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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다행이다 (44/101)

#44. 다행이다202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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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이 물리적으로 불리하다는 걸 인지한 나린은 저항을 멈췄다.

16558032734936.jpg“알았어요. 갈아입을게요.”

나린의 항복 선언에 재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655803273494.jpg‘그럼 그렇지. 예상보다는 길게 버텼네.’

재희가 손을 까딱하자 나린에게 달라붙어 있던 두 비서가 물러났다. 저 여자나 신혜원이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나린은 분을 삭였다. 그러면서 윤완이 왜 그토록 이 전시회 참석을 꺼려했는지 이해가 됐다. 저들을 경계했던 것이다. 이를 사리문 나린은 옷을 받아들고 구석에 있는 파티션 뒤로 가 바꿔 입었다. 가슴 부분이 과감히 파인 뇌쇄적인 디자인에 치마 길이는 왜 이렇게 짧은지. 익숙지 않은 스타일이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걸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기만을 바랄 뿐. 소파에 다리를 꼬아 앉은 재희는 히죽 웃었다. 밖에 있는 채 여사가 신경이 안 쓰인 건 아니었으나 모종의 확신이 있었다.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조카에게 이 정도 장난쯤은 눈감아주리라는 확신. 커피를 엎질러 옷을 망친 데에 대한 보상이라는 명분도 있고. 환복을 마친 나린이 쭈뼛거리며 밖으로 나오자, 재희는 모델 심사라도 하듯 매의 눈으로 관찰했다. 꼼꼼히 나린을 훑던 재희의 눈은 곧 손목에 감긴 팔찌에 고정되었다.

1655803273494.jpg“그 팔찌는 또 뭐야? 싸구려라서 색 바랜 것 좀 봐.”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나린이 팔목을 감싸 쥐며 몸을 움츠린다.

16558032734936.jpg“이제 그만하시죠?”

1655803273494.jpg“내가 뭘 했는데?”

뻔뻔한 태도에 나린이 기막혀하는 사이 재희가 명령하듯 말했다.

1655803273494.jpg“악세사리도 패션의 일부예요. 그 팔찌 당장 빼요.”

16558032734936.jpg“안 돼요.”

1655803273494.jpg“안 돼?”

재희가 또다시 비서들에게 눈짓을 하려 해서 나린은 황급히 지시에 응하는 척을 했다.

16558032734936.jpg“알았어요! 뺄게요!”

느린 손동작으로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나린은 비서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문고리를 비틀어 당기자 벌컥, 문이 열렸다. 문밖에 서 있던 채 여사가 화들짝 놀라며 가슴을 부여잡는다. 마침 세훈의 연락을 받고 나린을 찾으러 오던 길이었다.

16558032758893.png“나린이, 너……. 괜찮니?”

걱정스러운 얼굴이 된 채 여사가 물었다. 느닷없는 채 여사의 출현에 재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혜원도 초조한지 입술을 깨문다. 채 여사가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누군가 이 사실을 채 여사에게 알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럴 사람은…….

16558032758899.png‘정말이야? 정말로 연나린 일에 나선 거야, 도윤완?’

그러쥔 주먹을 파르르 떨던 혜원은 이내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그가 직접 달려온 건 아니니 안심이라고 해야 할까.

16558032758899.png‘연세훈 사촌 동생이니 이 정도 수고는 할 수도 있지.’

아직은 모른다. 아직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채 여사를 보고 한숨 돌린 나린은 팔찌를 꼭 감싸 쥐며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16558032734936.jpg‘다행이다. 이 팔찌만큼은 빼앗기지 않아서.’

재희의 두 비서가 양쪽에서 나린을 일으켜 세우고,

1655803273494.jpg“채 이사님.”

재희는 느긋한 미소를 선보였다. 재희의 인사를 묵살한 채 여사는 곧장 나린의 상태부터 살폈다. 채 여사의 안색은 몹시도 어두웠다.

16558032758893.png“괜찮니?”

한눈에도 제 것이 아닌 블랙 미니 드레스 차림에 벌겋게 상기된 두 볼. 지친 얼굴은 마치 사투라도 벌인 사람처럼 보였다. 주위를 일관하자 파티션 위에 걸린 나린의 원피스가 눈에 띄었다.

16558032758893.png“무슨 짓이죠?”

채 여사의 날 선 눈빛이 혜원을 내리 찔렀다. 재희는 혜원 대신 나서며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1655803273494.jpg“아, 제가 실수로 커피를 쏟아서 갈아입혀 주던 참이었어요. 마침 여분의 옷이 있어서…….”

16558032758893.png“그냥 나한테 보내지 그랬어요.”

1655803273494.jpg“제 잘못이고, 이사님 신경 안 쓰이게 하려고요.”

일단 나린의 상태를 수습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한 채 여사는 재희와 혜원을 차례로 쏘아본 뒤 나린의 팔을 붙잡았다. 나린이 채 여사에게 이끌려 사무실을 떠나기 전 재희의 비서가 다가와 손에 폰을 쥐여주었다. 폰을 받아드느라 잠깐 뒤돌았는데 시야에 재희가 걸렸다. 재희는 검지를 펴서 입술 한가운데 대 보였다. 쉿. 악마보다도 끔찍한 그 얼굴을 몸서리치며 외면하는 나린이었다. ***

16558032758893.png“정말 그게 다였니? 윤 부사장이 말한 대로야?”

전시실 한쪽에 놓인 의자로 나린을 데려간 채 여사가 거듭 확인한다. 나린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16558032758893.png“괜찮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말해봐.”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며 채 여사가 어르는데 나린이 침착하게 말을 돌렸다.

16558032734936.jpg“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16558032758893.png“세훈이가 전화했어. 당장 너 찾으라고. 혜원이가 뭔가 못된 짓을 하는 거 같다고 하면서.”

세훈 오빠가? 어떻게 알고……. 나린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채 여사는 나린의 드레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내리훑었다.

16558032758893.png“옷이 너무 과하네.”

나린도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노출이 과한 디자인은 꼭 헐벗은 기분을 들게 했다.

16558032734936.jpg“저 먼저 들어가도 돼요?”

이 전시회장에, 더군다나 이 차림을 하고서는 한시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다.

16558032758893.png“그래. 김 비서한테 차 대놓으라고 전화해 둘게.”

16558032734936.jpg“고맙습니다.”

16558032758893.png“됐어. 들어가서 쉬어. 오늘 고생했다.”

그새 이 애한테 정이라도 붙었나. 풀죽은 나린이 못내 안쓰러운 채 여사는 그녀답지 않게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동시에 재희와 혜원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16558032758893.png‘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이런 일을 벌이다니.’

저들을 내버려 두었다간 안 보이는 데선 더 큰 사달이 날지도 모르겠다. 단단히 주의를 줄 겸 재희와 혜원을 찾으려는 찰나, 두 사람도 마침 전시실로 되돌아왔다.

16558032758893.png“신 전무.”

채 여사가 신경질적으로 다가서는데 재희와 혜원의 시선이 뜻밖에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채 여사도 따라서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전시실 안의 모든 사람이 주목할 만큼 의외인 인물.

16558032758893.png“도 부사장……?”

채 여사의 중얼거림을 필두로 전시실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전력 질주라도 했는지 두 손을 양 무릎 위에 얹은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뒤로는 감히 그를 제지하지 못한 보안 요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하였다.

16558032734936.jpg“부사장님…….”

윤완을 맞닥뜨린 나린은 환영이라도 본 듯 나직이 읊조렸다. 부사장님이 여긴 어떻게……. 눈동자 안에 나린이 그려지고 귀에 나린의 목소리가 담기고. 그런 뒤에야, 윤완은 비로소 안심을 했다. 성큼성큼. 그가 그녀에게로 직진한다. 그러더니 코트를 벗어, 드러난 나린의 쇄골과 어깨를 가려주었다.

1655803281093.jpg“괜찮아?”

16558032734936.jpg“……네.”

여전히 환영에 사로잡힌 채로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부사장님이다……. 진짜로 그가 와주었다. 근데, 어떻게 알고……? 대체 어떻게……. 그 순간, 윤완이 나린을 당겨 품 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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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하던 전시회장의 공기가 일시에 멈췄다.

16558032734936.jpg‘이게 무슨…….’

나린은 지금 서 있는 이 공간이 현실인가 아닌가 헷갈렸다. 깜빡 낮잠이라도 들었나. 꿈이라면 정말 이상한 꿈인데. 하지만 숲의 향기가 이토록 생생한 걸 보면 꿈은 아니다.

16558032734936.jpg“부사장님…….”

나린이 입술을 달싹거리자, 윤완의 음성이 나린의 귓가로 아스라이 젖어 들었다.

1655803281093.jpg“다행이다…….”

떨고 있다. 그가. 천하의 도윤완 부사장님이. 무얼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16558032734936.jpg“……사람들이 봐요.”

나린은 주변을 의식했다.

1655803281093.jpg“상관없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윤완의 눈꺼풀이 아래로 떨어지며 눈동자를 폭 덮었다. 혜원의 전화에서 나린의 비명이 들려온 순간부터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던 그에게 처음으로 무서운 게 생겼다. 당연히, 무서움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견디기 힘든 건지도 처음 알았다. 수천 개의 바늘이 돌아가며 심장 구석구석을 찔러대는 느낌.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피가 마르는 심경이었다. 도중에 세훈이 전화를 걸어 어머니께 도움을 청했다고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여기 똑바로 서 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보는 눈이 많다는 걸 떠올린 나린은 어깨를 꿈틀거려 그의 품 안을 빠져나왔다.

16558032734936.jpg“저, 정말 괜찮아요.”

거짓말. 내가 다 들었는데.

1655803281093.jpg“…….”

16558032734936.jpg“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혜원이 전화를 걸어 그 상황을 전부 들려주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한 나린은 그를 위해 힘겨운 웃음을 내보였다. 괜찮은 척하는 마음이 예뻐서 윤완이 나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뒤 꽁꽁 얼어붙은 눈길로 재희와 혜원을 번갈아 내찔렀다. 저들은 선을 넘었다. 절대 넘어선 안 되는 도윤완의 선을. 재희가 긴장한 건 차치하고, 혜원은 가슴을 난도질당한 듯한 비참함 속에 내동댕이쳐졌다. 약혼 얘기가 매듭지어진 지 겨우 보름밖에 안 됐는데 공개적인 자리에서 다른 여자를 끌어안다니. 윤완이 올지도 모른단 각오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마음을 표현할 줄은……. 이건 혜원의 예상 반경을 완전히 이탈한 행동이었다.

16558032758899.png‘진짜였어? 윤재오가 했던 추리가 전부 사실이었단 말이야?’

16558032758893.png“도 부사장. 보는 눈도 많은데, 이게 무슨 짓이야?”

투박한 손길로 나린과 윤완 사이에 거리를 벌린 채 여사가 소리를 낮추어 다그쳤다. 그리고 상황을 모면해보려 냉큼 나린의 등을 떠미는데, 전시실 입구에서 친숙한 얼굴들이 등장하여 채 여사를 더욱 기함하게 만든다.

16558032830105.jpg“도윤완!”

친숙한 얼굴의 주인공, 세훈과 준우는 이미 붕괴된 보안 요원들의 저지선을 손쉽게 통과해 들어왔다. 윤완의 이름을 외치는 걸로 보아 그의 뒤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세훈이 윤완을 붙들고,

16558032830108.jpg“나린아, 괜찮아?”

준우는 나린을 챙겼다.

16558032734936.jpg“네, 괜찮아요.”

대답을 해주면서도, 나린은 모두가 저를 걱정하는 이 상황이 어리벙벙하기만 했다.

16558032734936.jpg‘세훈 오빠도, 부사장님도, 준우 오빠도……. 다들 어떻게 안 거지?’

나린의 어깨에 윤완의 코트가 둘러진 걸 본 세훈은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폭로된 관계. 많은 사람이 목도한 이상, 없던 일로 돌릴 순 없다.

16558032830108.jpg‘이제부터 진짜 전쟁이 나겠네.’

세훈의 얼굴 위로 급격히 그늘이 드리웠다.

16558032758893.png“세 사람 다 초대장도 없이 무슨 짓이야?! 신 전무 곤란하게.”

윤완에 이어 세훈과 준우의 등장까지. 채 여사는 황망함을 감춘 채 사태 수습을 위해 고의로 큰 소리를 내었다.

16558032830108.jpg“죄송해요, 어머니.”

채 여사의 의도를 이해한 세훈이 장단 맞춰 사과의 말을 던졌다.

16558032758893.png“얼른 나린이 데리고 나가라.”

16558032830108.jpg“네.”

채 여사의 나직한 명령과 함께 나린은 세훈의 손으로 인도되었다. 나린의 어깨를 감싼 세훈이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준우는 망부석처럼 박혀 있는 윤완을 잡아끌었다. 세훈에게 끌려가면서 습관처럼 왼 손목을 매만지던 나린은 허전함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16558032830108.jpg“왜 그래?”

세훈이 묻는다.

16558032734936.jpg“팔찌……. 팔찌가 없어요.”

나린은 울상이 됐다.

1655803281093.jpg“내가 사준 거?”

윤완이 세훈과 나린의 틈을 비집었다.

16558032734936.jpg“네.”

1655803281093.jpg“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데?”

16558032734936.jpg“아까 여기 혜원 씨 사무실에서…….”

그러자 윤완의 고개가 혜원 쪽으로 돌아갔다.

1655803281093.jpg“사무실 어디야?”

금방이라도 저를 잡아 죽일 듯한 윤완의 눈초리에 얼이 빠진 혜원은 겨우 손가락을 들어 사무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16558032865758.jpg“내가 찾아올게.”

준우가 신속히 움직이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재희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싸구려라고 비웃었던 그 팔찌가 도윤완이 사준 거였다니. 저 애가 다름 아닌 도윤완의 연인이었다니! 엄청난 상대를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즉감하며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도윤완 부사장이 얽힌 일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 나서지 않았을 텐데.

1655803273494.jpg‘그런 얘긴 일언반구도 없었잖아, 신혜원.’

이용을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생겨나서, 재희가 혜원을 흘겨보는 사이. 다행히도 준우가 사무실과 전시회장을 잇는 복도에서 팔찌를 찾아왔다. 아까 만지작댔을 때 잠금 부분이 헐거워져 풀린 모양이었다.

16558032734936.jpg“감사합니다.”

팔찌를 되찾은 나린은 준우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런 뒤 세 남자의 비호 속에서 악몽 같았던 전시회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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