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사과할 상대가 틀렸잖아2021.11.12.
M 호텔 이탈리안 레스토랑 다이닝룸. 재오는 혜원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올 거라는 걸 진작부터 예견하고 있었다.
‘도윤완이 연나린을 끌어안았다지? 그것도 네 이름을 건 전시회에서.’
톡 건드리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혜원을 앞에 두고 그가 소리 없이 빈정댔다. 처량한 오라를 한 여신. 이전까진 윤완을 욕하기 바빴는데 이젠 마음가짐이 변했다. 나락으로 떨어진 혜원의 모습이 고소하기만 하다. 도도하기 짝이 없던 혜원은 그동안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다. 이렇게 무주공산이 된 모습을 보니 흥미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으로 혜원과의 관계에서 갑의 위치를 점했다는 우월감이 그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왜 불렀어?”
‘거봐. 내 말이 맞았잖아. 도윤완이 그 애 좋아하는 거 맞잖아.’
“아주 신났네.”
혜원은 재오의 속을 꿰뚫어 보고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뭐 부정하진 않겠어.”
재오와의 자리를 길게 가져가고 싶지 않은 혜원은 바로 용건을 꺼냈다.
“나 좀 도와줘.”
“다짜고짜, 맨입으로?”
“원하는 게 뭔데?”
“지금 내려갈까?”
“무슨 소리야?”
“여기, 마침 호텔이잖아.”
“뭐?”
“왜? 이러려고 부른 거 아니었어?”
“……내가 미쳤지.”
혜원이 멸시하는 눈으로 쏘아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오가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인다.
“농담이야, 농담.”
“내가 지금 농담할 기분으로 보여?”
고작 그 천한 애 때문에 윤재오 앞에서 진땀 빼는 꼴이라니. 혜원의 눈자위 가득 붉은 실핏줄이 그어졌다.
“뭘 도와주면 되는데? 들어나 보자.”
“연나린.”
“연나린……? 테라 호텔 손녀?”
널 이렇게 만든 원흉?
“그 애에 대해 샅샅이 파헤쳐줘. 뭐든 약점이 될 만한 거.”
혜원은 바로 어제 윤완과의 전화통화를 떠올리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만나자는 그녀의 요구는 완벽히 묵살한 채, 모든 걸 걸고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한 시린 경고는 실내에 있는데도 가슴 가득 김이 서릴 지경이었다.
“내가 왜? 밑에 기자들 시켜. 창조 일보에 훌륭한 기자님들 많잖아.”
“아버지 귀에 안 들어가게 하고 싶어서 그래.”
“네가 도윤완 차버린 걸로 돼 있는데 신 회장님께서 아시면 자존심 상한다 이거냐?”
윤재오만큼이나 신혜원을 잘 아는 남자도 없다. 심중을 간파당한 혜원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
“대단하다, 너도 참.”
재오가 끌끌 혀를 찼다.
“오빠 이런 거 잘하잖아. 이런 쪽으로 빠삭한 사람이랑 연결돼 있는 걸로 아는데.”
“그래서? 도와주면 나한테 생기는 게 뭔데?”
“…….”
“그렇잖아. 나 같은 기업인이 소득 없는 일을 하면 쓰나.”
재오의 얼굴 위로 전시회장에서 나린을 괴롭히며 해죽이던 재희의 얼굴이 겹쳐졌다.
‘저 악마 같은 남매.’
분을 삼킨 혜원은 재오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마음이 식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혜원이 다가오자 재오는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넘겼다. 재오의 뒷덜미를 감아 안은 혜원은 그에게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감정 없이 기술만 남은, 그래서 더 아찔한 키스. 혜원이 떨어지고도 한참이나, 재오는 그 짜릿한 기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걸로 됐지?”
혼이 나간 웃음을 흘리는 재오를 향해 혜원이 묻고,
“……뭐, 건지는 대로 연락할게.”
재오가 고분고분 응답하였다.
“이왕이면 완전히 매장시킬 수 있는 건수면 좋겠어. 이 세계에서 다시는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게.”
“그럼 출신부터 캐야겠네.”
“그런 것도 좋고, 과거 남자관계 같은 것도 괜찮고.”
“오케이.”
재오의 엄지와 중지가 부딪히며 딱, 소리를 내었다. *** 윤완은 나린을 데리고 세리의 부티크를 찾았다. 두 사람이 사귄단 소문을 입수한 세리는 지난번보다 훨씬 과장된 말투로 수선을 떨어댔다.
“어머, 어서 오세요, 나린 씨.”
“안녕하세요.”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그날 우리가 통성명을 했던가. 인사를 해주면서도, 나린은 헷갈려했다.
“내가 부탁한 거.”
윤완의 암호에,
“기다려.”
세리가 응답한다.
“뭘 부탁했는데요?”
세리가 안으로 들어간 사이 나린이 윤완을 돌아봤다. 윤완이 묵묵부답인 가운데 부티크 직원 연주가 차를 내왔다. 나린으로선 처음 맡아보는 독특한 차향이었지만, 윤완은 거부감 없이 입에 가져다 댔다. 그의 취향인가 보았다.
“여기, 이 중에 어떤 디자인이 좋아요?”
다시 밖으로 나온 세리는 롱 드레스가 그려진 파일 몇 장을 테이블 위에 진열했다.
“이게 뭔데요?”
“어머, 도 부사장, 얘기 안 했어?”
세리가 윤완에게로 질문을 넘긴다.
“곧 준우 약혼식이잖아. 그때 입을 드레스 맞춰 주려고.”
“그걸 부사장님이 왜요? 그리고 저 옷 많아요.”
“그래도.”
“됐어요.”
나린이 세리를 돌아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근데 저 옷 안 맞출 거예요.”
밖으로 나가자며 나린이 윤완의 팔을 잡아끌자, 아옹다옹하는 연인이 귀엽다는 듯 세리가 픽 실소했다.
“둘이 합의되면 다시 불러.”
세리와 연주가 자리를 뜨고 윤완은 어정쩡히 일어선 나린을 다시 잡아다 앉혔다.
“그날, 나랑 같이 갈 거야.”
“어딜요?”
“준우 약혼식.”
“…….”
“그래서 파트너한테 예쁜 드레스를 선물하고 싶은 건데, 안 될까?”
나린의 얼굴을 보는 윤완의 눈동자는 애정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나린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그의 말을 따르는 게 좋겠다. 아직 파티, 파트너, 이런 것들에 하나도 익숙하지 않으니까.
“고마워.”
도리어 선물을 해주는 사람이 고맙다고 인사하는 아이러니. 윤완의 수신호에 자리로 돌아온 세리는 제 안목을 열심히 피력하여 하얀 코르사주가 포인트인 깔끔한 보라색 드레스를 관철시켰다.
“가봉하는 날 또 봐요.”
세리는 사랑스러운 연인을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처음 보는 눈빛, 태도. 모든 게 한 여자만을 향해 있는 그의 모습이 몹시도 낯설었다.
‘도윤완 부사장이 사랑을 한다는 소문이 정말이었구나.’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젊은 여사장의 얼굴에 왠지 모를 허탈한 미소가 떠올랐다. *** 도일 그룹에서 임직원 복지 카드 제휴처를 전면 재검토한다는 소식은 PK 백화점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Y 백화점이 물밑 접촉을 시도한 정황도 포착되었다고 하니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대형 고객을 날릴 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도일현 부회장과의 오랜 친분으로 PK 백화점과 도일 그룹 간의 다리 역할을 했던, 재오, 재희 남매의 아버지 철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재희는 이 모두가 제 헛발질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도윤완 부사장. 그가 나선 것임에 틀림없다. 목적은 그날 연나린에게 손을 댄 데에 대한 앙갚음일 거고. 이 사실이 큰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날엔 PK 백화점 부사장 직책이 위태로울 것이었다. 할머니 장 회장 때문에 억지로 재희, 재오 남매에게 임원직을 부여한 큰아버지는 호시탐탐 이 남매를 몰아낼 기회만 노렸다. 한시가 급하다. 하루빨리 모든 걸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 도일 그룹이랑 골프 약속 잡아주실 수 있으세요? 가급적이면 빨리, 이번 주 토요일에요.”
재희는 철균을 부추겼다.
“골프 약속?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일현을 만나는 거야 상관없지만 사정을 봐달라고 읍소하는 것까진 자신이 없었다. 도일 그룹의 실질적 총수 자리를 꿰찬 일현은 형에게 경영 주도권을 몽땅 내주고 숨죽인 채 살아가는 저와 급이 달라도 한참 달랐으니. 말 한번 잘못 꺼냈다간 오랜 친구 관계마저 끊어질지 모른다. 이 인맥마저 잃으면 집안에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었다.
“약속만 잡아주세요. 단, 도윤완 부사장은 무조건 와야 하고요. 그럼 나머진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재희는 아버지의 걱정을 눈치채고 다시금 보챘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거냐?”
“네. 저만 믿으세요.”
“알았다.”
철균의 고개가 위아래로 짧게 왕복했다. *** 윤완은 재희의 속셈을 다 알고도 골프 약속에 응했다. 라운딩을 끝마치고 아버지들끼리 한잔 기울이는 동안 재희와 윤완은 별도로 식사 자리를 가졌다. 모두가 재희의 안배에 따른 것이었다. 재희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몇 번 윤완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윤완이라면 무조건 날을 세웠던 재오와 달리, 재희는 나름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로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걷게 된 지 오래였다. 재희는 동생과 동갑이면서 훨씬 어른스러워 보이는 그를 슬쩍 개관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섹시한 분위기가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적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깜빡 잊을 정도로.
‘정말 완벽한 남자로 성장했구나. 신혜원이 그 난리를 칠 만하네.’
“너지?”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떨쳐낸 재희는 에두를 생각이 없다는 듯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응.”
에두를 생각이 없는 건 윤완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하는 게 뭐야?”
“그런 거 없어.”
“이런 짓을 벌였으면 목적이 있을 거 아냐. 말해봐.”
“직원 복지 향상, 원가 효율화……?”
저 능구렁이 같은 놈. 재희는 윤완을 쏘아봤지만 제가 쥔 카드가 필승 카드라는 걸 아는 윤완은 여유만만이었다.
“그날은…… 혜원이가 부탁해서 이유도 모르고 나선 거야. 그 애한테 악감정이 있었던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줘.”
“…….”
이 정도면 제법 많이 굽힌 건데도 윤완은 요지부동이다.
“미안해.”
재희는 자존심 따위 차곡차곡 접어서 구석으로 치워두었다.
“…….”
그러나 여전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도 아니란 말이야?’
재희의 조급함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도윤완이 원하는 게 뭘까, 대체. 재희가 열심히 뇌를 작동시켜 보는데 윤완이 심드렁한 얼굴로 답을 주었다.
“사과할 상대가 틀렸잖아.”
“어……?”
“그날 누나가 잘못한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아…….”
그러니까 굽힐 거면 그 애한테 굽히라는 얘기.
‘그 천박한…… 혼외자한테?’
이건 치워둔 자존심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애한테 굽히라니.
“아, 안 그래도 사과해야지 했는데, 만날 기회가 없네……? 같이 뭐 모임 하는 것도 없고…….”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윤완은 이 이상 협상은 없다는 듯 식사에만 열중했다. 이쯤 되니 방법이 없다.
“사과하면 없던 일로 해줄 거야? 이번 건.”
“아니.”
뭐야. 지금 누굴 놀리나.
“왜?”
하지만 을은 을이니 일그러지는 표정을 최대한 다잡아본다.
“생각해보니까 그동안 너무 기계적으로 계약 연장을 해온 것 같아서 한 번 검토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
“그럼 내가 사과할 이유도 없겠네.”
“마음대로. 하지만 이대로라면 PK 백화점은 검토 단계에서부터 제외야. PK 백화점과 진행할 마케팅 행사도 하나씩 취소해 나갈 거고.”
“야! 도윤완!”
“내가 못할 것 같지?”
“…….”
떠올라라. 저 공격을 맞받아칠 말이 떠올라라, 윤재희.
“도일 그룹은 손해가 없을 것 같아?”
재희는 쥐어 짜낸 반박을 했다.
“있을 수도 있지.”
“근데?”
“누나가 입을 타격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 않을까.”
“뭐?”
“지금 누나는 이번 재계약이 문제가 아닐 텐데.”
“무슨 소리야?”
“여차하면 장 부회장님을 찾아뵙고 누나 보직을 변경하는 조건으로 협상할 수도 있거든, 난.”
“너…….”
“처음부터 그럴 걸 그랬나. 그럼 PK 백화점과 도일 그룹 관계도 유지하고, 우리 그룹 인사 담당이 힘들게 검토 보고서 안 써도 되고. 일석이조였겠네.”
게임 끝이다. 공격 목표가 PK 백화점에서 재희 본인으로 넘어오는 순간 이건 싸워볼 여지도 없이 끝이었다. 큰아버지는 한술 더 뜨면 더 뜨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다 싶어 그녀를 백화점 경영에서 내쫓을 게 불 보듯 뻔했다.
“내일.”
“…….”
“내일 사과할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재희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그럼에도 윤완은 힐끔 무감한 눈길만 던져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