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유일무이한 존재2021.11.02.
네 사람이 막 전시회장을 나서는데 윤완의 전화가 울렸다. 대외비를 요하는 전화였는지 폰을 귀에 댄 윤완이 저만치 멀어져 갔다. 세훈과 준우는 윤완을 대신해서 나린 곁을 지켰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준우가 재차 확인을 하여서 나린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네.”
“다행이네.”
그러더니 준우는 이곳에 오게 된 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윤완이가 혜원이 전화 받고 사색이 돼서 뛰쳐나가길래 뭔 일 나겠다 싶어서 우리도 쫓아온 거야.”
“……전화요?”
그것도 혜원 씨의 전화?
“어.”
나린은 알쏭달쏭한 표정이 됐다. 혜원이 일부러 전화를 걸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혜원은 나린의 상식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나저나 쟤 왜 저렇게 잘 뛰어? 원래 저렇게 빨랐냐?”
세훈은 이곳까지 온 시간을 셈해보려 손목시계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몰라. 날아왔나 보지.”
“근처에 있었길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어. 어디 멀리 있었음 운전하다가 사고 냈을 거야.”
“……!”
“……!”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로 돌려진 두 사람의 얼굴이 동기화됐다. 그랬구나! 그렇게 된 거였구나! 원래 오늘 오후는 태준까지 넷이서 골프를 치며 보낼 예정이었다. 오랜만에 잡은 골프 약속이었는데, 윤완이 추워서 가기 싫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파토를 냈다. 이때다 싶었는지 태준도 회사 일이 바쁘다며 빠지겠다고 했다. 그렇게 모임이 흐지부지되는구나 하던 찰나, 어차피 시간 비운 거 차나 한잔하자며 윤완이 두 사람을 전시회장 근처 카페로 불러냈다. 의심을 했어야 했어. 저 녀석이 징그럽게 차 한잔하자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그렇게 된 거였구나. 실상은 나린일 신혜원의 소굴에 들여 보내놓고 멀리 떠나 있을 수 없어서. 이러나저러나 그 덕에 제때 달려왔으니 윤완의 대비책이 신의 한 수였던 건 맞았다. 두 사람은 윤완의 치밀함에 조용한 찬사를 보냈다. 준우는 세훈의 공도 치하했다.
“네가 어머니께 나린이 찾아보라고 전화 안 드렸으면 도윤완, 진짜 어떻게 됐을지도 몰라.”
세훈과 준우의 대화를 들으며 나린은 그가 겪었을 혼돈의 크기를 조금이나마 어림셈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불과 몇 분 전 귓전을 울리던 그의 속삭임을 잊을 수 없다. 저 말을 할 때에 전달되어 왔던 떨림도 생생하기만 했다. 나린의 눈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윤완에게 가 닿았다. 통화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몸에 두른 코트에서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춥겠다, 부사장님…….”
나린의 읊조림을 포착한 세훈이 일소하였다.
‘이 와중에도 도윤완 걱정이라니. 푹 빠졌네, 아주.’
천생연분이다, 바보들. 진짜로 걱정해야 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통화를 끝마친 윤완이 돌아오고 네 사람은 카페 주차장으로 향했다. 곧장 차로 직행한 윤완은 조수석 문을 열고 나린에게 손짓을 했다.
“타.”
하지만 세훈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오늘은 내가 데리고 들어갈게. 어머니께서도 걱정하실 것 같고…….”
“…….”
그러나 윤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굳게 닫힌 입술과 조수석 문을 쥔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손이 그걸 증명했다.
“너, 잊었어?”
하더니, 세훈은 ‘미행’ 하는 입 모양을 해 보였다. 윤완의 오른쪽 입꼬리가 위로 끌어올려 졌다.
“그거 이제 괜찮아.”
“왜?”
윤완이 답하기도 전에 세훈은 지레짐작만으로 놀란 표정이 됐다.
“설마 신혜원이 범인이었어? 이제 들켜서 괜찮은 거야?”
나린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도 까먹고 소리를 키우고 말았다.
“아니.”
“그럼?”
“다 밝혀졌잖아, 나린이랑 내 사이.”
아, 그렇지. 방금 그 난리로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 천하의 도윤완에게 연인이 생겼고, 그 연인이 다름 아닌 테라 호텔 신데렐라라는 사실을. 그러나 오늘만큼은 나린을 얌전히 집에 데려다 놓아야 했다. 그래야 채 여사의 꾸중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아냐. 나린이 내가 데려갈 거야.”
세훈은 작심하고 통보했다. 한 다리 건넌 사촌 오빠라도 한집에 사는 사이이니 그럴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누군지 알았어.”
윤완이 대뜸 내뱉었다. 누군지 알아? 설마, 미행의 배후를?
“진짜?”
세훈이 벙한 얼굴을 한 사이, 내내 잠자코 있던 나린이 발을 뗐다. 총총 걸어가 윤완의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다. 말간 웃음이 세훈에게로 향했다.
“늦지 않게 들어갈 테니 큰엄마께 잘 말씀드려주세요.”
나린이 윤완을 선택한 이상 세훈도 더는 방법이 없었다. 목적을 달성한 윤완은 나린을 태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 공들여 준비한 전시회가 첫날부터 엉망진창이 됐다. 엄격한 기준 속 선별된 VIP 관람객들은 하나둘 눈치를 보며 전시회장을 떠났다. 혜원과 윤완 사이에 혼담이 오갔던 일은 이 세계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평소 혜원의 전횡을 고깝게 여기던 자들은 호기를 놓치지 않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위로를 가장한 동정과 비아냥이 다양한 방식으로도 쏟아졌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도윤완 부사장님은 연애를 해도 참 요란하게 하시네요.”
“어머, 어머. 그러니까 지금 도윤완 부사장이 테라 호텔 그 애랑 사귀는 거지? 웬일이니. 너무 속상해 마, 혜원아. 그림 잘 봤어.”
“우와. 연세훈, 명준우, 도윤완 같이 있는 거 오랜만에 보는데 다 다른 그림체로 훈훈하더라. 테라 호텔 손녀는 좋겠다.”
이로써 나린에게 끼얹으려던 치욕은 되레 혜원이 뒤집어쓴 꼴이 됐다. 이토록 살 떨리는 모욕은 스물여덟 인생 최초였다. 하지만 진짜로 살이 떨리고 치가 떨리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정말 저 애였다니!
‘고작 저따위 혼외자 때문에 내 약혼이 망가져 버린 거라니!’
혜원이 부들거리는 가운데, 전시회장 정중앙엔 두 발이 굳어 버린 재희가 서 있었다. 재희는 두려움 속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전시회장을 떠나기 전 엿보았던 윤완의 살기 어린 눈빛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저 구미호 신혜원에게 이용당한 게 분명한데.’
재희는 혜원을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방금 전 윤완이 받은 전화는 손 차장에게서 온 것이었다. 미행을 붙인 자의 정체가 드디어 밝혀졌다.
[말씀하셨던 차량은 사모님 비서실에서 섭외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짐작 못 한 바도 아니었다. 방금 막 전시회장을 나오면서 윤완도 그런 결론에 도달했더랬다. 혜원이 전화를 걸어 윤완의 반응을 떠본 걸 보면 미행을 붙인 배후는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아버지는 이런 데 힘을 뺄 분이 못 되니 그의 어머니뿐이었다.
‘지금쯤 이 소동을 보고 받고 난리가 나셨겠군.’
윤완은 운전대를 굴리면서 아직 제 폰이 잠잠한 걸 신기해했다.
‘지난번에 부탁했던 일,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전화를 하게 된 김에 일전에 손 차장에게 내렸던 비밀 지령에도 박차를 가했다.
[알겠습니다. 근데…….]
‘근데, 뭡니까?’
[저희 말고 같은 걸 캐는 사람이 또 있는 것 같았습니다.]
‘……?’
동지가 있다니, 이건 전혀 예상 밖이었다. 덕분에 통화가 예정보다 길어졌다.
‘누군지는 알아냈습니까?’
[아직입니다. 하지만 수일 내로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 차장은 듬직하게 답변하였다.
‘알아내면 우리 쪽 정체는 절대 드러내지 말고 그쪽 목적이 뭔지부터 파악해주세요. 파악되는 대로 바로 연락 주시고요.’
[네, 부사장님.]
그렇게 통화는 끝이 났다. 통화 내용을 되뇌자 순식간에 한숨이 쏟아졌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바보같이 옆에 나린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아냐.”
윤완은 얼른 표정을 바꿨다. 이 앨 걱정시킬 순 없지. 넌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기억해야 해. 그러니 아까 있었던 나쁜 일은 어떻게든 잊게 해줄게. 반드시. 내가. 하지만 이미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바가 있는 나린은 끈질겼다.
“차에 타기 전에 세훈 오빠랑 했던 말은 또 뭔데요? 뭐가 범인이 혜원 씨예요?”
아무래도 그게, 최근에 계속해서 세훈 오빠를 통해서만 부사장님을 만나러 가야 했던 이유 같은데.
“별거 아냐. 신경 쓸 것 없어.”
“거짓말.”
“진짜야. 신경 쓸 거 없어. 그냥 세훈이랑 하는 얘기야.”
나린은 속상했다.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윤완은 감추기만 한다. 보호해주려는 건 알겠지만 어쩐지 무기력한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한참 차를 달린 윤완은 한강변에 이르러 정지했다. 세훈의 생일 파티가 있던 날, 그가 나린을 데려왔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때는 캄캄한 밤이었는데 지금은 해가 지기 전이라서인지 빛이 전혀 다르다. 태양이 사그라지기 전 맹렬히 뿜어대는 자연광과 강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분주한 기운이 그때보다 한층 생동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나린아.”
“네?”
윤완의 눈빛이 금방이라도 저를 덮칠 것만 같아서 나린은 애먼 코트 깃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뜻밖의 말을 뱉었다.
“미안해.”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과.
“……뭐가요?”
“이런 식으로 터뜨려서.”
나린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거 다 아는데. 이런 식이었던 것도 나를 너무 소중히 여긴 탓이라는 거 다 알고 있는데……. 나린은 윤완이 이성보다 본능을 먼저 따르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언제나 이중삼중으로 대비책을 마련하고 나서야 행동하는 도윤완이 시뮬레이션 따위 집어치우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 너는 왜 이토록 사랑스러워서. 왜 이토록 아름다워서. 윤완의 손이 나린의 뺨을 덮었다.
“앞으로 쉽지 않을 거야.”
나린의 자그만 손이 그의 손등 위에 포개어진다.
“괜찮아요.”
쉽지 않아도 버틸게요. 뭐가 됐든, 부사장님을 볼 수 없게 되는 것보다는 쉬울 테니까.
“앞으로는 무슨 일이든 다 말해야 해. 숨김없이.”
전쟁을 준비하듯 윤완의 얼굴에선 비장함마저 번뜩였다.
“네.”
석양이 지는 시간. 신비로운 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덩달아 무르익어 가는 공기. 엄지와 검지를 세워 나린의 턱 끝을 붙든 윤완은 고개를 갸우듬히 기울인 채 찬찬히 그녀에게로 나아갔다. 입술이 맞닿기 직전 반짝 속도를 높인 나린이 윤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쳤다. 그러더니 뒤로 물러나 윤완과 눈을 맞춘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
그리고 앞으로도 걱정시킬 일이 한가득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저, 보기보다 씩씩해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잘 버틸게요. 부사장님 곁에서 잘…….”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윤완의 입술이 나린의 입을 막았다. 넘쳐흐르는 애정은 그의 숨결을 타고서 그녀의 입 속을 지나 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에게서 넘어온 뜨거운 기운이 그녀의 혈액을 타고 돈다. 그녀의 몸 어디에도 제 흔적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만들겠다는 듯, 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해가 자취를 감추고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몸의 감각이 남김없이 무뎌질 때까지. 마침내 윤완이 나린에게서 떨어졌다. 자유를 되찾은 나린의 입술 틈새로 더운 숨이 새어 나왔다. 윤완은 수줍음에 발그레해진 나린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그러고 보니 내가 이 말을 했던가.
“사랑해…….”
하루에도 수십 번 떠올리는 이 말을. 자취를 감춘 노을이 자리를 옮겨왔다.
“사랑해, 연나린.”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저도요.”
“…….”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 없는 문장 앞에서 나린이 뜸을 들였다.
“……사랑해요…….”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감정의 힘을 빌려 나린은 용기를 냈다. 그리고 이걸로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녀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해요.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온 세상이 적이 되어도 두려울 게 없을 만큼.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절대로 부사장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
나린의 고백에, 윤완이 사르르 미소를 머금는다. 하늘을 태운 노을보다 뜨거운 미소가 윤완의 얼굴을 낯선 이의 것으로 만들었다. 차가움으로 무장한 그의 얼굴에서 타는 듯한 저 미소를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녀가 유일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