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나쁜 사람이 되는 게 (40/101)

#40. 나쁜 사람이 되는 게2021.10.15.

1655803191458.jpg

  2월 첫째 주. 나린이 연 회장의 저택에서 맞이하는 첫 설 연휴가 되었다. 설 당일에는 차례를 지낸 뒤 성묘를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일정이지만 월초가 가장 바쁜 나린으로서는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 외삼촌 댁에선 유연하게 넘겼던 가족 행사도 이곳에선 다르다. 성묘하러 가는 길이 곧 아빠와 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다행히도 사수였던 민하가 배려를 해주었다. 신세를 지게 돼 미안한 나린은 새벽까지 꼬박 날을 새워 일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놓고 싶었다. 피곤한 몸으로 맞이한 설날. 성묫길에는 큰아빠 식구들이 동행을 했다. 연로한 태용은 집에 남아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16558031914587.jpg[외삼촌, 외숙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수정이 너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세훈의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나린은 단체 메시지 방을 만들어 새해 인사를 전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16558031914591.jpg[우리 나린이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16558031914591.jpg[넌 이미 복 받고 있으니까 더 받으라고는 안 할게. 보고 싶다, 연나린.]

16558031914591.jpg[나린이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숙모가 너 좋아하는 잡채 해놨는데 잠깐 들르는 것도 힘들겠지?]

애정이 듬뿍 담긴 답장들이 잇따라 도착하고 나린의 마음도 덩달아 몽글몽글해진다. 긴 시간을 달려 찾은 아빠의 묘소는 고즈넉했다. 이미 두 번이나 와본 적이 있어서인지 지난번보다는 훨씬 덤덤했다. 눈물 같은 건 나지 않았다. 혈연으로 맺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가족이 되는 건 아닌가 보다. 그럼에도 아주 슬픈 마음이 안 드는 것도 아니라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뒤엉킨 복잡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처음 태용에게 이끌려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마침내 아빠의 존재를 마주했다는 후련함이 무엇보다도 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엄마를 만났는지……. 그래서, 왜 자신과 같은 혼외자를 만들어 냈는지에 대한 원망도 없잖아 있었다. 그럼에도 낳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자신을 버려서, 덕분에 혼외자임을 모르고 크게 해줘서. 외삼촌, 외숙모의 사랑 속에 자라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속으로 감사 인사마저 했더랬다. 잠시 감상에 빠졌다 헤어난 나린은 눈치껏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환과 채 여사가 붙어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는 동안, 저만치서 세훈이 다현이 잠든 곳을 향해 눈을 감고 정지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가슴이 아려 왔다. 세훈은 다현을 참 많이 아꼈나 보다. 나린은 무의식중에 왼쪽 가슴을 문질렀다. 고개를 떨군 세훈의 실루엣 위로 저를 품에 안고 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하던 준우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각기 다른 애통함을 품은 채 성묘는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린은 윤완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16558031914606.jpg[집에 가고 있어?]

어제 전화로 공유해주었던 일정을 머릿속에 잘 입력해 놨는지 그의 물음엔 오류가 없었다.

16558031914587.jpg[네. 부사장님은 어디세요?]

16558031914606.jpg[집이야.]

16558031914587.jpg[오늘은 못 만나겠죠?]

오후엔 회사에 갈 거라고 했으니까.

16558031914606.jpg[아마도. 서운해?]

16558031914587.jpg[조금요.]

16558031914606.jpg[그럼 밤에 잠깐이라도 들를게.]

16558031914587.jpg[아뇨. 그럴 것 없어요. 그러지 마세요.]

그때 옆 자리의 세훈이 나린 쪽으로 고개를 쭉 잡아 뺐다.

16558031935762.jpg“누구야? 윤완이야?”

나린은 화들짝 놀라며 폰을 가슴에 안았다.

16558031914587.jpg“왜 남의 폰은 보세요?”

16558031935762.jpg“윤완이구만.”

새치름한 표정을 한 나린이 입을 꽉 다물고, 그 모습을 본 세훈은 흐뭇한 얼굴을 했다. 귀여운 아이. 이렇게 보니 윤완이랑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태준이 문제는 여전히 걱정되고.

16558031935762.jpg‘모르겠다. 너희들끼리 치고받고 알아서 해라.’

세훈이 점점 중립의 입장을 굳혀가는 사이 나린이 조심스레 폰을 확인한다.

16558031914606.jpg[새해 복 많이 받아, 나린아.]

담백한 메시지였는데도 입꼬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동글동글한 볼도 동산처럼 볼록 솟아올랐다.

16558031914587.jpg[부사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레는 메시지 속에 집에 돌아왔을 땐 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주환 내외와 세훈은 연 회장에게 인사를 드리고 곧장 채 여사의 친정에 다니러 갔다. 태용과 점심식사를 마친 나린이 이제 좀 쉴 수 있으려나 하며 한숨 돌리는데, 초인종이 울리며 예정에 없던 손님의 방문을 알린다.

16558031914587.jpg“태준 씨요?”

마침 1층 거실을 지나던 나린은 미옥으로부터 방문객의 이름을 듣고 되물었다.

16558031914591.jpg“네. 설이라고 인사 왔나 보네요. 직접 맞아 주세요. 이 전무님이 좋아하실 거예요.”

미옥은 나린이 가타부타할 틈도 없이 키친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16558031914587.jpg‘큰일이네.’

나린은 곤란해 하며 현관 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그래도 집에 찾아온 손님인데 맞이하지 않는 건 큰 결례였다.

16558031948745.jpg“나린 씨.”

당연히 미옥이 서 있을 줄 알았던 태준은 나린을 보자 반색을 했다.

16558031914587.jpg“오셨어요?”

16558031948745.jpg“네. 나린 씨가 맞아줄 줄은 몰랐는데…….”

진짜로 약혼을 진행하자는 얘기를 했을 때에도 이렇게 쑥스러워하진 않았던 것 같다. 어딘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16558031914587.jpg“세훈 오빠, 외가댁에 가고 없어요.”

나린은 태준이 찾아온 목적을 세훈으로 상정했다. 부디 그게 사실이기를 바라면서. 태준도 그 빤한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16558031948745.jpg“아, 오늘은 연 회장님 뵈러 왔어요.”

그럼에도 짐짓 모른 체했다.

16558031914587.jpg“할아버지를요?”

16558031948745.jpg“네. 근데 그 전에 나린 씨랑 따로 봤으면 했는데…….”

16558031914587.jpg“…….”

16558031948745.jpg“잘 됐네요. 추워도 잠깐 나올래요? 할 얘기가 있어요.”

태준의 눈빛은 묘하게 슬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린은 그의 요청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서로 확실히 정리해야 할 것도 있고.

16558031914587.jpg“잠시만 기다리세요. 겉옷 가지고 나올게요.”

홀린 듯 답을 준 나린은 2층으로 올라갔다. *** 뜰로 나온 태준과 나린은 별채 옆 벤치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나린이 가짜로 만나는 척하자던 태준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바로 그 벤치였다. 그날과 똑같이 사무치게 추운 날씨 속에 두 사람의 입술 새로 뭉게뭉게 입김이 피어올랐다. 얘기를 꺼내기 전 태준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아무래도 힘겨운 얘기가 될 것 같으니. 바로 어제까지도 태준은 고민을 거듭하며 몹시 괴로워했다. 그의 눈을 직시한 채 윤완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나린의 모습이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대체 어느 틈에 도윤완이 그토록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버린 건지.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 근무하면서? 아니면 세훈이의 생일 파티가 있던 날?

16558031948745.jpg‘내가 지아에게 간 사이, 윤완이는 혼자 남겨진 나린 씨를 챙겼던 그때…….’

그래, 어쩌면 그때부터. 나린이 마음을 깨닫고 윤완의 품에 안긴 그날 밤. 태준은 밤이 꼴딱 새도록 혼자서 차 안에 갇혀 있었다. 누가 가둔 것도 아닌데 커피 향에 마비되기라도 한 듯, 도무지 운전대를 쥘 힘이 나질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던 태준은 끝내 마음을 고쳐먹고 결심을 굳혔다. 또다시 인형 같은 여자들과의 선 자리에 나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했지만, 그럼에도 억지를 부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외사랑도 아니고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이라면. 그렇다면 물러나는 사람은 내가 돼야 맞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억지로 헤어져야 하는 고통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이기에.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윤완은 매우 소중한 친구였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린 때문에 놓아 버리기엔 쌓아온 우정이 너무나 크고 단단했다. 만일 반대 상황이었더라면. 윤완이 좋아하는 여자가 자길 선택했더라면. 그는 현명하게 물러나 줬을 거라는 모종의 확신 또한 태준이 마음을 돌리는 데 결정적 작용을 했다. 그러니 맞서지 말자.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소중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잃기 전에. 그게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마음을 돌리고 나니 이젠 실천에 옮겨 증명하는 일만이 숙제로 남았다.

16558031948745.jpg“나린 씨.”

태준이 조용히 그녀를 부른다.

16558031914587.jpg“네.”

이태준 씨……. 오늘따라 심상치 않다. 나린은 살포시 긴장을 했다.

16558031948745.jpg“사실, 저 오늘 사고 치러 왔어요.”

수수께끼 같은 말에 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16558031914587.jpg“……무슨 사고요?”

16558031948745.jpg“양쪽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을 사고요.”

16558031914587.jpg“…….”

사고라니. 조용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태준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어였다.

16558031948745.jpg“연 회장님 뵙고 이 약혼 못 하겠다 할 생각이에요.”

태준은 마침내 폭탄을 터뜨렸다. 갑작스런 폭발에 나린의 눈은 초점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16558031914587.jpg“그게 무슨 소리예요?”

16558031948745.jpg“그간 말도 안 되는 억지 써서 미안했어요.”

16558031914587.jpg“…….”

16558031948745.jpg“처음부터 말이 안 됐어요. 약혼할 것처럼 어른들을 속이자고 했던 것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이해해달라고 했던 것도.”

16558031914587.jpg“…….”

그래, 맞아. 어불성설이었지, 처음부터. 그러니 애초에 제 마음 전부를 걸었던 윤완이한텐 상대가 안 됐던 거야.

16558031948745.jpg“준우한테 들었는데, 나린 씨가 또 지아 도와줬다면서요. 윤완이 설득해서.”

더 얘기하면 결심을 번복하는 추태를 보이게 될 것 같아서 태준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목소리 크기도 공연히 한층 키워졌다.

16558031914587.jpg“그건, 지아 씨 상황이 안 돼 보여서 그런 거예요. 꼭 태준 씨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16558031948745.jpg“고마워요. 매번 도움만 받네요.”

나린은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뿐인 태준을 그저 멀거니 쳐다봤다. ‘아니에요’, ‘괜찮아요’라는 답도 너무 상투적인 것 같아 해 줄 수 없었다.

16558031914587.jpg“…….”

16558031948745.jpg“지아 문제 때 윤완이가 나린 씨 설득에 넘어갔다는 얘기 듣고 많이 놀랐어요. 그 녀석, 그렇게 남의 일에 나서는 성격도 못 되고, 쉽게 고집을 꺾는 편도 아니거든요.”

태준의 눈이 예쁜 호선을 그린다.

16558031948745.jpg“나린 씨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16558031914587.jpg“…….”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태준 씨는 얼마나 괴로울까. 괜한 감정이입이 되어서 서글퍼지는 나린이었다. 그가 왜 이 약혼을 바라게 된 건지. 안 그랬다면 그를 아프게 할 일도 없었을 텐데.

16558031948745.jpg“그러니 두 사람 괜찮을 거예요. 지난번에 차에서 내가 했던 말, 잊어버려요. 다 헛소리였으니까.”

나린의 출신이 방해가 될 거라고 경고했던 일을 내내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16558031914587.jpg“그럴게요.”

나린은 그가 조금만 아프기를 빌며 단단한 목소리로 답을 해주었다. 약혼을 진행하고자 했던 것도 그저 나린이 편하고 익숙해서 그런 것이기를. 결코 좋아져서가 아니기를. 그럴 것이다. 애초에 차선책이었으니까. 지아를 잃어버린 데에 대한 대안. 그랬으니까. 태준은 때가 됐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16558031948745.jpg“그럼 저 연 회장님께 가볼게요.”

16558031914587.jpg“잠깐만요.”

나린은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16558031948745.jpg“왜요?”

태준이 돌아본다.

16558031914587.jpg“태준 씨는 태준 씨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여긴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게 좋겠어요.”

태준이 홀로 희생하려 하는 것 같아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었다.

16558031914587.jpg“혼자서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말아요. 시작이 어땠든 저도 제 상황을 모면하려고 태준 씨 제안에 응했으니까요.”

그러나 태준의 반응은 예상 외로 단호했다.

16558031948745.jpg“안 돼요.”

16558031914587.jpg“……왜요?”

16558031948745.jpg“그럼 이 약혼을 깨는 게 쉽지 않을 거거든요.”

16558031914587.jpg“…….”

특히 우리 집 쪽에서 가만 있질 않겠지. 어떻게든 나린 씨를 붙잡으려고 혈안이 될 거야. 혹시라도 내가 지아한테 돌아갈까 봐.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절대적인 존재를 움직이는 것.

16558031948745.jpg“우리 부모님께 알릴 것 없이 연 회장님이 나서시는 게 제일 빨라요.”

그리고 연 회장님이 나서시려면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게 제일 빠르고……. 이 말을 하면 나린이 기를 쓰고 반대할 테니 속에 고이 남기는 그였다.

16558031914587.jpg“그래도…….”

나린은 혼자서 모든 짐을 떠안으려는 태준이 못내 안타까웠다.

16558031948745.jpg“나린 씨. 내가 하는 대로 믿고 기다려줘요. 나린 씨는 그냥 모르는 척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요. 어렵지 않잖아요.”

16558031914587.jpg“…….”

16558031948745.jpg“애초부터 연극을 하자고 한 건 나였으니까.”

16558031914587.jpg“…….”

16558031948745.jpg“되돌리는 것도 내가 해요.”

얘기를 마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나린을 등지는 태준의 모습은 듬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멀어지는 태준을 지켜보는 나린의 눈자위가 촉촉해졌다.

16558032016309.jpg

  미안해요. ……고마워요. 나린은 방금 전 태준으로부터 들었던 말을 속으로 고스란히 되돌려주었다.

16558031914587.jpg‘얼른 훌훌 털고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랄게요.’

그가 사라져간 돌길에 대고, 진심을 다한 작별인사를 고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