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귀여워서2021.11.19.
[너 생일에도 못 오는 거지?]
폰을 통해 전달되는 수정의 음성엔 군데군데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응.”
어느덧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나린의 생일. 올해는 외삼촌이 사 오는 케이크도, 외숙모가 끓여주는 미역국도 먹을 수 없겠구나.
[그래. 이젠 강나린이 아니라 연나린인데, 우리 엄만 뭐가 그렇게 애가 터지는지 모르겠어.]
이 푸념이 오롯이 저를 향한 애정 때문이란 걸 잘 아는 나린은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외숙모한테는 따로 전화 드릴게.”
[꼭 그렇게 해. 엄마는 네 얘기만 나오면 울먹울먹하신단 말이야.]
“알겠어.”
그 깊은 모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린이기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낳지 않고도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이 바로 외숙모였다.
[참, 그 이태준 씨랑은 어떻게 됐어?]
그러고 보니 수정이한테 업데이트를 안 해줬네.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끝났어.”
[정말? 결국 그 좋아하는 여자한테 간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됐어. 나도 다른 사람 생겼고.”
[뭐?!]
“얘기가 길어.”
[길든 어떻든 해봐. 아니다, 만나자. 밖에서 잠깐 만나는 건 되잖아?]
“내일 저녁에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같이 볼래?”
부사장님 의견은 아직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어머, 좋지.]
“물어보고 알려줄게, 그럼.”
늘 갑의 연애를 하는 수정은 굳이 허락을 받아야 하나 싶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이건 핵심이 아니니까.
[알겠어. 이따 또 연락해.]
“응.”
오늘, 별채 지하실에서 밴드 연습이 있을 거라고 들었다. 이왕 허락받을 거면 얼굴을 보고 하는 게 낫겠지.
‘……드럼 치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한 번 점검한 나린은 외투를 집어 들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 문을 밀어 살짝 틈을 벌리고 연습실 안 상황을 정찰한다. 연주 중인 음악은 귀엔 익지만 제목은 떠오르지 않는 고전적이고 오래된 팝송이었다. 나린의 눈이 드럼을 두드리고 있는 윤완에게 정착했다. 자석처럼 어쩔 수 없이 이끌려갔다.
음악에 맞춰 까딱 까딱거리는 고갯짓. 위아래로 부드럽게 바운스를 타는 상체. 리듬을 타는 몸짓이 거친 듯하면서도 한없이 우아했다. 스틱을 쥐고 드럼을 내리치는 팔뚝에 굵은 힘줄이 선명하다.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걷어 올린 셔츠 소매 덕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록 음악과 도윤완 부사장님이라니. 안 맞을 것 같은데 묘하게 잘 어울리는 조합의 색다름은 나린의 가슴을 콩콩 뛰게 했다. 넋을 놓고 구경하는 사이 연주가 끝났다. 나린은 음악이 끊기는 찰나를 포착해 문을 좀 더 열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어? 나린아.”
세훈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저 여기 앉아서 구경해도 돼요?”
눈에 띈 김에 그에게 허락을 구했다. 윤완에게 묻는 건 왠지 쑥스러우니까.
“당연히 되지. 반대하는 사람?”
“난 좋아.”
준우의 승낙 이후,
“나도.”
태준이 따스하게 웃는다. 두 곡 더 합주를 마친 네 남자는 악기를 정리하고 나린이 있는 쪽으로 왔다. 나린은 옆에 구비되어 있는 생수병을 집어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윤완이 만나러 온 거지?”
뚜껑을 딴 생수병을 다시 나린에게 내밀며 세훈이 물었다.
“네.”
“왜 그새 보고 싶었어?”
세훈이 짓궂게 놀리자 나린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런 게 아니라, 할 말이 생겨서…….”
“할 말?”
사촌 남매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던 윤완이 물었다.
“네. 내일 저녁에 한 사람 더 초대해도 될까 해서요?”
“누구?”
“수정이라고, 외사촌이에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나린을 키워줬던 외삼촌 댁에 동갑내기 사촌이 있다고.
“그럼 내일은 그 사촌이랑 만나고, 우린 다음에 봐.”
윤완은 단칼에 거절했다. 사람 만날 약속이라면 차고 넘치기에 불필요한 만남은 철저히 기피하는 그였다.
“야, 그러면 나린이가 뭐가 되냐? 딱 봐도 너 소개해주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세훈이 나린 편에 서서 윤완을 비난하고 태준은 문득 그를 골려주고 싶어졌다.
“그럼 내일 저랑 셋이 볼까요?”
태준답지 않은 약은 생각이었지만 약혼할 여자를 빼앗아 갔으니 이 정도 작은 복수는 애교라고 생각했다. 전쟁 선포와도 같은 태준의 발언에 준우와 세훈이 긴장한다. 예상대로 윤완의 얼굴이 욱여졌다.
“네……?”
당황스럽기는 나린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내일 저녁 약속 없거든요.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요. 수정 씨도 오랜만에 보고 싶고…….”
“아, 그게…….”
“너 만난 적 있어?”
준우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응. 그땐 그냥 친구 사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들었어. 사촌이라고. 엄청 발랄하고 활기찬 성격이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죠, 나린 씨?”
“네, 맞아요.”
“조잘조잘 말도 잘하고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내일은 남자친구를 보여주기로 한 날인데……. 그렇다고 애써 제안해줬는데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린이 난처해하는데, 윤완이 태준과 나린 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태준을 등진 윤완의 얼굴이 매섭게 나린을 직시한다.
“내일 그냥 예정대로 만나.”
“네……?”
“친구인지 사촌인지, 같이 보자고.”
“아, 네.”
윤완의 등 뒤에서 세훈과 준우, 태준이 번갈아 시선을 부닥치며 웃음을 참았다. 꼭 초등학교 때의 도윤완 어린이를 다시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 밴드 연습이 끝난 뒤 모두가 떠나고, 연습실에는 윤완과 나린만 남겨졌다.
“내일 저녁 약속 취소해도 괜찮아요.”
나린은 윤완을 배려해서 말했다.
“…….”
“제가 너무 일방적이었어요. 수정이한텐 잘 설명할게요.”
“그럴 거 없어.”
“그렇지만…….”
윤완은 어딘가 심통이 나 보였다. 왜? 수정일 만나는 게 그렇게 싫으면 취소하면 될걸…….
“태준이랑은 언제 만난 건데?”
윤완은 새삼스레 태준과 수정이 만난 일을 들추었다. 이게 왜 궁금한 건지 의아했지만 나린은 기억을 되짚어 성실히 대답을 해주었다.
“예전에요. 태준 씨랑 선보고 얼마 안 됐을 때…….”
그러고 보니 엘리베이터 사고 후 부사장님이 특별 휴가를 줬던 날이었네. 이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는다.
“약혼할 사람이라서 소개해준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수정이가 궁금하다고 해서요. 너무 졸라서 하는 수 없이 데리고 갔어요. 태준 씨도 허락해줬고요.”
이토록 삐딱한 그는 오랜만이었다.
‘왜 이렇게 까칠한 거지? 혹시 질투……하는 건가.’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가 곧 헛된 생각이라며 도리도리 털어냈다. 말도 안 돼. 질투를 왜 하겠어. 세상에 아쉬울 게 없는 부사장님이.
“질투하는 거예요?”
그래도 확인은 해보고 싶어서 그의 턱밑으로 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까이서 눈을 맞추면 거짓말은 못 하겠지. 불시에 다가온 연인의 사랑스러움에 윤완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는다. 정말 질투라고……? 고작 사촌을 소개해준 걸로……? 처음으로 윤완이 귀엽게 보였다. 항상 근사하고 고고하기만 했던 그가 여느 남자와 다를 바 없게 보이는 순간. 바짝 다가간 김에 나린은 윤완의 입술에 쪽, 짧은 입맞춤을 했다.
“무슨 짓이야.”
“귀여워서요.”
나린이 다시 거리를 벌리려는데 윤완의 손이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맨다.
“왜요……?”
“귀여워서.”
“네?”
눈 깜짝할 사이, 순간이동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나린의 몸이 윤완의 무릎 위로 옮겨졌다. 그러고 보면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완벽한 방음 시설을 자랑하는 연습실이었다.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곳도 없었다. 깨달음과 동시에 윤완의 팔이 나린의 허리에 감긴다.
“잠깐만요.”
“먼저 도발했을 땐,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윤완의 손이 나린의 얼굴을 그의 얼굴 가까이로 당겨왔다.
“부사…….”
슬쩍 가한 힘에 나린의 고개가 틀어지며 두 입술이 겹쳐졌다. 윤완의 가슴을 짚은 나린의 손바닥이 꽉 오므려지고. 윤완은 나린을 제 몸 안에 집어넣을 기세로 계속해서 가까이 끌어당겼다. 텅 빈 머리는 단지 서로의 존재만을 인식할 뿐. 쭉 뻗은 윤완의 손이 벽을 더듬자,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꺼졌다. 암전된 세상 속 일제히 깨어난 감각들이 오로지 그이고 온통 그녀인 시간을 아스라이 좇아 달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드럼을 두드리던 윤완의 손이 강약을 바꾸어 부드럽게 움직인다. 꼭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어두운 고요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두 사람의 숨소리가 조금씩 흐트러져 갔다. *** 준우의 약혼식 전날은 공교롭게도 다현의 생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상에도 집안 분위기는 어딘지 무겁기만 했다. 나린은 하루 종일 방에 콕 틀어박혀 지냈다.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더 있는 듯 없는 듯 보낼 작정이었다. 언니를 슬프게 했을 혼외자. 언니와 닮은 눈을 가진 배다른 동생. 어느 입장에서건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훈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애들 만나러 갈 건데 너도 가자.”
애들? 부사장님은 오늘 회사 일로 바쁘다고 했는데. 그래도 고분고분 세훈의 제안에 응했다. 가보면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임 장소는 고전과도 같은 테라 호텔 2501호. 룸 안으로 들어서자 태준과 준우가 기다리고 있다. 바쁜 윤완을 제외하고 모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서 와요, 나린 씨.”
태준이 스스럼없이 나린을 반겨주었다. 가벼운 고개 인사로 답한 나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 케이크에 머물렀다.
“웬 케이크예요?”
하고는 아차 싶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현이 생일 케이크.”
세훈이 옷장에 코트를 걸며 대답한다. 무심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나린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바보. 당연한 것을.
“다현이 생일, 매년 우리끼리 챙겼거든요. 윤완이처럼 바쁜 일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요.”
태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나린은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내가 언니를 추모하는 자리에 낄 자격이 있기는 한 걸까.
“고개 들어.”
나린의 마음을 눈치챈 준우가 명령한다. 명령을 따라 고개를 든 나린의 눈동자에 아련한 표정을 한 준우가 담겼다.
“지난번 세훈이 생일 파티 때도 말했지? 다현인 널 좋아했을 거라고.”
“…….”
“분명 그랬을 거야. 내가 보장해.”
독심술사라도 된 것처럼 확신에 찬 발언. 세상 어느 누구보다 다현을 가장 잘 아는 준우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렇게 기죽지 않아도 된다고. 다현이는 분명히 널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주었을 테니까.
“그리고…….”
꺼내기 힘든 말을 하려는지 준우의 표정이 일순 고통으로 들어찼다. 꿈틀대는 그의 얼굴 근육 하나하나가 나린의 시선을 꽉 붙들어 맸다.
“내년부터는 네가 이 자리를 지켜줬으면 해.”
“…….”
“나 대신.”
고통을 뚫고 새어 나온 준우의 읊조림에 세훈과 태준의 시선이 허공을 더듬었다.
‘나는 이제 새로운 사람 곁을 지켜야 하니까…….’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대신하듯 붉게 물든 눈을 보고 있자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거울처럼 나린의 눈도 새빨갛게 물들어 간다.
‘그래도 언니는 준우 오빠이길 바랄 텐데.’
누구보다 오빠를 사랑했을 언니는……. 비록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을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커플이었을지. 그게 될까요?
‘내가 준우 오빠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누구를 향하는 건지 모를 질문이 마음속을 두둥실 떠다녔다.
“제가요……?”
소리 낸 건 고작 이것뿐이었고,
“응.”
준우는 또 한 번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아픈 말들을 소리 낼 수 없어 두 사람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이, 세훈과 태준이 접시와 와인잔 세팅을 마쳤다. 다현의 생일을 축하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케이크를 가운데 두고 포도빛 잔을 부닥치는 게 전부였다. 이들에게 딱 들어맞는 군더더기 없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건배가 끝나자 네 사람은 말없이 와인을 들이켰다. 목만 축이는 둥 마는 둥한 나린은 잔을 내려놓고 세 남자의 얼굴을 차례로 관찰했다. 어느 한 사람 가심 없는 표정에 가슴이 한없이 서글퍼진다.
‘그랬구나.’
언니는 오빠들에게 저토록 소중한 존재였구나. 하늘은 왜 그렇게 빨리 언니를 데려가 버렸을까. 이렇게나 많은 이의 가슴을 멍들이면서……. 만나본 적 없는 동갑내기 언니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보고 싶어지는, 무척이나 서러운 하루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