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어떤 매력이 있길래2021.11.16.
방대한 양의 선물꾸러미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황당한 얼굴을 한 나린이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마지막 선물 상자까지 들여놓은 재희의 비서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PK 백화점 윤재희 부사장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일전의 실례를 사과하고 싶다며 받아달라고 하셨습니다.”
옆에 있던 세훈이 한마디 끼어들려는데 그에 앞서 먼발치서 관망하고 있던 채 여사가 나섰다.
“가지고 돌아가요.”
채 여사의 등판에 비서의 낯빛은 흙색이 되었다.
“사모님…….”
“안 들려요? 받을 생각 없으니 가지고 돌아가라고.”
비서가 도움을 청하듯 나린을 쳐다보았으나 나린은 이미 채 여사에게 상황을 일임한 뒤였다. 채 여사는 비서가 재희 본인이라도 되는 양 날카로운 시선을 주었다.
“윤재희 부사장한테 전해요. 사과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찾아와서 얼굴 맞대고 하는 거라고.”
채 여사의 눈짓에 세훈이 넙죽 나린을 붙잡아 2층으로 데려간다. 재희의 비서는 힘들게 들여놓은 선물을 다시 내가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린을 2층 서재로 데리고 온 세훈은 호탕하게 웃어댔다.
“하하. 우리 어머니 진짜 멋지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그랬다. 처음엔 마냥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채 여사만큼 우아하고 사리 분별이 뚜렷한 어른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 세훈 오빠.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나린은 세훈과 둘이 있게 된 틈을 타 조심스러운 질문을 꺼냈다. 세훈이 웃음을 그치고 나린을 내려다본다.
“뭔데?”
“준우 오빠 약혼식 말인데요.”
“어.”
“그거 제가 가도 되는 거예요?”
“응?”
질문을 이해 못 했는지 세훈의 고개가 비뚜름히 놓였다.
“그러니까, 준우 오빠는 다현 언니랑 약혼한 사이였고, 전 언니의 배다른 동생인데…….”
그제야 나린의 기우를 알아챈 세훈이 피식 웃었다. 맞다. 이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는 아이였지.
“괜찮아. 사이가 틀어져서 파혼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본식은 가족들끼리 할 거야. 우린 그 뒤에 애프터 파티만.”
“네…….”
“윤완이가 같이 가자고 한 거지?”
“네.”
점점 나린이의 입지를 굳혀 가려는 거구나. 도윤완의 옆자리, 그건 온전히 연나린 거라고. 하지만 그전에 제 부모님들부터 어떻게 해야 할 텐데. 평화가 유지되는 지금이 마치 폭풍전야처럼 느껴지는 세훈이었다. 당장이야 아들의 눈치를 보느라 잠자코 계신다지만, 두 사람이 결혼 선언이라도 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질 것이다. 충돌 직전의 강대강. 어떤 결과가 나든 저 미소만큼은 지켜졌으면 좋겠다. 언제부터인가 나린도 세훈에게 다현만큼이나 소중한 여동생이 되어 있었다.
“나린아.”
“네?”
“힘든 일 있으면 뭐든 다 말해야 한다. 혹시 윤완이한테 말 못 할 일이 생기면 나한테라도 꼭 말해줘. 알겠지?”
“네.”
“그래.”
세훈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윤완 없을 때나 이렇게 실컷 귀여워 해줘야지.’
세훈의 마음은 나린이 몰고 온 순수한 기운으로 금세 아릿해졌다. *** 이튿날, 결국 재희가 연 회장의 저택으로 찾아왔다. 꼬리를 내리고 얌전한 고양이가 되어 나린 앞에 넙죽 엎드린다.
“미안!”
“…….”
“그날 일, 정말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바닥과 평행으로 놓인 재희의 얼굴은 굴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흉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나린은 재희의 정수리에 곤란한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심은 한 톨도 느껴지지 않고 누가 시켜서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재희는 나린의 답을 듣기 전까진 몸을 일으킬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채 여사가 슬쩍 고갯짓을 했다. 너무 오래 저대로 내버려 두는 건 좋지 않다는 신호였다.
“괜찮아요.”
채 여사의 뜻을 이해한 나린이 마지못해 반응을 보이자 재희는 자세를 바로 했다.
“용서해주는 거예요?”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용서는요?”
재희의 태도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왜 이렇게 용서에 집착하는 것일까.
“미안하지만 용서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나린은 솔직하게 말했다.
“앞으로는 서로 예의를 지켰으면 합니다.”
재희는 예상보다 완강하게 나오는 나린이 못마땅했다. 굴러온 돌 주제에 저도 자존심이 있다, 이거야?
“나린 씨. 실은 나도 그날 혜원이한테 당한 거예요. 진짜로 원망해야 할 상대는 혜원이라고요.”
재희의 말투에 짜증이 섞였다.
“그날 일은 더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쨌든 오늘 사과하러 와줘서 고마워요. 안녕히 가세요.”
의견을 분명히 밝힌 나린은 다이닝룸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채 이사님. 나린 씨 좀 잘 설득해 주세요. 제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고·····.”
재희는 하릴없이 채 여사에게 매달렸다.
“글쎄. 우리 나린이 용서를 꼭 받아야 할 이유라도 있어요?”
“…….”
“도 부사장 귀에 들어가야 해서 그렇지? 우리 나린이가 용서했다고.”
분하지만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까 나린을 상대할 때보다는 마음이 한결 가뿐했다.
“도와주세요, 이사님.”
그러나 채 이사의 눈빛은 얼음장 같았다.
“내가 있는 데서 그런 짓을 벌여 놓고 내 도움을 구해요?”
“…….”
“저 애는 누가 뭐래도 우리 집안사람이에요. 우리가 거두었으면 그 출신이 어떻든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거지. 도일 그룹만 무섭고 테라 그룹은 우스운가 봐?”
채 이사라면 이해하고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재희는 당혹스러웠다.
“그, 그럴 리가요.”
저 혼외자를 진짜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었을 줄이야. 자기 남편의 혼외자가 아니니 상관없다 이건가.
“돌아가요. 윤 부사장 사정까지 봐줄 만큼 한가하지 않네.”
처음 보는 채 여사의 냉정함에 재희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무감정하기로 유명한 도윤완 부사장에 이어 콧대 높기로 소문난 채윤희 이사까지 모두 저 애를 싸고돈다. 대체 뭘까.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단시일에 저들을 사로잡은 것인지. 재희는 분에 찬 얼굴이 되어 나린이 사라져간 다이닝룸 입구를 째려보았다. ***
“부사장님이죠?”
윤완에게 살포시 기대어 있던 나린이 질문을 던지자, 기다란 손가락 사이사이 틈을 벌려 나린의 머리칼을 쓸던 윤완이 동작을 그쳤다.
“뭐가?”
나린은 윤완의 까만 눈동자를 금방이라도 헤집을 듯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어제 윤재희 씨가 사과하러 온 거요. 그거 부사장님이 한 거 아니에요?”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아이다. 그런 흑막까지는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용서해줬어?”
“아니요.”
“왜?”
“가짜 사과인 게 너무 눈에 보여서요.”
“…….”
팔을 뻗은 윤완이 나린을 가까이 당겨왔다. 마음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순순히 이끌려온 나린의 얼굴이 그의 왼쪽 가슴에 닿고, 저 아래 파묻혀 있던 그의 심장이 세차게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나린의 가느다란 두 팔이 포옥 윤완의 허리를 감았다. 부드러운 가슴이 빈틈없이 밀착되자 긴장이 돼서 윤완은 숨소리마저 조심하게 되었다. 이 앤 여기가 스위트룸이라는 걸 잊은 걸까.
“그래도 부사장님은 용서한 셈 쳐줬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직접 찾아와서 사과했으니까요.”
이렇게 하고 부탁을 하면 안 들어줄 수가 없잖아. 그게 뭐든.
“……알겠어.”
“고마워요.”
문 하나만 넘으면 침실이 있는 공간. 윤완의 손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당장이라도 안아 들고 목적지로 직행하고 싶은데 나린의 얼굴이 너무도 평온해 보여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너의 달콤한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경영수업 받기로 한 건 시작했어?”
침묵이 지속되면 본능이 제 목소리를 낼까 봐서 윤완은 아무거나 찾아 물었다.
“네. 아직 한 번밖에 안 했지만요.”
채 여사의 추진력은 거침이 없었다. 얘기가 나온 지 일주일도 안 되어 한국대 경영학과 교수와 그룹 비서실 직원이 강사로 섭외됐다.
“내가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윤완이 조금은 짓궂은 표정이 되어 말했다.
“부사장님은 회사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쁘잖아요.”
고개를 들어 올린 나린은 윤완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여전히 말캉한 가슴은 꽉, 그에게 붙인 채로. 말갛게 웃는 예쁜 얼굴을 보니 꾹꾹 눌러 담아두었던 그의 본능이 폭발했다. 한계였다. 불시에 허리를 비틀고 손을 내리자 나린의 어깨가 따라서 쑥 하강한다. 나린의 몸 전체가 소파 위로 기울어지며 순식간에 윤완의 두 팔 아래 놓이게 되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선생님은 없을걸.”
윤완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어리고. 돌발행동에 놀란 나린이 두 눈만 동그랗게 뜨는 사이, 열기를 실은 윤완의 입술이 한여름 뜨거운 직사광선처럼 떨어져 내렸다. *** 다음 날 윤완은 비서로부터 깜짝 전언을 받았다.
‘테라 호텔 연태용 회장님 측에서 뵀으면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할아버지로부터 온 연락. 세훈 때문에 몇 번 뵌 적 있는 고집스런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예전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완고함이 흘러넘쳤는데, 최근에 뵈었을 땐 많이 노쇠하고 유해진 모습이었다. 곧 프라이빗룸 문이 양쪽으로 젖히며 지팡이를 짚은 연태용 회장이 들어선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윤완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서렸다.
“좀 늦었군.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간략히 인사를 마친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윤완은 연 회장이 얘기를 시작할 때까지 반듯한 자세로 기다렸다.
“우리 나린이랑 만나는 중이라지?”
예상했던 주제가 연 회장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예.”
“이유가 뭔가.”
“어떤 이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앨 만나는 이유 말일세. 자네의 진의가 궁금하네. 우리 나린이에게 접근한 진의가.”
“접근한 적 없습니다.”
“…….”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도윤완의 입에서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너도 마음이라는 게 있는 놈이었구나.’
연 회장은 사람 만나는 데 이골이 난 자신이 누군가를 잘못 볼 수도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진심으로 그 애를 좋아한다, 이 말이냐?”
“예.”
“도 부회장 반응은?”
“…….”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라. 상황을 알아야 나도 대책을 세울 게 아니냐?”
적어도 연 회장은 이 만남을 반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도움을 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연 회장이 아군에 가깝다는 판단이 선 윤완은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을 전했다.
“만나는 것까진 괜찮지만 결혼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숨은 의도를 간파한 연 회장의 입매가 우글쭈글해졌다.
‘고얀 놈. 감히 내 손녀딸을 적당히 만나다 버리라는 소릴 해?’
“그래서 그럴 셈이냐.”
“아닙니다.”
“…….”
“회사를 떠나는 일이 있더라도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나린이가 동의했을 때의 얘기입니다.”
또 한 번 사람을 잘못 봤다. 도윤완이 도일 그룹을 버려. 그런 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애가 그렇게 좋으냐.”
“예.”
연 회장은 어딘지 서글픈 미소를 머금었다.
“나도 그렇다.”
“…….”
“그 앤 죽은 제 아비를 너무 많이 닮았어…….”
감정이 드러난 연 회장의 얼굴은 생소하기만 했다. 뜻밖의 반응에 윤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돌아가신 아드님이 그리워서……. 그런 단순한 이유로 나린이를 데려오신 건가.’
연 회장의 완고함이 꺾인 것도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다 키운 자식과 손녀를 잃어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족을 잃는 것 이상으로 개인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대형 사건은 없을 테니.
“나는 나린이를 지키고 싶다.”
“…….”
똑같은 목적을 가진 두 사람. 세대도, 성향도 다르지만 소중한 것은 하나.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협상을 할 생각이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애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 약속하겠느냐?”
“어떻게 협상하실 생각입니까.”
윤완이 물었다.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다.”
굳건한 연 회장의 눈빛을 읽은 윤완은 더욱 굳건한 눈빛으로 그 결단에 답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절대 그 앨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음을 다한 답변에 안심이 된다는 듯 연 회장의 입꼬리가 옆으로 기다랗게 늘어뜨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