“안 돼.”

16558034832954.jpg“왜요?”

16558034832949.jpg“같이 가야지. 데려다줄게.”

16558034832954.jpg“혼자 택시 타고 갈 수 있어요.”

16558034832949.jpg“연나린.”

그랬지. 이렇게 경고하듯 부르면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고는 했었지, 매번. 나린은 대답하지 않는 걸로 뾰로통한 심기를 드러냈다. 대신 입술만 한 번 오므렸다가 폈다.

16558034832949.jpg“그 반응은 뭐야? 기분 안 좋다고 시위하는 거야?”

16558034832954.jpg“먼저 기분이 안 좋은 건 부사장님이었잖아요.”

투덜거리는 모습에 이해할 수 없게도 윤완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16558034832949.jpg“내가 언제.”

솟아오르는 두 볼을 내리누르며 그가 대꾸했다.

16558034832954.jpg“방금요. 뭐 잘못한 것처럼 몰아세워 놓고선. 사람 옆에 세워두고 사업 얘기에 푹 빠진 게 누군데.”

투정 부리는 모습마저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진짜 이 애를 어떡하면 좋을까. 윤완의 두 손이 나린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 표현이 이것이었다.

16558034832949.jpg“미안해.”

예정에 없던 사과에 나린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진다.

16558034832954.jpg“부사장님은 왜 화난 건데요?”

나린의 두 눈이 그의 눈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16558034832949.jpg“질투…….”

윤완은 들릴 듯 말 듯한 두 글자를 뱉었다.

16558034832954.jpg“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나린의 눈썹이 찡긋거렸다. 기왕 엎질러진 거 윤완은 제 마음을 탁 터놓기로 했다. 못난 마음이라도 이것 이상으로 똑똑히 증명할 수 없는 게 없으니. ……그녀를 향한 사랑의 크기를.

16558034832949.jpg“태준이, 어찌 됐든 너랑 약혼 얘기가 오갔던 사람이잖아.”

나린은 멍한 얼굴을 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태준과 만나는 척 연극했던 일은 어느덧 기억 저편에 묻힌 지 오래였다. 기분이 안 좋을 만했다고, 그러니 심문도 당할 만했다고 나린은 빠르게 수긍을 했다.

16558034832954.jpg“죄송해요.”

16558034832949.jpg“…….”

조심스러워하며 눈치를 보는 나린을 보니 윤완의 심장이 따끔거렸다. 당장이라도 끌어안고픈 충동에 몸이 닳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 들여보내지 말까. 마침 있는 곳도 호텔이고.

16558034832954.jpg“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 것 같아요? 태준 씨랑 다시는 말도 섞지 말까요?”

윤완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했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대안을 당당히도 제시한다. 태준이가 2501호 멤버인 이상 부득불 부딪히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 뻔히 알면서.

16558034832949.jpg“아니.”

그럼에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16558034832954.jpg“그럼요?”

16558034832949.jpg“그냥 하던 대로 해.”

말 따로 표정 따로, 윤완의 얼굴에 작게 불만이 피어났다. 그때였다. 나린이 윤완의 재킷을 슬쩍 잡아당겼다. 불의의 일격에 그의 몸이 기울어지고, 나린은 재빨리 그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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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034832954.jpg“그럼 앞으로 만날 일 있을 때마다 이렇게 해 줄게요.”

윤완의 시야가 온통 싱그러운 미소로 물든다. 3월 초. 봄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16558034832954.jpg“들어가요. 집에 안 가고 싶어졌어요. 같이 놀다가 부사장님이랑 같이 갈래요.”

나린은 윤완의 손을 잡아끌었다. 윤완은 나린이 잡아끄는 대로 타발타발 이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작은 손이 데려가는 곳이라면 세상 어디라도 함께 가주고픈 마음이었으니까. *** 나린과 윤완이 볼룸으로 들어간 뒤. 두 사람이 있던 곳과 직각을 이루는 모퉁이 뒤편 사각지대에서 혜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눈은 금방이라도 피를 뿜어댈 것처럼 짙붉게 물들어 있었다.

16558034861262.png‘저게 도윤완이라니.’

도윤완이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그토록 오랜 시간 갈구해왔건만 단 한 터럭도 끄집어낼 수 없었던 모습. 사랑에 빠진 도윤완의 모습. 도윤완과 사랑이 공존 가능한 표현이었다는 건 인정하기 싫은,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혜원의 마음이 압축기에 눌린 것처럼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기억상실증에 걸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든 방금 들은 대화를 잊을 방법을……. 절망과 분노를 다스릴 길 없는 혜원은 어디 분풀이할 거리가 없나 뇌를 풀가동시켰다. 그러나 윤완의 전화 경고와 재희가 보복을 당한 일이 날뛰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윤완뿐 아니라 연태용 회장, 채윤희 여사, 세훈까지. 나린을 둘러싼 방어막은 촘촘하기도 했다.

16558034861262.png‘제발 윤재오가 쓸 만한 걸 건져와야 하는데.’

살면서 무언가를 이토록 간절히 바라본 것도 처음이었다. *** 겨울의 운치가 사라진 초봄의 정원은 막 돋아나는 새싹들로 파릇파릇했다. 흐뭇한 표정을 한 도문형 회장이 겨우내 벗이 되어주었던 소나무 기둥을 힘차게 쓰다듬었다.

16558034878358.jpg“회장님. 테라 호텔 연태용 회장님과의 약속 시간 5분 남았습니다.”

16558034878358.jpg“벌써 그렇게 됐나? 나이가 드니 시간 개념도 없어지는구먼.”

비서의 일정 보고에 도 회장은 껄껄 웃으며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로 들어선 지 오래지 않아 연태용 회장이 도착했다. 외출할 때면 꼭 지팡이에 의지하는 연 회장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차에 두고 내렸다. 한때 재계를 주름잡던 상대를 만나러 오면서 꼿꼿하게 세워 본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16558034878368.png“오랜만입니다, 도 회장님.”

16558034878358.jpg“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연 회장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을 만끽 중인 도문형 회장은 연태용 회장의 손을 맞잡으며 반색을 했다.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1세대 총수들의 시대가 저문 지 오래. 과거의 영광을 함께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한 동지애를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세대에서는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반갑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착석했다.

16558034878368.png“잘 지내셨습니까. 갑자기 이렇게 뵙자고 해서 송구합니다.”

16558034878358.jpg“아닙니다. 무료했는데 먼길 와주시니 제가 감사하지요. 허허.”

가정부가 차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도 회장과 연 회장은 주변이 빌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16558034878368.png“오면서 보니 정원이 참 멋있더군요. 저도 슬슬 은퇴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웬만한 건 다 자식 놈한테 넘기긴 했는데, 영 안심이 안 돼서.”

둘만 남게 되자 연 회장이 너스레를 떨며 찻잔을 들었다.

16558034878358.jpg“허허. 좋지요. 다 넘겨주고 보니 아주 편합디다. 연주환 부회장, 수완이 아주 좋던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세훈이도 우리 윤완이 놈 덕에 몇 번 봤는데 똘똘해 뵈고, 걱정 없으시겠던데요.”

16558034878368.png“과찬이십니다. 도일현 부회장이나 도윤완 부사장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칩니다. 허허.”

통과 의례처럼 자식과 손자 칭찬이 훈훈하게 오갔다. 이윽고 연 회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16558034878368.png“도 회장님.”

16558034878358.jpg“예.”

도 회장은 여유로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는 이미 연 회장이 찾아온 이유를 간파하고 있었다. 드높은 담장 안에서도 세상을 전부 내다보고 있는 그였다.

16558034878368.png“오늘 찾아온 건 삼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16558034878358.jpg“아이고. 뭐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인생의 7할이 넘게 봐온 사이에 못 할 말이 무에 있겠습니까? 허허허.”

다 알고도 모른 척을 한 건 연 회장이 빈손으로 왔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16558034878358.jpg‘뭔가를 가져왔겠지. 내가 솔깃할 만한 무언가를.’

그 무언가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무지렁이의 가면을 쓰기로 했다.

16558034878368.png“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인연이 또 어떻게 되려고 제 손녀딸이 윤완이랑 만나는 사이인가 봅니다.”

16558034878358.jpg“허허. 그래요? 저는 처음 듣습니다만. 뭐, 젊은 애들끼리 만날 수도 있지요. 만났다 헤어졌다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시치미를 딱 잡아떼다니. 역시 도 회장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에돌아 봐야 다 늙은 처지에 애꿎게 기력만 소진할 뿐이라고 생각한 연 회장은 거침없이 입을 놀렸다.

16558034878368.png“툭 까놓고 말씀드리지요. 압니다, 저도. 제 손녀딸 아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요.”

16558034878358.jpg“아이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우리 윤완이야말로 많이 부족하지요.”

도 회장은 계속해서 사람 좋은 말투를 하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연 회장은 더 이상 하하호호 하지 않기로 했다.

16558034878368.png“도 회장님.”

16558034878358.jpg“예.”

16558034878368.png“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윤완이 녀석을 제 손자사위로 삼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연 회장이 이렇게까지 돌직구를 던질 줄 몰랐던 도 회장은 크게 한 번 헛기침을 했다.

16558034878358.jpg“어험. 윤완이 혼사야 우리 며느리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습니다, 그려.”

그러나 연 회장은 예의 하는 말 따위 관심조차 없었다.

16558034878368.png“우리 나린이 결혼 전에, 그 애 앞으로 큰 선물을 하나 해 주려고 합니다. 그동안 저희 집안에서 키우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는 의미에서요.”

16558034878358.jpg“…….”

16558034878368.png“그 애 명의로 땅을 하나 줄까 합니다만.”

16558034878358.jpg“…….”

16558034878368.png“옛날 우리 테라 호텔 본사가 있던 삼성동 부지.”

16558034878358.jpg“…….”

16558034878368.png“그거면 되겠습니까?”

연 회장을 만난 이래 한 번도 웃음기가 걷히지 않았던 도 회장의 안색이 돌변했다. 저 땅이 어떤 땅인가. 그가 그토록 되찾고 싶어 했던 땅이 아닌가. 저 땅은 본시 도 회장 소유의 땅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도일 그룹의 시초인 도일 공업 본사가 세워졌던 곳. 도 회장이 도일 그룹을 태동시킨 곳. 도 회장은 50여 년 전 도일 공업에 찾아온 일시적 자금난을 타개할 목적으로 사유 재산이었던 이 땅을 연 회장에게 팔아치웠다. 후에 도일 전자를 국내 1위 기업에 올려놓은 뒤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되팔 것을 요구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이미 테라 호텔 본사 부지로 제공 중이라는 게 표면상 든 이유였지만 노른자 땅을 되돌려 주기가 아까웠던 것이다.

16558034878358.jpg‘그런데 그 땅을 내어놓겠다고?’

도일 그룹의 뿌리를 되찾고 싶어 했던 도 회장에게는 매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16558034878358.jpg“그러니까 삼성동 땅을 손녀에게 물려줄 테니, 땅이 탐나면 애들을 결혼시켜라, 이 말씀이신 겁니까?”

16558034878368.png“허허. 말씀을 뭘 또 그렇게까지. 그냥 손녀딸이 그 댁 며느리가 되면 성의를 표시할 생각이 있으니 참고하시라는 거지요.”

도 회장은 일단 떠름한 척을 했다.

16558034878358.jpg“그래 봤자 그 땅은 연 씨 집안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탐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속내를 풀쑥 드러내고 말았다.

16558034878368.png“제 손녀딸이 그 집 사람이 되면 결국에는 도 씨 집안 자식 게 되겠지요.”

이것도 맞는 말이다.

16558034878358.jpg“흠.”

또 한 번 크게 헛기침을 한 도 회장은 머릿속에 장착된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테라 호텔 손녀는 혼외자라는 신분만 제외하면 사실상 흠잡을 데 없는 조건이었다. 연 회장이 저렇게까지 위하는 것을 보니 추후 재산 분배에도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전에 비서를 시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윤완도 테라 호텔 손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헤어지게 만드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교제를 반대하는 부모님의 뒷목을 잡게 했을 정도라고 하니 알 만한 일이었다.

16558034878358.jpg‘유일한 리스크는 연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챙겨줄 배경이 없다는 건데…….’

연주환 부회장이 욕심을 부리면 무일푼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연 회장은 도 회장의 시커먼 속내가 열 길 물속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16558034878368.png“그 애 앞으로 돌려줄 재산 목록은 이미 유언장에 박아 두었습니다. 주식 일부도 그 애 앞으로 해 주라고 아들놈한테 지시했고요. 원하시면 내역을 정리해서 비밀리에 공유드릴 수도 있습니다.”

도 회장의 얼굴에 웃음기가 되살아났다.

16558034878358.jpg“아닙니다. 그런 것까지 바랄 순 없지요. 허허. 일단은 저도 오늘 처음 들은 얘기라 상황 파악이 좀 필요합니다.”

16558034878368.png“…….”

16558034878358.jpg“우리 윤완이 의사도 확인해 봐야 하고……. 이 문제는 제가 우리 며늘아기와 의논을 해보지요.”

16558034878368.png“…….”

16558034878358.jpg“빠른 시일 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도 회장이 양쪽 입 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 마지막 미소에, 연 회장은 제 협상 카드가 결국 통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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