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약혼 파티에서2021.11.23.
준우의 약혼식 날. 애프터 파티 시간에 맞춰 세훈이 먼저 파트너를 픽업하러 떠났다. 나린은 혼자서 덩그마니 윤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윤완이 있으니 채 여사가 배정해준 비서는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나린아.”
식사시간이 아니고서는 웬만해선 침실과 서재를 떠나지 않는 태용이 거실로 나왔다.
“네, 할아버지.”
태용은 어여쁜 손녀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세리의 부티크에서 맞춘 보라색 드레스가 깔끔하고 우아하게 잘 어울렸다.
“예쁘구나.”
“감사합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누르며 나린이 대답했다. 전시회장에서 윤완과 공개적으로 포옹한 일을 마침내 지금, 추궁당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윤완이 기다리는 게냐?”
상석을 두고 나린 곁에 다가앉은 태용이 물었다. 윤완의 이름이 나오자 나린의 주먹이 꼭 쥐어졌다.
“네.”
“그놈이 그리 좋으냐.”
질문을 건네는 태용의 얼굴엔 다행히도 못마땅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나린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아무리 그래도 놈이라니.
“네.”
쑥스럽지만 나린은 마음을 명확하게 전달했다.
“결혼할 생각도 있고?”
이 질문에는 답을 주저했다. 결혼.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결혼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선뜻 대답할 수가 없어……. 이 세계에서의 결혼은 나린의 상식을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언젠가 채 여사가 말한 ‘도일 그룹 안주인 자리’라는 무거운 짐을 그리 간단히 짊어질 수는 없었다.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허면 만나다가 헤어질 작정이냐.”
헤어질 거냐는 말에 나린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픽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온다.
‘뭘 어쩌자는 거니, 너.’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에 애꿎은 시선만 곤두박질쳤다. 나린의 두려움을 헤아린 태용은 사랑스러운 손녀딸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래도 많이 좋아하는 것만큼은 분명하구나.’
윤완도 나린도, 서로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주고 있다는 확인된 사실.
‘그렇다면 나도 아까울 게 없어야지.’
며칠을 고심해 마련한 협상 카드를 수면 위에 올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 남모르게 세운 태용의 결심이 더욱 공고해졌다.
*** 애프터 파티가 열리는 테라 호텔 앞. 차에서 내리기 전 윤완이 나린과 눈을 맞추었다.
“준비됐어?”
“무슨 준비요?”
“나랑 손잡고 저 안으로 들어갈 준비.”
‘이게 준비까지 필요한 일이에요?’
차마 되묻지 못한 질문과 함께 손에 땀이 쥐어졌다. 윤완이 미리 당부할 정도면 긴장해야 하는 일인 것만은 분명한데……. 윤완이 가만히 나린의 손을 붙잡았다. 오늘따라 더 눈부신, 애틋한 나의 연인. 하얀색만 잘 어울리는 줄 알았더니 보라색도 못지않게 예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귀에서 달랑거리는 다이아몬드보다도 깨끗하고 투명했다. 예쁘게 단장한 매무새를 흐트러뜨릴 수 없어서 그는 시선으로만 그녀를 쓰다듬었다.
‘준비됐어?’
이건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연나린. 내가 네 손을 잡고 이곳에 입장하는 순간, 나는 내 부모님과 이 세계에 선포하는 거야. 내 옆자리는 평생 네 거라고…….
“가자.”
윤완의 말이 밖에까지 들리기라도 한 듯 도어맨이 타이밍 좋게 문을 열어줬다. 먼저 내린 윤완이 뒤이어 내린 나린의 손을 다정히 붙잡아주었다. 두 손을 꼭 맞잡은 채로 두 사람은 2층에 위치한 볼룸으로 올라갔다. 소문만 무성하던 연인의 등장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밀착했다. 숙덕대기 딱 좋은 인원수와 딱 알맞은 거리로. 정말이었네. 정말 도윤완 부사장이 대놓고 연애를 하네. 그것도 테라 호텔 혼외자랑. 두 사람에게 날아드는 눈빛은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었다. 대놓고 수군대는 사람들을 본 나린이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윤완은 별 동요가 없었다. 그는 곧장 파티의 주인공인 준우 커플에게로 향했다.
“축하한다.”
“고맙다.”
사전에 합을 맞춘 것처럼 담백한 악수가 오갔다.
“축하해요, 준우 오빠.”
나린도 옆에서 축하 인사를 건넨다.
“와줘서 고마워, 나린아.”
말끝은 준우를 향하면서도 눈은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는 약혼녀에게로 끌려갔다. 지적이고 단아한 인상의 소유자. 준우와 결이 비슷한 사람처럼도 보였다.
“안녕하세요, 차은영이에요.”
“안녕하세요. 연나린이라고 합니다.”
“도 부사장님은 전에 한 번 뵀는데, 나린 씨는 오늘 처음 보네요.”
은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빡빡한 행사 스케줄이 버거웠는지 조금 지친 것 같았다. 금세 다른 하객들이 와서 준우와 은영을 채가고 상대를 잃은 나린은 우왕좌왕했다. 나린을 데리고 반대편으로 이동한 윤완은 지인들을 찾아 한 명, 한 명 나린에게 소개를 해주었다. 그 모습을 아닌 척 계속 눈으로 좇고 있는 짙은 마스카라의 주인, 혜원은 차오르는 절망 속에서 보이지 않게 몸부림쳤다.
‘뭐 하는 거야. 정말 저 애랑 결혼이라도 할 셈이야? 제정신 맞아?’
어떻게 도일 그룹의 차기 안주인 자리를 혼외자에게 내줄 생각을 해…….
“표정 풀어. 차인 거 다 티나.”
어느 틈엔가 바짝 붙어선 재오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어떻게 되어 가? 내가 부탁한 거.”
보따리를 맡겨뒀으니 당장 내놓으라는 으름장이 막무가내로 이어졌다. 그녀가 재오에게 관심을 둘 이유라고는 오직 이것뿐이었다.
“아직 알아보는 중이야.”
“좀 서두를 수 없어?”
이제 혜원은 대놓고 나린을 쏘아보았다. 질투하고 있다는 걸 들켜도 상관없다는 듯이.
“부탁한 지 이주밖에 안 됐거든. 주변 인물들 수소문하는 데만 한참 걸려.”
“…….”
나린에게 들러붙은 혜원의 시선이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흙처럼 질척이는 미련을 들키기 십상이었다 혜원의 초라한 모습을 저만 아는 것으로 남겨두고 싶은 재오가 몸을 틀어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네가 말한 대로 투 트랙으로 파보는 중이야. 연나린의 과거 연애사랑 친모 쪽 사연.”
“뭐가 됐든 서둘러줘. 하루빨리 저 꼴 좀 안 보게.”
나린을 향한 윤완의 다정함을 목격한 이후 혜원은 제대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의 약혼을 기다리면서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것. 그럼에도 손에 쥘 수 없는 신기루였던 것. 살면서 한 번도 원하는 걸 빼앗겨 본 적 없는 혜원이기에 저는 단 한순간도 가질 수 없었던 걸 다른 누군가가 가졌다는 사실은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고작 저 보잘것없고 촌스러운 여자라니. 조급해하는 혜원의 곁에서 재오는 여유만만한 얼굴을 했다. 도도함이 무너진 혜원을 지켜보는 건 의외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도 혜원이 소원이라는데 들어는 줘야지.’
도윤완에게 소중한 걸 망가뜨리고도 싶고. 연다현이랑 닮은 저 애가 무너지는 걸 보면 내 묵은 감정도 좀 풀릴 것 같고. 일석이조를 넘어 일석삼조를 꿈꾸는 재오의 얼굴엔 야비함이 흘러넘쳤다. *** 사업 파트너를 만난 윤완의 대화가 길어진다. 알아듣기 힘든 지루한 얘기에 나린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 자리를 벗어났다. 제법 거리가 있는 테이블의 빈 좌석을 찾아 탈싹 주저앉는다. 너무 오래 서 있었더니 발이 아팠다. 하이힐과는 친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갑작스레 던져진 인사말에 나린이 휙 돌아본다. 테이블에는 또래로 보이는 세 명의 여성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런 인맥 쌓기는 별로 환영하지 않지만, 하릴없이 답례를 해주었다.
“테라 호텔 손녀분이시죠?”
“네.”
윤완의 손에 붙들려 입장한 이상 이 연회장에서 나린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린은 세훈의 생일 파티에서 만나고도 몰라보는 실례를 범할까 조심스러워 말수를 줄였다. 나린의 신분을 확인한 그녀들은 의뭉스러운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 눈빛이 불손하다고 생각되던 그때,
“도일 전자 다닌다고 들었는데……. 왜 테라 호텔이 아니라 도일 전자에 들어갔어요?”
오지랖 넓은 질문이 푹 찌르고 들었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어감을 눈치챈 나린은 형식적인 미소로 대답을 갈음했다. 도일 전자에 입사한 건 혼신을 다한 노력의 결과물이었지만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저들은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테라 호텔 손녀가 도일 전자 평사원이고 그 와중에 도윤완 부사장이랑 사귄다? 상상이 나래를 펼쳐 훨훨 날기 딱 좋은 설정이었다. 나린이 입을 다물자 그녀들은 또 한 번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것 봐. 대답 못 하네. 역시 뭔가 있어. 그 눈이 하는 말들을 전부 알아들을 것만 같았다. 다시 한번 오만한 눈초리가 나린을 찔렀다.
“도 부사장님이랑은 언제부터 사귀었어요? 회사에서 처음 만난 거예요?”
“…….”
“아, 비밀이려나.”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과 반말마저 섞인 무례함이 황당한 나린은 말을 잃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밤새 후회할 것 같아서 한마디 쏘아주기로 한다.
‘처음 보는 사이에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요?’
입술을 들썩이는데 그에 앞서 누군가 훅 순서를 가로채 갔다.
“다들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네요. 되게 한가한가 보다.”
나린은 소리가 난 쪽을 올려다봤다. 그곳엔 부드러운 미소 속에 경멸을 숨긴 태준이 서 있었다. 나린 혼자 있을 땐 잘만 떠들어대던 세 여자가 태준의 등장에 합죽이가 되었다.
“옆에 자리 없으면 앉아도 될까요, 나린 씨?”
태준은 나린을 향해 정중히 물었다.
“네.”
자리에 앉은 태준이 맞은편 여자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셋 중 가운데에 앉은 여자였다.
“오랜만이네요, 소영 씨.”
“아, 네. 오랜만이에요.”
소영은 어딘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누구야?”
양옆에서 친구들이 팔을 찔러댔다.
“아, 그게…….”
쉬이 말할 수 없는 관계.
“선봤었어요, 전에.”
그럼에도 태준은 옷에 붙은 먼지를 떼듯 가볍게 털어냈다. 이미 취기가 오른 그는 평소와 달리 매우 공격적이었다.
“아, 그 신화 화학…….”
잘 되기도 전에 입방정을 떨었던 모양인지, 친구들은 곧바로 태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태준은 지나가는 웨이터에게서 샴페인 잔을 건네받아 나린의 앞에 놔주었다.
“이거 마셔볼래요? 왠지 나린 씨가 좋아할 것 같은데.”
“아, 고마워요.”
저를 대할 때와는 극명한 온도 차를 보이는 태준의 태도에 소영은 마음이 상했다. 선을 본 후 애프터 신청을 기다리다 못해 먼저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장조차 받지 못했던 기억이 서럽게 다가온다.
“아까부터 인사하고 싶었는데, 윤완이 눈치 보느라……. 오늘 정말 예쁘네요, 나린 씨.”
태준답지 않은 직설 화법에 나린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땐 교과서 같은 답변만 한 게 없었다. 영혼은 좀 없어 보일지라도. 그때 등 뒤에서 오싹한 한기가 흐르고,
“여기서 뭐 해?”
들려오는 목소리마저 한기로 꽉꽉 채워져 있다.
‘돌아볼 것도 없이 도윤완이겠지.’
올 게 왔다는 듯 태준이 씩 미소를 그려냈다.
“아, 부사장님.”
나린이 엉거주춤 일어나자 윤완이 나린의 손을 붙들었다. 동시에 태준에게는 경계하는 눈빛이 날아들었다.
‘접근하지 마.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아.’
그의 눈이 말하고 있는 것. ……태준도 결코 모르지 않는 것. 나린을 데리고 멀어지는 윤완을 보며 태준이 쓰게 웃었다. 나린이 마시다 만 샴페인 잔을 쥔 그가 한 모금 크게 들이켠다. 그런 뒤 소영을 쳐다봤다.
“소영 씨.”
“네?”
소영은 자세를 단정히 고쳐 앉았다. 딱 취향 저격인 태준의 미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시간은 좀 흘렀지만 지난번에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답을 지금 해도 괜찮을까요?”
부드러운 미소가 이어지자 소영의 얼굴에 설마 하는 기대감이 스쳤다.
“네, 말씀하세요.”
그녀는 감감 모르고 있었다. 저 햇살 같은 얼굴 뒤에 감추어 놓은 잔인함이 있다는 것을.
“저는 그날 소영 씨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
그도 어찌 됐건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오늘 보니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눈앞에서 날아온 독화살을 맞은 소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친구들 앞에서 이런 망신살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정작 망신을 안긴 장본인 태준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남은 샴페인을 전부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