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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모욕이면 더 좋겠어 (43/101)

#43. 모욕이면 더 좋겠어2021.10.26.

혜원의 전시회 첫날, 토요일. 나린은 채 여사와 함께 오후 시간대에 초대를 받았다. 급한 수명 업무가 생겨 휴일 출근을 하게 되었는데 예상보다 퇴근이 늦어졌다. 나린이 늦게 되었다는 비서의 보고에 채 여사는 한숨을 뱉었다.

16558032467883.png‘진짜 이 놈의 회사, 그만두게 할 수 없나.’

채 여사는 저와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사는 나린을 이따금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자라온 환경이 판이하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16558032467889.png“어머, 오셨어요, 채 이사님?”

하는 수 없이 홀로 전시회장에 도착하자 혜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사는 채 여사의 대외적 직함이었다. 채 여사는 아직 친정 쪽 사외이사 직함을 달고 있었다.

16558032467883.png“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신 전무.”

16558032467889.png“별말씀을요. 근데…….”

뒤에 생략된 말이 나린의 행방에 관한 것임을 눈치챈 채 여사는 차분히 웃어 보였다.

16558032467883.png“우리 애가 일이 있어서 좀 늦는다고 하네. 미안해서 어쩌지?”

16558032467889.png“아니에요.”

혜원은 쿨한 척 웃어넘겼다. 그러나 속으로는 나린이 이 전시회를 우습게 여기는 게 분명하다고 멋대로 넘겨짚었다. 감히 혼외자 주제에.

16558032467889.png“이태준 전무랑 약속이 있었나 보죠?”

그런 거라면 정상참작 해 줄 요량으로 물었는데 되돌아온 답은 상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16558032467883.png“이태준 전무? 나린이가 이태준 전무를 왜?”

16558032467889.png“네?”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는 법이 없는 혜원도 이 반응에만큼은 갈피를 잃고 말았다.

16558032467883.png“태준이는 세훈이랑 친하지, 나린이랑은 그냥 오가며 인사만 하는 사이예요. 지난번 생일 파티 때야 세훈이 부탁으로 에스코트만 해준 거고.”

채 여사가 쐐기를 박아서 혜원은 그제야 채 여사의 말뜻을 이해했다. 이건 자신이 처한 상황의 완벽한 복사판이었다. 없던 일이 되어야만 하는 관계. 그러니까, 깨진 건가……? 혼담이……? 사태 파악을 마치자, 재오가 했던 말들이 혜원의 머릿속으로 두서없이 흘러들었다.

16558032496951.jpg‘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윤완이잖아. 이상하지 않아?’

  싱가포르 비행기 안에서의 에피소드와,

16558032496951.jpg‘연나린 때문은 아니겠지?’

  실연당하고 술에 몰두하는 저에게 내던져졌던 추측. 그땐 가볍게 무시하고 말았던 이 두 마디가 선명한 잔상을 남기면서 혜원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설마? 아니, 도윤완이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얼음 심장이 누굴 좋아할 리가. 그럼에도 타이밍이 이처럼 공교로울 수는 없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혜원의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16558032467883.png“신 전무?”

세워두는 시간이 길어지자 불쾌해진 채 여사가 그녀를 불렀다.

16558032467889.png“아, 네.”

현실로 돌아온 혜원이 억지 미소를 띠며 채 여사를 안내한다.

16558032467889.png“이쪽으로 오세요. 마침 PK 윤재희 부사장도 왔어요.”

혜원의 머릿속은 전시회장을 채운 그림들만큼이나 오만가지 색깔로 얼룩져 있었다. *** 이번 회차에 초대된 사람들 중에는 태준의 어머니 은수라 여사와 윤재오 전무의 친누나 윤재희 부사장도 있었다. 채 여사와 은 여사는 가벼운 묵례만 나누었다. 두 여인 사이에는 아직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16558032496951.jpg“안녕하세요.”

그림을 보고 있던 재희가 채 여사를 발견하고 곧장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16558032467883.png“오랜만이에요, 윤 부사장. 매년 신 전무 전시회 때나 보는 것 같네.”

16558032496951.jpg“그러게요. 제가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16558032467883.png“백화점 경영하느라 바쁜 거 다 아는데요, 뭘.”

재희의 눈동자가 바쁘게 주변을 돌아다니고, 채 여사는 그 이유가 아까 혜원과 같다는 걸 알아차렸다.

16558032467883.png“우리 나린이 찾는 거죠?”

16558032496951.jpg“네. 같이 온다고 들었는데. 안 왔나 봐요.”

16558032467883.png“좀 늦어지게 됐어요.”

왜들 이렇게 관심인 건지. 겉으로는 여상스러운 채 여사였으나 속으로는 탐탁스럽지 않아 했다. 혜원도 그렇고 재희도 그렇고, 그 성품을 모르지 않는데 결코 좋은 관심일 리가 없었다.

16558032467883.png‘혼외자 신분인 그 애 앞에서 기세등등하고 싶은 거겠지.’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그때 채 여사가 준비해준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입고 꽃다발을 품에 안은 나린이 등장했다. 칙칙하던 전시회장 안 공기가 따스한 파스텔 톤으로 덧칠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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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하게 갖추고 등장한 모습에도 혜원은 나린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오늘 이 초대도 채 여사와 테라 호텔가의 체면을 봐서 하는 수 없이 승인한 것이다. 혼외자는 어디까지나 혼외자. 얘길 들으니 도일 전자에서 평사원으로 일한다던데.

16558032467889.png‘고작 저딴 애가 내 혼담을 깨 놓은 거라고?’

혜원은 이를 악물었다. 결코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나린이 들고 있던 꽃다발이 혜원에게로 내밀어지고,

16558032526173.jpg“전시회 축하드려요, 혜원 씨.”

혜원의 표정은 손 쓸 새 없이 딱딱해졌다.

16558032467889.png“뭘 이런 걸…….”

꽃다발을 만지기조차 싫은 혜원이 곤혹스러워하자 뒤에서 재희가 조그맣게 킥킥거린다.

16558032467883.png“왔니?”

때마침 채 여사가 다가와서 혜원은 어쩔 도리 없이 꽃다발을 받았다.

16558032467889.png“고마워요.”

꽃다발은 혜원의 손을 스치기만 하고 곧바로 뒤에 있던 비서에게로 넘겨졌다. 나린이 채 여사를 따라 멀어지자 재희는 혜원에게 바짝 다가서며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16558032496951.jpg“저 꽃다발은 대체 뭐니? 촌스럽게. 저 애가 태준이 짝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태준이가 아까운데.”

재희는 가벼운 뒷담화나 할 심산이었는데 혜원의 반응은 예상외로 심각했다.

16558032467889.png“모르겠어.”

16558032496951.jpg“모르다니, 뭘?”

16558032467889.png“아까 채 이사님한테 약혼 얘기 꺼냈더니 무슨 소리냐고 발뺌하시더라고.”

16558032496951.jpg“어머. 정말?”

재희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재희는 태준의 사촌 형 상준으로부터 직접 나린과 태준의 약혼 얘길 전해 들었었다. 지난번 세훈의 생일 파티 때 재오를 부추겨 지아를 데려오게 한 것도 재희였다.

16558032467889.png“아무래도 깨진 것 같아, 혼담.”

16558032496951.jpg“아.”

눈썰미가 좋은 재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16558032496951.jpg“어쩐지. 저 두 분 묘하게 동선을 피해 다니시더라고.”

채 여사와 은 여사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은연중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16558032467889.png“언니. 나 부탁이 있어.”

혜원은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재희에게 도움을 청했다.

16558032496951.jpg“뭔데?”

16558032467889.png“이따가 연나린이랑 셋이 자리 마련할 테니까 쟤 무안 좀 줄 수 있어?”

16558032496951.jpg“갑자기?”

16558032467889.png“어. 이유는 묻지 말고.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래.”

재희가 조소를 흘렸다.

16558032496951.jpg“그거야 내 특기긴 한데…….”

16558032467889.png‘알지. 누구보다도 잘 알지. 언니는 나보다 한 수 위니까.’

혜원도 쓴웃음으로 응수한다.

16558032496951.jpg“이유가 궁금하다.”

이것도 나름 재능 기부라고 재희가 비싸게 굴었다.

16558032467889.png“나중에 말해줄게. 그냥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혜원의 진지한 표정을 본 재희는 시원스레 그녀의 청을 수락했다.

16558032496951.jpg“좋아. 무안이면 돼?”

16558032467889.png“아니.”

혜원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린을 쏘아봤다.

16558032467889.png“모욕이면 더 좋겠어.”

*** 나린은 윤완과 약속한 대로 채 여사 옆에 딱 붙어 있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노력은 허무하게 물거품이 됐다. 혜원은 예의 그 친절함의 가면을 쓰고 채 여사에게 접근했다.

16558032467889.png“채 이사님, 나린 씨랑 제 사무실에 가서 차 한잔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재희 언니도 같이요.”

채 여사는 불안했지만 순순히 나린을 내어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16558032467883.png“그래요. 우리 나린이 잘 부탁해, 신 전무.”

또래들끼리 어울리겠다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저 잘 부탁한다는 말로 별일 없기만을 바랄밖에. 나린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혜원을 따라나섰다. 혜원의 사무실은 전시실 출구 맞은편에 있었다. 화려한 꽃병이 장식하고 있는 테이블로 혜원이 나린을 이끌었다.

16558032496951.jpg“지난번 파티 때 봤죠, 우리?”

먼저 도착해 있던 재희가 나린을 알은체했다.

16558032526173.jpg“네. 안녕하세요.”

그날 소개받은 사람이 한 트럭이었기에 일일이 다 기억은 못 하지만 재희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PK 백화점 윤재오 전무의 친누나를.

16558032467889.png“뭘로 하겠어요? 커피? 녹차? 허브 차?”

16558032526173.jpg“허브 차로 할게요.”

비서가 차를 준비해오자 혜원은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찻잔을 건넸다. 나린은 적당히 맞춰주고 자리를 뜰 마음에서 혜원이 건넨 찻잔을 받아들었다.

16558032526173.jpg“감사합니다.”

그때였다. 재희의 손에 들린 찻잔이 기울어지며 나린의 원피스 자락을 적시고 만다.

16558032526173.jpg“아!”

놀란 나린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는 많이 식은 상태였다. 다행히 옷에 얼룩만 지고 화상을 입지는 않았다. 이 모두가 재희의 계산을 거쳐 연출된 상황이었다.

16558032496951.jpg“어머, 실수. 미안해서 어쩌지?”

재희가 대충 난처한 얼굴을 해 보인다.

16558032526173.jpg“괜찮아요.”

고의적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조용히 넘어가고자 사과를 받아주는 척했다. 처음 온 전시회에서 소란을 피운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16558032496951.jpg“그래도……. 애써 준비한 예쁜 옷이 망가져서 어떡해.”

16558032526173.jpg“어쩔 수 없죠.”

나린은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옷을 수습할 핑계로 자리를 뜰 수 있게 되었으니까.

16558032526173.jpg“잠시…….”

나린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재희가 덥석 팔을 붙들었다.

16558032496951.jpg“잘 됐다. 마침 차에 남는 옷이 한 벌 있거든요. 잠깐만 기다려요.”

성의 없는 연기 톤이 이어졌다. 마침 옷이 있었다는 설명은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옷이 있는 걸 기억해내고 이 상황을 꾸며낸 거였으니까.

16558032526173.jpg“아뇨, 괜찮아요.”

16558032496951.jpg“안 돼요. 이대로 나가면 제가 채 여사님께 면목이 없어요.”

재희가 눈짓을 하자 대기 중이던 여비서 둘 중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돌아온 여비서의 품에는 블랙 미니 드레스 한 벌이 안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나린이 선호하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16558032496951.jpg“이걸로 갈아입어요.”

재희가 슬슬 시동을 걸려고 한다. 혜원은 들키지 않게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대편 목소리는 들리지 않도록 통화 음량은 최대한 줄여 놓은 상태였다. 윤완 오빠. 혜원의 폰에 하얀 글씨로 이름이 뜨고, 윤완이 전화를 받았는지 화면이 달라졌다. 이걸로 확실해지겠지. 도윤완이 정말 이깟 애 때문에 나를 버린 건지.

16558032526173.jpg“죄송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나린이 문을 향해 잰걸음을 걷는데 재희의 여비서가 날쌔게 앞을 가로막고 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나린은 휙, 재희를 돌아봤다.

16558032526173.jpg“무슨 짓이죠?”

16558032496951.jpg“내가 뭘? 실수한 게 미안해서 보상하겠다는 건데. 얼른 갈아입어요. 돌려줄 필요 없이 그냥 가지면 돼요.”

16558032526173.jpg“괜찮다고 했는데요.”

16558032496951.jpg“기껏 옷을 준비해줬는데 성의를 무시하면 되나.”

재희가 눈짓을 하자 두 여비서가 홀연 나린을 잡아끌었다. 눈 깜짝할 사이 손에 쥐고 있던 폰까지 빼앗긴 나린은 반사적으로 가까운 벽에 붙으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두 사람 몫의 물리력은 나린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6558032526173.jpg“뭐 하는 짓이에요?!”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전시실과 제법 거리가 있는 터라 듣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두 비서가 나린을 데려가려 하고 나린이 강하게 저항하는 가운데, 재희는 이 광경을 즐거운 표정으로 관람했다. 혜원은 방관자의 위치에 서서 나린과 제 폰을 교대로 힐끔거렸다. 도윤완은 아직 전화를 끊지 않고 있다. 이만하면 됐다. 그가 정말로 연나린을 좋아한다면 뭔가 조치가 있겠지. 통화 종료 버튼이 꾹 눌렸다. 결과를 기다리면서, 혜원은 전례 없는 초조함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타인의 일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윤완이기에 만에 하나 달려온다면 이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을 터였다.

16558032467889.png‘오지 마, 도윤완. 오면 죽여 버릴 거야. 절대 오지 마.’

혜원은 상대에게 닿을 수 없는 말을 머릿속으로 뇌까렸다. 윤완을 시험하는 것과는 별개로 괴로워하는 나린을 보는 건 혜원에게 또 다른 통쾌함을 선사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린의 표정 하나하나를 뇌리에 새긴다. 만에 하나, 만에, 만에 하나. 진짜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서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올 경우, 제가 받을 상처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그래. 지금 저 애의 구겨진 표정을 기억해 두면 조금은 위로가 될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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