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어렵기만 하다2021.10.19.
태준의 이실직고에 연 회장은 노발대발했다. 가공하지 않은 사실 그대로를 털어놓았기에 분노를 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선 보는 게 귀찮아서 당분간 어른들을 속이고 만나는 척했을 뿐이라는 사실. 그러니 나린과 약혼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사실. 현재 기준에서 후자는 사실이 아니지만 나린과 선을 보던 때로 시계를 돌려놓으면 엄연한 사실이 된다. 그러면서도 태준은 나린을 피해자로 포장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곳 사정에 어두운 나린이 자신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것이라는 항변은 의심의 여지 없이 먹혀들어 갔다.
“이 혼담, 당장 없던 일로 돌려놔라.”
연 회장은 즉시 채 여사를 불러 이렇게 지시했다. 채 여사는 어딘지 개운치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분고분 시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물러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나린을 추궁했다.
“어떻게 된 거니.”
“…….”
나린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는 태준이 짜놓은 판을 망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아무 퇴로도 없이 전쟁터에 뛰어 드는 방식으로.
“정말, 태준이가 만나는 척하자고 했고 너는 거기에 응한 거야?”
바보처럼? 채 여사가 하지도 않은 지적이 송곳처럼 파고드는 기분이다.
“…….”
진실은 진실이었으나 반쪽짜리 진실이었다. 시작은 그랬지만 지금은……. 지금의 진실은, 그는 약혼을 원하게 됐고 그걸 거절한 건 나린이라는 것.
“태준이가 묵비권 행사하라고 시키기라도 했어?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정리를 하든 뭘 하든 널 도울 거 아니니.”
계속되는 함구에 채 여사는 갑갑해 했다.
“죄송합니다.”
이곳에 온 후로 가장 많이 하게 되는 말이 이것인 것 같다. 뭐가 그렇게 잘못할 게 많은지 하루하루가 죄송한 것들뿐.
“그래서, 이 혼담 깨길 원하는 거지, 너도?”
태준이랑 합의된 거지? 채 여사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 처리가 한결 난해해질 터였다.
“네.”
불행 중 다행이네.
“알았다. 나가 봐.”
한숨 섞인 채 여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린은 그녀의 방을 도망쳐 나왔다. *** 설날 이후 그 주는 깨어진 혼담의 후폭풍으로 시끄러웠다. 덕분에 나린의 다른 선 자리 얘기는 쏙 들어갔다. 채 여사는 이 일을 수습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기울였다. 태준은 그 길로 부모님께도 고해성사를 했다. 은수라 여사는 이미 연 회장을 찾아뵙고 오는 길이란 아들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 낙담한 끝에 결국 자리보전하여 눕고 말았다. 혼담을 정리하기 위한 채 여사와의 만남도 자연히 미루어졌다. 혼담이 깨졌단 소식을 접한 세훈은 토요일을 기다려 태준과 윤완을 2501호로 불러냈다. 저 혼자서는 역부족일까 봐 준우도 우군으로 차출하였다.
“이제 그만 화해해, 너네.”
세훈은 윤완과 태준을 마주 앉혀놓고 대뜸 이렇게 윽박질렀다.
“화해하고 말고 할 게 어딨어.”
태준이 멋쩍게 웃는다. 그러나 윤완은 묵묵부답이었다. 화해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화해가 필요한 일인지가 의문이었고,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은 유치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윤완, 넌?”
그러나 세훈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
“나린이한테 이른다?”
윤완이 꿈쩍도 않자 세훈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여기서 나린이가 왜 나와.”
“역시, 연나린 이름을 들먹여야 반응이 오는구만.”
준우가 어이없어하고 세훈은 고개를 휘둘렀다.
“쟤 이중인격이야. 연나린이랑 상관없는 도윤완, 상관 있는 도윤완.”
피식거리던 준우와 세훈은 태준 앞에서 나린의 얘기를 꺼낸 게 실수가 아닌가 싶어 일시정지 했다.
“그러네. 윤완이 저러는 거 새롭다.”
태준이 기민하게 맞장구를 치며 그들의 재생 버튼을 다시 눌러 준다. 이젠 내 입장도 너희와 다르지 않아. 그의 말이 암시하고 있는 것.
“넌 괜찮냐?”
준우는 이참에 태준의 입장을 명확히 해두고 싶었다.
“응.”
“왜 생각이 바뀐 건데?”
윤완 앞에서 얘기를 꺼내려다 보니 퍽 조심스럽다. 그래서 애매모호한 문장이 되어버렸다. 왜 나린이랑 약혼하려던 생각이 바뀐 건데? 원래 물으려던 문장은 이랬다.
“나린 씨도 윤완이가 좋다고 하니까 내가 물러나는 게 맞지. 반대 상황이었으면 저 녀석도 그랬을 거고.”
태준은 별일 아닌 양 시원스레 답하였다. 그렇게 답하는 것만이 모두를 만족시키는 길이라 생각했다. 감격에 찬 세훈과 준우는 앞 다투어 태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좋은 녀석. 그러나 그들이 깜빡한 게 있었다. 이곳엔 이 우정의 향연에 찬물을 끼얹을 존재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
“……난 아닌데.”
“…….”
“난 안 물러났을 거야.”
세훈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친다.
“아오, 진짜, 너는 한 번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냐.”
“도윤완이 우정보다 사랑일 줄이야.”
준우도 부러 과장되게 탄식을 하고, 감동의 순간에 돌을 던져 망쳐놓은 윤완만이 안온함을 유지했다. 간접적으로나마 윤완의 답을 들은 태준은 오히려 속이 가뿐해졌다.
‘이러나저러나 질 싸움이었구나.’
안개처럼 뒤덮고 있던 미련이 조금이나마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 월요일이 되자 윤완의 마음이 변했다. 퇴근길에 그만 태워다 주겠다는 나린과의 약속을 지키기 싫어진 것이었다.
[오늘 몇 시 퇴근이야?]
손가락은 제멋대로 움직여서 나린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나린의 자리는 개방되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매사 철저한 그답지 않게.
[모르겠어요. 실적 보고 끝나서 일찍 들어갈 거예요. 왜요?]
[퇴근할 때 말해. 태워다줄게.]
[오늘부터는 따로 퇴근하기로 했잖아요.]
안 넘어온다, 연나린. 약속한 바가 있으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럼 퇴근하고 집에 가 있어. 데리러 갈게.]
[몇 시에요?]
[여덟시.]
일찍 들어갈 거라는 말에 의욕적으로 시간을 던져 보았는데 나린이 고민하는지 답이 늦어졌다.
‘뭘 고민하는 거야. 만나고 싶은 건 나뿐이야?’
[안 피곤하겠어요?]
[안 피곤해.]
다시 늦어지는 답장. 새 말풍선이 뜰 때까지 윤완의 눈은 메신저 창을 벗어날 줄 몰랐다.
[알겠어요.]
드디어 승낙이 떨어졌다. 윤완은 빅딜이라도 성사시킨 듯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 그러나 계획에는 변수가 생겼다. 나린을 데리러가는 길에 뒤따르는 검은 차의 존재가 포착된 것이었다. 오전에 이미 그의 레이더망에 걸렸던 승용차인데 이로써 확실해진 것 같았다. 누군가 미행을 붙였다. 빨간 신호등 앞에 정지하자마자 가장 신뢰하는 비서 손현성 차장에게 전화를 건다. CFO 자격으로 둔 정식 비서는 정 대리 한 명뿐이었지만, 그룹 차원에서는 다섯 명의 비서진이 더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손 차장은 그가 도일 소프트웨어 사업부장 시절 발굴한 인재로 그룹 소속 비서 중 한 명이었다.
[네, 부사장님.]
“번호 하나 불러줄 테니 그 차에 대해 알아봐줘요.”
[알겠습니다.]
윤완은 따라붙는 검은 차의 차종과 번호를 손 차장에게 불러 주었다.
“절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윤완이 재차 당부한 건 이런 짓을 할 상대가 빤하기 때문이다. 후보는 둘. 그의 부모님. 아니면 신혜원.
‘어느 쪽이 됐든, 목적은 내가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캐내려는 거겠지.’
[걱정 마십시오.]
“지난번 부탁한 건 진척이 있습니까?”
전화를 건 김에 그는 이전에 했던 업무 지시에 대한 중간 점검도 해보았다.
[아직 뚜렷하게 잡히는 건 없었습니다. 계속 알아보는 중입니다.]
“급한 건 아니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말했듯,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확보돼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즉각 보고하세요.”
[네, 부사장님.]
손 차장과의 통화를 마친 윤완은 곧바로 세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린과의 접선 방법을 바꾸어야만 했다. *** 윤완을 기다리고 있던 나린은 엉뚱하게도 세훈에게 끌려 나왔다.
“도윤완 만나기로 했다며? 따라와.”
세훈은 이렇게 말하고 다짜고짜 나린을 차에 태웠다.
“부사장님이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계획 변경. 내가 태워다 주기로 했어.”
세훈이 차를 출발시키며 대꾸했다.
“왜요?”
신변보호가 필요해졌으니까. 하지만 이 얘긴 할 수 없다. 절대 나린을 겁먹게 해선 안 된다는 지엄하신 명령이 있었다. 그래. 완전 명령이더라. 친구인 건지 상사인 건지.
“근데, 언제까지 부사장님이야? 준우도 오빠인 마당에.”
나린이 더 캐묻지 못하도록 세훈은 능숙히 말머리를 돌렸다.
“부사장님이 뭐 어때서요.”
“윤완이가 서운해 할 것 같은데.”
“설마요. 그런 작은 거에 연연할 분 아니세요.”
‘그랬지. 우리도 그런 줄 알았지. 널 만나기 전까지는.’
세훈은 빙그레 웃었다. 보다 보니 두 사람,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여우인 듯 곰인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애 앞에서 도윤완이 얼마나 안절부절못할까. 얼마 전 도윤완 설득 작전 때 나린의 애원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윤완의 모습이 떠오르며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세훈의 차는 강남 테라 호텔 입구에서 멈추었다. 그의 차를 알아 본 도어맨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차를 인수해갔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까지 에스코트를 받았다.
“아지트로 가는 거예요?”
세훈이 호텔 안까지 동행하자 나린은 어쩐지 맥이 빠졌다.
‘다른 오빠들까지 다 같이 만나는 건가.’
“…….”
웬만하면 침묵하지 않는 세훈이라서 그의 침묵은 긍정의 신호처럼 여겨졌다.
‘이게 무슨 데이트야. 감기 기운에도 기껏 나왔더니만.’
나린의 입술이 샐그러진다. 그러나 세훈이 침묵한 건 아까 윤완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일순 육중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미행이 붙은 것 같아. 그래서 네가 나린이 좀 데리고 와 줘야겠어. 너랑 둘이 테라 호텔 오는 것처럼 해서, 어설프게 로비에서 헤어지지 말고 룸 앞까지. 부탁한다.’
‘미행이라니. 누굴까.’
윤완의 추측대로 그의 부모님 아니면 신혜원일 것이다. 어느 쪽이 됐든 들키는 순간 골치가 아파진다. 세훈이 시름에 잠긴 새 나린이 앞장서서 2501호로 나아갔다. 목적지 설정 오류에 세훈은 파뜩 정신을 차렸다.
“어디 가?”
“2501호요.”
나린이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짓고,
“거기 아냐.”
세훈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네?”
한참을 더 안쪽으로 들어간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복도 끝 방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린 뒤, 윤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셔왔다, 네 공주님.”
“고맙다.”
“별 말씀을. 2501호에 있을 테니까 데이트 끝나고 불러.”
임무를 완수한 세훈은 왔던 길을 거슬러 2501호로 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나린이 말똥말똥 보고만 있자 윤완의 손이 잽싸게 그녀를 잡아당긴다. 나린의 몸이 방 안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꽉, 문이 닫혔다. 주변을 인식할 틈도 없이 나린의 시야는 윤완의 두 팔과 너른 가슴팍에 차단당하고 말았다. 나린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들고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나린을 꼭 껴안은 윤완은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너 하나 품에 안기가 어쩜 이리도 우여곡절이 많은지. 어렵다, 연나린. 마음을 확인하고도 어렵기만 하다.
“부사장님…….”
갈 곳을 잃고 헤매던 나린의 두 손이 윤완의 등에 살포시 안착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비빚비빚, 나린의 머리 위에서 그가 고개를 흔드는 게 느껴졌다.
“그럼요?”
“그냥.”
“…….”
언제는 나한테 그냥이란 대답, 하지 말라더니. 나린은 괜스레 부루퉁해졌다. 하지만 윤완은 금세 다정한 말로 나린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보고 싶었어서.”
나린의 마음에 살랑살랑 바람이 일었다.
“……회사에서 봤잖아요.”
윤완은 나린을 품에서 떨어뜨리며 눈을 맞추었다.
“부족해.”
봐도 봐도 부족해. 더 참을 수가 없어진 그가 나린의 허리를 잡아당기고. 그의 입술은 거침없이 나린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나린은 그가 전하는 뜨거운 숨결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짙어지는 진심과 애달프게 달아오르는 마음. 서로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겠다는 듯 마주 안은 두 연인의 팔엔 잔뜩 힘이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