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2021.11.05.
은 여사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금 전시회장에서 목격한 장면이 합리적인 의구심을 갖게 했다.
“너. 테라 호텔 혼담 정말 너 때문에 깨진 거 맞아?”
날 선 음성이 마침 회의 중이던 태준의 귓가를 시끄럽게 울려댄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맞죠, 그럼.]
아직 전시회장 일을 전해 듣지 못한 태준은 긴가민가하며 대답했다.
“정말이야? 도윤완 부사장한테 빼앗겨서가 아니고?”
[…….]
어떻게 아신 거지. 태준이 답이 없자 은 여사는 더욱 확신을 가지고 몰아붙였다.
“역시 그런 거지? 맞지?”
영민한 태준은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챘다. 당황하긴 했으나 전화로는 표정이 전달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놀란 마음은 표정에 몰아주고 목소리엔 태연함을 싣는다.
[아니요. 그거랑은 상관없어요. 진짜 선보기 귀찮아서 제가 가짜로 만나는 척하자고 한 거예요.]
사실에 기반한 변명이라서 말할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아들의 당당함에 은 여사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정말이야?”
[네. 안 믿어 주시니 저도 답답해요. 선본 날 나린 씨랑 했던 대화, 증거로 녹음해 둘 걸 그랬나 봐요.]
태준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은 여사도 더는 우겨댈 수 없었다.
“알았다. 끊어라.”
소득 없이 전화를 끊은 은 여사는 하루빨리 다른 며느릿감을 물색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린을 썩 흡족해하지 않았으면서 막상 도일 그룹에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배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 윤완의 차가 연 회장의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기 전 나린이 코트를 돌려주려 하자 윤완이 저지했다.
“그냥 걸치고 가.”
언젠가, 겉옷도 없이 밖으로 나가려던 나린에게 서슴없이 코트를 내어주었을 때와 똑같은 대사. 나린은 픽 자그맣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이지 않았을까. 내 마음이 부사장님을 향해 움직인 게.
“왜?”
뜬금없는 웃음보에 윤완이 어리둥절해한다.
“아니에요. 재밌는 생각이 나서.”
“같이 재밌으면 안 되는 거야?”
“안 돼요.”
나린이 쏙 혀를 내밀었다. 귀여운 애교에 윤완도 실없이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윤완은 볼 위로 삐져나온 나린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물었다. 함께 어른들을 찾아뵙고 오늘 일에 대해 설명 드리겠다고 했는데 나린이 거부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윤완도 나린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
윤완의 코트를 꽉 거머쥔 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완의 입술이 잠시 나린의 볼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피곤했을 텐데 푹 쉬어.”
쑥스러운지 나린의 볼이 수줍은 미소로 물들었다.
“네. 부사장님도요.”
차에서 내린 나린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윤완을 배웅했다. 윤완의 차가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에야 심호흡을 하며 초인종을 누른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채 여사가 나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린은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채 여사에게 붙들려 응접실로 가게 되었다.
“어떻게 된 거니.”
“…….”
“이태준 전무랑 약혼 깨진 거, 도 부사장 때문이었어?”
채 여사의 추궁에 나린은 그간의 사정을 있는 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채 여사는 예민하고 깐깐한 성품이기는 해도 혜원이나 재희처럼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방금 전 전시회장에서도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러니 진실을 알리는 데에 부담은 없다. 얘기를 다 들은 채 여사는 기가 막힌다는 듯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주말마다 선보러 다녀야 할까 봐 연극하자는 제안에 응한 거라고?”
곱씹을수록 황당한지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네.”
나린은 푹 고개를 숙였다.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니. 선보는 거 부담스럽다고.”
“저한텐 선택권이 없는 줄 알았어요.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 없다고 하셔서…….”
그만큼 훌륭한 상대를 찾아주겠다는 의미였는데 그 뜻이 이렇게 왜곡되었을지는 미처 몰랐다. 채 여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나를 엄청 원망했겠구나.”
“아니에요. 제가 여기 온 지 너무 얼마 안 된 때라 시간이 지나고 적응이 되면 터놓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채 여사는 허리를 펴고 꼬았던 다리를 풀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물론 아무하고나 결혼하는 건 안 돼. 네 손에 쥐여질 것들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거니까.”
“…….”
“하지만 싫은 사람과 억지로 결혼시키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선보는 것도 마땅한 상대를 찾게 도와주려는 거였지, 다른 의도는 없었어.”
채 여사가 전하는 허심탄회한 속내를 들으니 팽팽하던 나린의 몸 안 신경들이 한 가닥 한 가닥 전부 이완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무의식중에 바짝 긴장하며 생활했나 보다. 집인 듯 집 같지 않은 이 대저택에서. 채 여사는 그간 있었던 일을 되짚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이해가 되네. 도일 그룹이랑 창조 일보 혼담이 깨진 것도, 신 전무가 오늘 그 난리를 친 것도…….’
채 여사가 생각에 잠긴 새 나린이 고개를 들어 슬쩍 채 여사를 일별했다. 기품이 흘러넘치지만 예민하게도 보였던 얼굴이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온화하게 다가왔다. 나린은 세훈의 따스한 성품이 채 여사를 닮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자 용기가 샘솟았다. 채 여사에게는 좀 더 의지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요, 큰엄마.”
“응?”
뻗어 나가던 생각의 가지를 싹둑 자른 채 여사가 나린을 쳐다본다.
“저,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나린은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뭔데?”
채 여사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나린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 전시회장 같은 일,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윤완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 오늘 일로 문득 이 세계에서, 그의 곁에서 살아가고자 결심한 이상 어느 정도의 힘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해주실 수 있으세요?”
채 여사는 한참이나 곰곰이 나린의 눈빛을 헤아렸다. 다현과 꼭 닮은 눈을 보고 있자니 금세 마음이 서글퍼졌다. 단정하고 고왔던 다현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조카였다. 밖에서는 조용했어도 집에서는 누구보다 싹싹해서 큰엄마인 저에게도 허물없이 다가와 주었다. 딸이 없는 저에게 딸인 것처럼. 지금의 나린이처럼.
‘이 아인 다현이보다도 훨씬 더 단단하구나.’
채 여사는 제 눈을 피하지 않는 나린을 보며 무언의 각오를 읽어냈다.
“회사를 그만두는 건 어떠니?”
그러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가 테라 호텔에 와준다면. 그래서 세훈이가 가야 할 외로운 길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다면. 세훈이와 다현이가 그랬던 것처럼. 진짜 오누이처럼.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나린이었다. 나린에게 지금의 직장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어느 날 뚝 떨어진 화려한 배경 속 유일하게 제 힘으로 얻어낸 노력의 결과물. 세상이 또 한 번 뒤집혀도 여전히 손에 꽉 쥐어져 있을 동아줄 같은 것.
“죄송하지만 회사는 계속 다니고 싶어요.”
“아예 다니지 말라는 게 아니야. 우리 호텔로 이직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네?”
예상치 못한 스카우트 제안에 나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냥 내 생각이 그래. 어쨌든 너도 우리 집안사람이고, 다른 회사에 다니는 건 남들 눈에 이상하지 않을까 싶어서.”
“…….”
“너만 괜찮다면 내가 우리 그이한테 얘기해볼게. 세훈이도 적극 도울 테고.”
잠깐의 고민 끝에 나린은 거절 의사를 밝혔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냥 지금 회사에 다니고 싶어요.”
“어째서? 도 부사장 때문에?”
숨 돌릴 틈 없는 채 여사의 질문에 나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배경 때문에 이직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들어간 자리를 감당할 자신도 없고요.”
“…….”
“세훈 오빠가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세훈 오빠처럼 날 때부터 착실히 경영 마인드를 쌓아온 사람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 세계에선 모두가 그 ‘배경’을 등에 업고서 제 자리를 찾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그렇게 살아가건만.
‘참 별난 아이야.’
채 여사의 입술 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생각이 다를지라도 이 아이의 깨끗한 마음은 존중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
“회사는 계속 다녀도 돼. 대신 퇴근 후나 주말에 다만 몇 분씩이더라도 경영 수업을 받는 거야.”
“…….”
“테라 호텔로 이직하는 건 그 이후에 다시 의논해보는 걸로……. 어때?”
흔치 않은 기회라고 판단한 나린은 이 제안만큼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경영지원실 소속이니 경영 수업을 받아두면 커리어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네. 그렇게 할게요.”
“공식 행사 땐 비서를 붙여줄게. 비서가 따라다니면 최소한 오늘 같은 일은 없겠지.”
“감사합니다, 큰엄마.”
채여사와의 대화가 마무리되고 나린은 옷을 갈아입을 겸 방으로 올라갔다. 이 일을 연 회장에게 어떻게 보고하나. 응접실에 혼자 남겨진 채 여사의 뒷골이 묵직해졌다. *** 폰이 잠잠한 걸 보니 아직 전시회장에서의 일이 화연의 귀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고단했던 하루의 끝, 온전한 휴식이 필요한 윤완은 본가 대신 회사 근처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퇴근이 늦어질 때를 대비해 마련한 은신처인데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였다. 막 씻고 나오는 길에 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뜻밖에도 혜원이었다. 받을지 말지 고민하던 윤완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경고를 해줄 겸 폰을 집었다.
“…….”
[어디야? 좀 만나.]
윤완이 입도 떼기 전에 혜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려서 그가 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말했을 텐데. 다신 볼 일 없을 거라고.”
[난 만나야겠다고! 지금 어디야? 내가 그리로 갈게.]
“신혜원.”
[…….]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에 폰 너머 혜원의 입술이 굳는다. 창가로 다가간 윤완은 버튼을 눌러 커튼을 걷었다. 펜트하우스가 선사하는 야경을 내려다보니 불쾌한 감정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불 꺼진 도일 전자 건물 뒤편으로 색색의 조명으로 점철된 한강이 보인다. 석양빛으로 물들었던 나린의 미소를 떠올리며, 윤완은 나직이 경고했다.
“마지막이야. 한번만 더 나린이한테 손대면 가만있지 않아.”
당황한 혜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대체 어떻게…….]
떨림은 급기야 흐느낌으로 변했다. 혜원의 이기심과 뻔뻔함에 질린 윤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대체 왜 그 혼외자야?! 왜 하필 그런 애냐고!]
악에 받친 혜원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제 마음을 좀처럼 다스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럴 거였다. 한평생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왔으니. 한 번도 뜻이 꺾여본 적 없이. 혜원의 아버지, 신중호 회장은 그렇게 외동딸을 키웠다. 일찍이 엄마를 잃은 아이가 가여워서. 세상을 딸아이의 발아래 놓아주면서. 혜원은 끝내 눈물을 쏟았다. 혜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애원인지 발악인지 모를 지경이 되어 있었다.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우린 대한민국 최고의 커플이 될 수 있었잖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장밋빛 미래가 우리 앞에 있었다고. 근데 그걸 버려?! 고작 그런 애 때문에?! 왜?! 대체 왜?!]
“그런 애?”
혜원의 입에서 나온 안하무인 발언에 윤완의 미간이 힘껏 구겨졌다.
[그래, 그런 애!]
그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푼다. 시린 경고가 한 번 더 윤완의 입술 새를 비집었다.
“말로 그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
“나린이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 그냥 너한테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
“또 한 번 건드리면 그땐 진짜 가만 있지 않아.”
뚝. 전화는 그대로 살벌하게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