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감기는?2021.10.22.
윤완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자 아래에 있던 나린의 몸이 무게를 배겨내지 못하고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진다. 윤완의 눈이 애달프게 나린을 훑었다. 흐트러진 자세가 윤완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손을 뻗는데 나린이 불쑥 팔을 들어 저지했다.
“왜?”
윤완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나린은 면목 없는 표정으로 두 눈을 내려뜨렸다.
“저, 그러니까…….”
“…….”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요.”
“……뭐?”
“죄송해요. 사실은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좀 있었거든요.”
허탈하다는 듯 윤완은 나린의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다가 이내 몸을 돌려세워 나린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열이 좀 있는 것 같네.”
……이게 아파서란 말이지. 나 때문이 아니라.
“죄송해요.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나린은 윤완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낮에 만나자는 메신저에 계속해서 답이 늦어졌던 건 안 좋은 컨디션을 두고 고민한 탓이었나 보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만 보고 싶어 안달하는 것 같아 서운해했던 게 미안해지는 윤완이었다.
“바보야,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지.”
“그냥 감기라서…….”
“그냥이 어딨어? 감기는 병 아냐?”
윤완은 나린을 번쩍 안아 들어 다시 침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포옥 이불을 덮어준다. 열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두 팔에 안겼던 탓인지, 나린의 얼굴이 더욱 발그레해졌다.
“저녁은?”
“입맛 없어서 안 먹었어요.”
“죽도?”
“네.”
안 봐도 훤하다. 일하는 사람들 번거로울까 봐 말도 안 꺼냈겠지.
“이럴 땐 죽 정도는 끓여달라고 해도 되는 거야.”
가벼운 충고를 던진 윤완은 스위트룸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전복죽을 준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안 먹어도 괜찮은데…….”
“안 돼. 약은?”
“먹었어요. 아까 점심시간에 병원 갔었거든요.”
“저녁 약도?”
“저녁은 아직요.”
그렇겠지. 빈속이니.
“가져는 왔고?”
“가방 안에요.”
윤완은 입구에 방치되어 있을 나린의 가방을 가지러 침실을 나섰다. 나린은 그의 뒷모습을 감동적으로 지켜보았다. 고작 감기에도 저렇게 안쓰러워하다니, 보석처럼 귀히 다루어지는 기분이었다. 윤완이 곧 가방과 함께 되돌아왔다.
“오늘은 여기서 자. 찬바람 쐬지 말고.”
“어떻게 외박을 해요.”
“세훈이한테 부탁해서 잘 설명하면 되지. 다른 데도 아니고 너희 호텔인데.”
“그래도…….”
나린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져서 지켜보는 윤완의 가슴이 아파 왔다. 밤새도록 곁에 있어 주고 싶다. 옆에서 보살펴 주고 싶다. 하지만 미행이 붙은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무조건 집에 들어가야만 한다.
“감기 옮았겠어요. 미리 말했어야 되는데, 죄송해요.”
“죄송하다고 하지 말랬지?”
“…….”
“상관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감기쯤 걸릴 가치가 있는 입맞춤이었으니. 그의 손이 찬찬히 나린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자. 죽 오면 깨워 줄게.”
“네.”
나린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해할 수 없게도 눈 끝에 설핏 물기가 어렸다. 뜨거운 기운을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나린은 깊이 안도했다. 도일 전자에 입사해서…… 이 세계에 들어와서 다행이다. 도윤완 부사장님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아픈 것도 싹 잊을 만큼, 눈물이 나도록 행복한 밤이었다. *** 테라 호텔 강남 한식당, 연화랑 다이닝룸. 차향으로 가득한 이 밀폐된 공간에 기품이 흘러넘치는 두 중년 여성이 마주 섰다. 테라 그룹 맏며느리 채윤희 여사와 신화 그룹 셋째 며느리 은수라 여사는 서로를 향해 허리 숙여 맞절했다. 깍듯이 예를 다 하면서도 두 사람의 표정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앓아누웠다더니 은수라 여사는 그새 몹시 수척해진 인상이었다.
“좋은 인연이 될까 했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자리에 앉은 뒤, 채 여사가 먼저 화두를 던진다. 이 혼사가 깨지는 게 더 속 아픈 쪽은 은 여사일 테니까. 연태용 회장은 혼사가 성사되면 나린에게 적잖은 지분과 부동산을 물려줄 것임을 암시했다. 은 여사가 나린의 혼외자 신분을 알고도 태준을 선 자리에 내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찰거머리 한지아도 떼어내고, 테라 그룹 재산도 안기고. 태준에게 일석이조였던 이 혼담이 이렇게 무산되다니.
‘어쩐지 지나치게 순조롭다 했어. 그 녀석이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이가 그렇게 큰 결례를 저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진심을 완벽히 감춘 은 여사는 조금도 아쉬울 게 없다는 어조로 깔끔한 사과를 건넸다.
‘제법인걸.’
역시 쉬운 상대가 아니라고 인정하며 채 여사가 빙긋 미소를 짓는다.
“아닙니다. 우리 나린이도 동조했으니까요. 다만, 저희 아버님께서 많이 노하신 것 같습니다.”
이 사태의 근원이 태준으로 되어 있는 까닭에 채 여사는 은 여사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은 여사 쪽에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연 회장님께는 직접 찾아뵙고 사죄드려야 마땅한데 건강 상태도 그렇고……. 사정이 여의치 않네요. 저희 쪽에서 많이 송구스러워 하더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지요.”
질질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채 여사는 이어서 바로 본론을 꺼냈다.
“진행된 것도 없으니 서로 정리할 것도 없지 싶습니다만, 잠시나마 닿았던 인연, 흐지부지 끝내기보다는 확실히 매듭짓는 게 좋겠다 싶어 이렇게 나오시게 했습니다.”
채 여사의 말에 은 여사도 동감을 표시했다.
“네. 저도 얼굴 뵙고 끝내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서야 요청에 응하게 되었네요.”
“소식 듣고 걱정했습니다. 괜찮으신 건가요?”
“네. 괜찮습니다.”
잠시 대화가 끊긴 뒤 이번엔 은 여사 쪽에서 입을 뗐다.
“그래도 서로 오간 게 없어서 간단히 정리되겠네요.”
“어쩌면 다행이죠, 약혼 전에 이렇게 된 게. 부디 좋은 인연 맺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린 양이야말로 지난번에 보니 너무 착하고 순하던데, 좋은 사람 만나면 좋겠습니다.”
공허한 덕담이 오가고 채 여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뵙죠. 아, 곧 뵙게 되겠네요. 토요일 신 전무 전시회, 오시지요?”
“네. 가야죠.”
뒤따라 일어선 은 여사가 대답하였다. 신 전무라 함은 혜원을 가리켰다. 혜원은 매년 이맘때쯤 창조 일보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제 작품을 건 전시회를 열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그녀는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화가는 아니었지만, 화단(畵壇)에서는 매번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정작 그림을 취미로 하는 혜원은 대중의 인기든 화단의 평가든 아무 관심 없어 했다. 혜원이 전시회를 여는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이 전시회에는 내로라하는 재계 여성들이 총 출동한다. 전시회에 공식적으로 초대를 받느냐 마느냐 하는 건 이 세계 여성들 간에 주류, 비주류를 가르는 주요 잣대가 되었다. 항간에는 창조 일보 측에서 공신력 있는 초청자 선정을 위한 태스크 포스(Task Force)를 구성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혜원은 이 전시회 초청 인원 선발과 스케줄 안배를 통해 제 영향력을 과시하고자 했다. 권력을 휘두를 때에야 비로소 존재 가치를 확인받는 그녀이니까. 채 여사와 은 여사는 올해도 당연히 이 전시회 초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일주일 전, 정식 초청장도 우편으로 송달받았다.
“그러면 전시회 때 뵙죠.”
“그러죠. 들어가세요.”
채 여사가 먼저 룸을 떠나고, 은 여사는 채 여사와 간격을 둘 요량으로 음료를 새로 주문했다. 채 여사 앞에서는 강인한 척했지만 속은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져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란 말이야? 아직도 한지아, 그 끈질긴 게 우리 태준이 앞을 막고 있는 거야?’
머리에 들러붙은 껌처럼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아이. 그렇다고 해서 머리카락을 잘라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안 비서.”
“네, 사모님.”
은 여사의 부름에 채 여사와 엇갈려 룸으로 들어왔던 커트 머리 여성이 응답한다.
“한지아, 그 애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좀 알아봐. 우리 태준이랑 다시 만나는지도.”
“네, 알겠습니다.”
안 비서가 지시를 이행하러 떠나고 은 여사는 길게 날숨을 뱉었다. 만일 또 한지아가 원인이면 이번에야말로 가만있지 않을 테다. 은 여사는 단단히 별렀다. *** 오늘도 나린과 윤완의 데이트에 세훈이 소환되었다. 손 차장이 미행을 붙인 배후를 알아 오기 전까진 이 방법뿐이었다. 세훈은 지난번처럼 나린을 윤완이 기다리고 있는 테라 호텔 룸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린은 왜 매번 이런 식으로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 윤완, 세훈 모두에게 따져 물었지만, 누구에게서도 속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의구심은 들지만 감도 잡을 수 없다. 일단은 골치 아픈 생각일랑 잊고 이 데이트를 즐기자. 짧은 시간, 순간의 행복. 눈 깜짝하는 사이 지나가 버리면 후회해도 때는 늦는다. 그 와중에 나린이 지겨울 걸 우려해 매번 다른 룸을 예약 중인 윤완은 이번엔 테라 호텔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펜트하우스를 선택했다. 탁 트인 뷰를 자랑하는 창가 테이블. 디저트 트레이를 앞에 두고 알록달록한 마카롱을 노리던 나린의 손이 멈칫하였다.
“아, 맞다. 저 토요일엔 못 만나요.”
“왜?”
연인의 깜짝 일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윤완의 눈에 불만이 서렸다.
“큰엄마가 어디 같이 갈 데 있다고 하셔서요. 무슨 전시회라던데…….”
윤완은 곧장 전시회의 정체를 꿰뚫었다. 이 세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연례행사.
‘신혜원이 여는 전시회로군.’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다. 신혜원 같은 여자들로만 우글거리는, 그 소리 없는 전쟁터에서. 윤완의 불만은 더욱 거세어졌다.
“꼭 가야 해?”
“글쎄요. 가야 하지 않을까요?”
“여쭤보고 웬만하면 가지 마.”
“왜요?”
“그냥.”
“어? 나한테는 그냥이란 말 쓰지 말라더니.”
“…….”
그가 입을 닫자, 나린은 빙긋 웃으며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다녀올게요. 가능한 한 큰엄마 말씀은 다 들어드리려고 노력 중이거든요. 아직 여기 분위기에 대해 잘 모르는데 괜한 분란 일으키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분란 일어날 것 같으니까 가지 말라고.
“그 전시회, 쉬운 자리 아닐 거야.”
윤완은 나린이 놀라지 않도록 표현을 걸러 말했다. 같이 가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눈앞에 두고 보살펴 줄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반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시회는 여자들만 초대되기 때문에 참석할 방법이 없었다. 그 속도 모르고 나린은 태평하기만 했다.
“여기 와서 뭐 쉬운 자리가 있었나요. 오자마자 다짜고짜 끌려가서 선도 봤는데, 설마 그것보다 더하려고요.”
“…….”
더할 수도 있으니까 가지 마…….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 윤완이다. 지나친 과보호로 불면 꺼질세라 쥐면 날아갈세라 하는 것도 꼭 나린을 위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앞으로 쭉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할 테니 이참에 적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몰랐다.
‘세훈이 어머니께서 동행하신다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윤완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조심히 다녀와, 그럼.”
나린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주며 한풀 부드러워진 말투로 이른다.
“전시회 가는데 조심씩이나요?”
제 앞에 닥칠 미래도 모른 채 나린이 천진하게 웃었다. 이러니 내가 마음을 놓을 수가 있나. 윤완이 고개를 내젓는데, 나린의 팔이 불쑥 윤완의 목을 감아 안았다.
“조심히, 얌전히, 예쁜 그림 많이 보고 올게요. 큰엄마 옆에 꼭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고. 그럼 되는 거죠?”
잊고 있었다. 이 애는 여우라는 걸. 여우 중에 상여우라는 사실을.
“……그래.”
힘겹게 쌓고 있던 인내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감기는?”
그의 물음에,
“다 나았어요.”
숨은 의도를 포착해내지 못한 순진무구한 답변이 이어졌다.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완의 입술이 나린의 입술로 돌진한다. 놀란 나린의 손이 잠시간 허공을 휘저었다. 짙어져만 가는 입맞춤에, 몸에서는 차츰 힘이 빠져나가고……. 한쪽 귀퉁이가 베어 물린 마카롱이 나린의 손에서 툭, 떨어지며, 카페트 위로 차르륵 보랏빛 가루를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