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2021.11.09.
윤완의 어머니 금화연 여사는 다음 날 오전이 되어서야 혜원의 전시회장에서 벌어진 기막힌 에피소드를 전해 들었다. 아들이 벌인 짓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허황된 목격담에 그녀는 일단 부정부터 했다.
‘확인을 해보자. 직접 불러서 물어보면 될 일.’
하지만 윤완은 출근을 해서 집에 없었다. 휴대폰을 해보지만 받지 않는다.
“도 부사장 찾아서 전화 연결해.”
금 여사는 비서를 향해 매서운 지시를 내렸다. *** 윤완이 일요일 출근을 자처한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혜원은 경고에 그쳤어도 직접 손을 댄 재희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다. 오랜만에 도일 전자가 아닌 도일 그룹 컨트롤 타워를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 임직원 복지 카드 제휴처를 전면 재검토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룹 인사 담당 최 사장을 불러들인 윤완은 대뜸 이렇게 제안하였다. 상대의 직책이 한 단계 높기에 제안의 형태를 띠었지만 이건 누가 봐도 일방적인 업무 지시였다. 윤완이 직급 체계 뛰어넘는 오너 일가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PK 백화점 말고 다른 데로 말씀이십니까?”
PK 백화점과 맺어온 오랜 협약 관계를 꿰고 있는 최 사장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며 되물었다.
“네. 기존 계약이 이달 말까지죠? 일정이 촉박하니 서둘러주세요. 시간이 더 필요하면 기존 계약을 임시 연장하는 방법도 고려해보시고요.”
“혹시 사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PK 백화점과의 제휴 내용 중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거나…….”
“기본을 지키자는 겁니다. 매년 재계약을 반복하다 보니 원점에서 검토해 본 적이 없지 않았나요? 이번에 제대로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
“PK 백화점을 제외한 후보군을 놓고, 원가, 직원 복지 모든 면에서 개선이 되도록 면밀히 검토 부탁합니다. 부회장님께는 제가 구두로 보고드릴 테니 염려 마시고요.”
최 사장은 갑작스런 제휴처 변경 지시가 찝찝했지만 이 또한 젊은 후계자의 깊은 뜻이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최 사장이 떠난 후 자리로 온 윤완은 그르렁대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재계에서 지닌 위상과 권력을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휘둘러 본 적 없는 그로서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원칙을 깨기로 했다. 대신 회사에 피해가 없도록 철저히 점검하면 된다.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삼아 제도 개선을 이룰 수도 있었다. 이마를 짚은 윤완이 눈을 감고 열을 식히는데, 비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부사장님, 사모님 전화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야 보고를 받으셨나 보군.’
금 여사의 용건을 짐작한 그가 반응하지 않자 비서가 안절부절못해 했다.
“한 시간 후에 집에 들어가니 그때 말씀하시라고 하세요.”
이렇게 이른 윤완은 이만 나가보라고 손을 휘적거렸다. 난처한 얼굴이 된 비서가 쭈뼛거리며 물러났다. ***
‘나린이가 도윤완 부사장이랑 교제 중입니다.’
연 회장은 어젯밤 채 여사가 전한 말을 상기해보았다.
‘도윤완 부사장이라니. 어찌 이런 일이.’
태준이랑 혼담이 깨진 것도 실상은 이것 때문일지 모르겠다.
‘누가 핏줄 아니랄까 봐, 고작 사랑 놀음에 가시밭길을 택하는 건 제 아비랑 똑같구나.’
연 회장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아니지. 도윤완 부사장이면 제 아비보다 낫다고 해야 하는 건가. 웃음기가 머물다 간 연 회장의 얼굴엔 씁쓸함이 드리웠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성환이는 아직 살아 있었을까. 천사 같던 금지옥엽 다현이는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었을까. 한평생 운명이라는 말을 믿지 않고 살아온 그에게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쳤던, 운명 같은 불행. 유럽 여행을 떠난 막내아들 성환 일가가 한꺼번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의 머릿속에 제일 처음 떠오른 말은 천벌이었다. 천벌. 죄 없는 연인을 잔인하게 갈라놓은 대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 이 불행을 설명할 길은 없었다. 그날 이후 태용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식구들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주치의의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연 회장은 성환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떠나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일 년 전, 그리움에 사무친 연 회장은 식구들의 눈을 피해 별채를 찾았다. 그곳엔 성환과 다현의 물건을 보관해둔 작은 추모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성환의 일기를 발견했다. 일기엔 그를 향한 연 회장의 그리움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절절한 그의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떠나와야만 했던,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되어 버린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 그 옛 연인이 세상에 남기고 간 또 다른 딸아이, 나린이에 대한 그리움. 성환의 일기를 본 날 태용은 나린을 데려올 결심을 했다.
‘걱정 마라, 성환아. 네 유일한 혈육이 된 그 아일 이젠 내가 책임지고 돌보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애가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지켜주마. 그러니 이걸로 이 아비를 용서해줄 수는 없겠느냐. 이 아비와 이 아비가 지은 죄를……. 그럼에도 여전히 숙제는 남는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나린의 친모에게는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하나. 더 우울해지기 전에 연 회장은 고통스러운 회상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중요한 건 현재였다. 나린의 선택이 도윤완 부사장이라면,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만 했다. 나린이를 제 아비와 같은 운명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연 회장의 이마에 깊은 시름의 골이 패였다. *** 도 부회장 내외는 외부 일정을 싹 비우고 오매불망 윤완의 귀가만을 기다렸다. 막 대문을 넘은 윤완에게 서재로 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윤완이 서재로 들어서기 무섭게 금 여사의 화살이 날아든다.
“테라 호텔 그 근본 없는 애랑 낯 뜨거운 광경을 연출했다는 얘기가 정말이야?”
일현은 침착했지만 금 여사는 몹시 흥분을 한 상태였다.
“…….”
윤완이 침묵하자 답답해진 금 여사는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아니지? 대꾸할 가치도 없어서 말 안 하는 거지, 지금?”
흔들림 없이 윤완이 입을 열었다.
“그 애에 대한 표현을 바꿔주십시오.”
“뭐……?”
“계속 근본 없는 애라고 부르실 거면 한마디도 하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이 반응은 설마……. 금 여사의 심장에 달군 쇳덩이가 얹혀진다.
“너 설마……”
“예. 그 애랑 사귀고 있습니다.”
윤완의 태도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
금 여사가 탄식을 토해내며 무너져 내리고, 평정을 유지하던 도 부회장도 짤막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뭐? 부탁? 지금 네가 부탁을 할 처지야?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금 여사는 어디 들어나 보자는 듯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절대 저 모르는 데서 그 아이를 만나지 말아 주세요.”
“뭐…….”
점입가경이란 이런 걸 두고 생겨난 말일 것이다.
“너 대체 왜 그래?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니!”
금 여사의 외침은 괴로움으로 그득했다. 윤완이 혜원에게 마음이 없었다는 건 금 여사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혜원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었다. 연애, 사랑, 이런 쪽으로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아들이니 며느리만큼은 내가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겠지. 결혼 문제로 속 썩이는 일은 결코 없겠지. 이것만큼은 살면서 단 한 치의 의심도 품어본 적 없었다. 그랬던 아들이 만천하에 연애 상대를 공표하다니.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했을 때 이미 한 차례 놀라긴 했지만, 그 상대가 궁금해서 미행을 붙여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금 여사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결혼할 거냐.”
묵언을 고수하던 도일현 부회장이 마침내 근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직 서로 얘기된 건 없습니다.”
“네 생각은?”
“할 겁니다.”
윤완의 답을 들은 금 여사는 정신이 아뜩아뜩했다. 테라 그룹 손녀딸이면 훌륭한 상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출신이 문제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은 연성환 부회장의 혼외자라며 이 세계에 뚝 떨어진 아이. 백 번을 고쳐 생각해도 그런 아일 며느리로 들일 수는 없다. 금 여사의 간절한 눈길이 남편에게 닿았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다행히 일현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것만 빼라. 만나는 것까진 뭐라고 하진 않으마. 하지만 결혼은 안 된다. 적당히 만나다가 헤어져.”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몰라서 물어? 너는 도일 그룹을 이끌어갈 후계자야. 그 애의 출신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일현의 일갈에도 윤완의 표정은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애와 도일 그룹 후계자 자리,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저는 그 애를 택하겠습니다.”
벌어진 금 여사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눈앞의 그가 제 아들이 맞나 싶다. 꼭 딴 사람의 영혼이 빙의한 것 같았다.
“너 지금 도일 그룹을 포기할 수도 있다, 이 말이니?”
적잖은 충격을 받은 금 여사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되짚어 물었다.
“예.”
“너!”
흥분한 금 여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일현이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
“진정해요, 여보.”
“누구 마음대로?! 하늘에서 혼자 뚝 떨어졌어? 이제껏 호의호식했으면 보답을 해야지!”
“일단 나가라.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고, 이 얘기는 나중에 하자.”
아내가 쓰러질까 걱정된 일현은 윤완을 향해 손을 저어댔다. 하지만 윤완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가만히 서서 금 여사의 흥분이 수습되기만을 기다렸다. 금 여사가 조금 진정을 하자 윤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냐.”
일현은 여전히 아내의 팔을 잡은 채 찡그린 얼굴로 대꾸했다.
“저희 복지 카드 제휴처,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간 제대로 된 검토 없이 재계약을 해왔으니 이 기회에 한번 제대로 들여다봤으면 합니다.”
이 와중에도 업무 보고를 하는 아들을 보며 금 여사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저 로봇 같은 모습을 보면 제 아들이 확실한데. 저 애가 사랑에 빠지다니, 눈으로 직접 보고 나면 믿어질까. PK 그룹 사외 고문인 철균과 오랜 친구 관계인 일현은 뜨끔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그렇게 해라.”
“감사합니다.”
윤완은 일현을 향해 허리를 굽혀 보였다. *** 방에 돌아온 윤완이 나린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언제 들어도 사랑스러운 목소리.
“별일 없어?”
[네.]
이상하게도 그랬다. 채 여사도 태용도, 누구 하나 전시회장에서의 일을 두고 나린을 책망하지 않았다.
“다행이네.”
[부사장님은요?]
“나도.”
[…….]
이 침묵은 왜일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이야.”
[알겠어요.]
통화하는 걸로는 만족을 못 하겠다. 보고 싶다, 연나린. 이런 걸 보면 반드시 널 데리고 살아야겠는데.
“뭐 해?”
[그냥 방에 있어요.]
“지금 갈게. 나와.”
[안 돼요. 숙제 때문에 논문 찾는 중이에요.]
“숙제?”
[네. 회사에서 내준 숙제요.]
“무슨 논문인데?”
[표준원가 적정성 측정에 활용할 만한 논문이요. 하늘 높으신 CFO께서 신규 사업 검토를 위한 표준원가 적정성 기준을 마련해오라고 지시를 하셨대요.]
“그걸 왜 네가 해?”
나는 분명 팀장이랑 박 부장한테 지시했는데.
[너무 어려운 숙제라 온 팀원들이 힘을 합쳐서 스터디를 해보기로 했거든요.]
“넌 안 해도 돼. 내가 팀장한테 얘기할게.”
[안 돼요. 그럼 저 팀 옮길 거예요.]
“연나린…….”
[네?]
“숙제는 다음에 하고 지금 만나.”
[안 된다니까요.]
하……. 누가 상사고 누가 부하 직원인지 모르겠네.
“말 좀 들어.”
보고 싶다고.
[내일 저녁에 퇴근하고 만나요. 예쁘게 하고 나갈게요.]
그렇네. 내가 지금 누굴 이겨 보겠다고.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지.
“내일은 꼭 나와야 해.”
[네.]
“…….”
[보고 싶어요.]
만나자는 말을 단칼에 거절당한 윤완으로서는 진정성이 의심되는 말이었다. 어쩐지 심술이 나서 대답하지 않게 되었다.
[잘 자요.]
폰 너머의 나린은 소심해진 그의 속도 모른 채 해맑게 끝인사를 전했다.
“너도.”
아쉬운 마음에, 윤완은 한참이나 전화가 끊긴 폰을 붙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