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만능열쇠2021.10.12.
테라 호텔 강남 2501호. 늘 그렇듯 네 명이 모이긴 했는데 멤버 구성이 여느 때와 달랐다. 태준을 대신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나린은 어쩌다 여기까지 끌려오게 된 건지 곱씹어봤다. 나린을 부른 사람은 준우였다. 목적은 도윤완을 불러내기 위한 미끼 역할.
‘나린아, 지금 세훈이 따라서 우리 아지트로 와줄 수 있어? 윤완이도 불렀는데 안 오겠대. 네가 온다고 하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준우가 전화로 간곡한 청을 해 왔다. 지난번 만남으로 준우와 부쩍 가까워진 나린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였다. 소식을 들은 윤완은 준우의 예측대로 마음을 바꿔 이곳 2501호로 왔다. 소집한 멤버가 모두 모이자 준우가 안건을 발표한다. 지아가 PK 백화점에 사표를 던지게 된 경위에 관한 것이었다.
“태준이가 너희한테는 말하지 말랬는데.”
긴 얘기 끝에 그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으면서.
“한지아, 진짜 속도 썩인다.”
세훈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탄식했다.
“그래서 태준이는 어떻게 하고 있는데?”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세훈의 입술 틈새를 통과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헤어질 거라면서 신경 안 쓸 거라고 하긴 하는데…….”
“…….”
“그 녀석 성격에 그게 되냐. 사람이 다 죽어간단 소릴 들었는데. 그것도 한지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
“그렇겠네.”
세훈의 씁쓸한 동조를 끝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준우가 이들을 부른 것도 궁극적으로는 태준을 돕고자 하는 것이었다. 준우가 전한 얘기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나린이었다. 단순 분풀이로 한 사람의 신성한 일터를 파괴하다니.
‘신혜원, 그 사람…… 보기보다 훨씬 더 무섭고 비열한 사람이었구나.’
“얘기 끝났으면 간다.”
윤완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가자.”
그의 시선이 나린에게로 떨어졌다.
“……어딜요?”
“얘기 다 들었으니까 나가자고.”
나린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혼란스러웠다. 저기요, 부사장님. 못 들으셨어요? 한지아 씨가 부당하게 직장을 잃었다잖아요. 이때다 싶어 준우는 나린을 볼모로 삼았다.
“갈 거면 너 혼자 가. 나린이는 우리랑 대책 의논할 거야. 그치?”
준우가 슬쩍 눈짓을 해서 나린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우가 붙잡지 않았더라도 나린은 지아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미약한 힘이나마 쓰일 데가 있다면. 애당초 준우가 이들을 불렀을 때부터 관건은 도윤완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누구보다 쉽게 해결할 수단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윤완의 신경은 온통 다른 데 쏠려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준우한테 ‘나린이’가 된 거지?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나린이 넌 무슨 좋은 생각 없어?”
오로지 윤완을 부추길 목적에서 준우는 알맹이 없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건 도리어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또 나린이라고 했다. 윤완의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찌그러졌다.
“저희 부서랑 계약하는 회계 외주업체가 있는데 충원 계획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거기에 추천해보는 건 어떨까요?”
나린은 눈을 빛내며 의견을 제시했다. 듣자마자 윤완의 잇새로 강한 바람이 삐져나왔다.
“하도업체 인력 채용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기본 중의 기본도 몰라?”
“아…….”
단칼에 의견을 반려 당한 나린은 곧장 풀이 죽었다. 날카로운 지적이 수반되어 더욱 뼈아팠다.
“그리고 지아 입장에서도 경험 없는 분야로 가는 건 부담일 거야. 같은 유통업계가 좋은데.”
준우가 거들고, 또다시 친근한 어투, 다정한 반말, 윤완의 신경이 곤두선다. 준우의 속셈을 눈치챈 세훈도 때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 힘을 실었다.
“신화 백화점은 안 되겠지? 태준이네 부모님께서 아시면 발칵 뒤집힐 테니.”
됐다. 검토 가능한 선택지를 모두 지웠다. 기대에 찬 세훈과 준우의 시선이 한꺼번에 윤완에게 집중되었다. 도윤완, 너 인맥 있잖아. Y 백화점 장영균 회장이랑 막역한 사이잖아. 그러나 기대한 대로 움직인다면 그건 도윤완이 아니었다.
“부당한 일로 잘렸으면 자른 회사를 상대로 싸워야지.”
푸시식. 준우와 세훈은 동시에 김이 빠졌다.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도와줄 수 없을까요? 어쨌든 겉으로는 지아 씨가 못 견뎌서 사표를 쓴 거지 드러내 놓고 잘린 게 아니잖아요.”
희망이 사라질 즈음 혜성처럼 구원 투수가 등판했다. 준우와 세훈의 표정이 세상 밝아진다. 똘망똘망한 눈을 한 나린은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개인이 큰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렸는데, 지아 씨가 너무 안 됐어요.”
“…….”
단정하던 윤완의 눈썹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저 여우. 그런 눈을 하면 누가 넘어갈 줄 알고.
“무슨 방법 없을까요?”
“…….”
안 돼. 울 것 같은 표정 하지 마. 네 일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거야, 대체.
“부탁이에요.”
하. 정말.
“……알았어. 도와줄게.”
윤완은 끝내 백기 투항을 하고 말았다.
윤완의 고집이 꺾이는 순간 세훈과 준우는 승리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윤완을 설득한 것 이상의 큰 수확이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도윤완을 움직일 수 있는 만능열쇠를. 문제가 터질 때마다 유용하게 쓰일 연나린이라는 치트키를.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린은 제 일인 양 뛸 듯이 기뻐했다.
“Y 백화점 경력직 면접 기회. 그 이상은 안 돼.”
들뜬 기분을 식혀 줄 마음에서 윤완이 나직이 내쏘았다.
“그게 어디야! 우리도 많은 거 안 바랐어.”
세훈이 신이 나서 답을 가로채고,
“태준이 녀석, 한시름 놓겠네. 말은 안 해도 계속 죽상이었는데.”
준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것들을…….’
본의 아니게 준우와 세훈에게 제 고집을 꺾는 기쁨을 선사한 윤완은 볼멘 표정이 되었다. *** 나린과 윤완이 점심을 먹으러 떠나고 2501호 스위트룸에는 준우와 세훈만 남았다. 함께 가자는 나린의 제의는 눈치껏 거절했다. 고집쟁이 도윤완이 큰 결단을 내려 주었는데 데이트에까지 꼽사리 낄 마음은 없었다.
“진짜 믿을 수 없다. 윤완이가 고작 몇 마디 애원에 넘어가다니.”
준우가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도 목격한 양 토로하자 세훈이 고개를 휘둘렀다.
“말도 마. 나린이한테 들으니까 싱가포르에서는 더 가관이었더라.”
“진짜?”
준우는 재밌는 영화라도 발견한 눈을 했다. 익숙한 캐릭터의 반전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는 없었다.
“어. 고고하신 도윤완 님이 멀라이언 파크를 걸으셨댄다, 그 더위에. 믿어지냐?”
“진짜야?”
반전도 어느 정도라야지.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나린이가 지하 마트에 초콜릿 사러 가는 것도 따라가 줬대.”
“말도 안 돼.”
“나도 깜짝 놀랐어. 윤완이 녀석, 나린이한테 백 퍼센트 진심이야.”
“그러게…….”
이쯤 되면 준우도 세훈과 똑같은 심경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된다. 이태준과 도윤완 사이가. 혼외자라는 나린이의 신분이. 거기다 이 사실이 신혜원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 났네…….”
“누가 아니래.”
같은 표정이 된 세훈과 준우는 데칼코마니처럼 서로를 마주 보았다. *** 차르륵. 커튼이 걷히며 하얗다 못해 투명한 빛들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몇 평 안 되는 스튜디오 원룸이라서 몇 조각 빛으로도 방 안이 훤해졌다. 침대 위, 이불 속에 갇혀 있던 여자가 움찔거렸다.
“일어나요.”
커튼을 걷은 남자는 단호한 투로 명령했다. 얼굴 위를 덮은 긴 생머리 사이로 그녀가 힘겹게 눈을 뜬다.
“기호 씨…….”
“일어나요. 죽 사 왔어.”
그녀는 만사 귀찮다는 듯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할 수 없다는 듯 거칠게 움직인 기호의 손에 이불이 맥없이 들추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면서 감춰져 있던 원망 어린 눈초리가 단박에 드러났다.
“왜 그래요, 정말…….”
볼품없는 그녀의 모습이 기호의 가슴을 아프게 그었다. 그는 아직 그녀를 처음 보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가죽 공예 동호회에서 처음 만난 날, 싱그럽고 푸릇푸릇하던 그녀, 지아를.
“일단 죽부터 먹어요. 이러다 건강 해쳐요.”
고개를 저을 힘도 없어서 지아는 여린 숨만 삼켰다 뱉었다 했다.
“싫어요…….”
삶에의 의지를 상실한 여자.
“그럼 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먹고 굶어 죽을 생각이에요?”
기호가 답답해서 소리쳤지만 지아는 꿈쩍 않았다.
“내가 죽든 말든 기호 씨가 무슨 상관인데요…….”
지아의 기운 없는 목소리는 허무한 공기 소리로 가득했다.
“상관있죠. 지인의 죽음이 남은 사람들한테 얼마나 상처인 줄 알아요?”
기호는 짐짓 퉁명스레 대꾸하며 지아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여태껏 단호했던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억지로 숟가락을 받아든 지아가 기호를 쳐다본다. 기대 같은 건 하지 않겠다는 흐리터분한 눈빛이었다. 모든 걸 잃은 내게 좋은 소식이랄 게 뭔가요. 설마, 태준 오빠가 돌아오겠다고 하기라도 했나요……. 그럴 리 없을 텐데……. 오빠는 이제 나 같은 건 완전히 잊기로 한 것 같았으니까. 그 연나린인가 하는 여자랑은 가짜로 약혼하는 척하는 거라더니,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취업 기회가 생겼어요.”
기호는 제 서류 가방에서 투명 파일 하나를 꺼내 지아에게 내밀었다.
“Y 백화점 경력직 채용 자료예요. 이거 보고 이력서랑 면접 준비해요. 잘 준비하면 좋은 결과 있을 거예요.”
“……갑자기 이건 어디서 났는데요?”
“서치하다가 찾았어요. 운이 좋았죠. 열심히 해서 꼭 합격해요. 좋은 기회니까.”
서치를 했다는 것도, 운이 좋았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기호는 어제 불쑥 저를 찾아와 서류를 건넸던 정체불명의 남자를 떠올렸다.
‘누구죠? 이걸 준 사람이. 신화 화학 이태준 전무입니까?’
난데없는 선의의 출처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남자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이게 곧 합격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 이력서랑 면접, 제대로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그저 반복된 충고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역시 이태준 전무밖에 없겠지. 이런 도움을 줄 사람은.’
헤어졌어도 신경 쓰이긴 했나 보다. 지아가. 기호는 지아를 측은한 눈으로 쳐다봤다.
‘자기를 제대로 보호해주지도 못하는 남자가 대체 뭐가 좋다고.’
뜻밖의 취업 기회를 받아든 지아는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절망스럽던 상황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기호는 지아의 두 볼에 핏기가 도는 걸 보고 슬며시 마음을 놓았다.
“참.”
갑자기 생각난 듯 지아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온다. 볼펜 모양의 녹음기가 슥, 기호 앞으로 내밀어졌다. 기호의 눈이 반짝였다.
“녹음 성공했어요?”
“네.”
이 녹음기는 기호가 준 것이었다. 녹음기를 주면서 혜원이 행패를 부릴 때 잊지 말고 녹음을 하라고 당부한 바 있었다.
“근데 마지막 날밖에 못 했어요. 그날은 저도 못 참고 밀치는 바람에……. 그 여자 비명 소리도 같이 녹음 됐더라고요.”
기호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거, 일단은 내가 보관하고 있을게요.”
“…….”
“아마 당장은 쓰지 못할 거예요. 지아 씨 말대로 신혜원 그 여자 비명 소리도 녹음됐다면……. 얼마든지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니까요.”
지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태준과 만난다는 이유로 신화 그룹 측으로부터 당했던 부조리들을 돌이켜 보면 혜원이 가진 힘도 짐작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걱정 마요, 지아 씨. 나 지금 열심히 취재 중이에요. 쉽진 않겠지만 지아 씨 같은 피해자, 얼마든지 더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안하무인이 지아 씨만 괴롭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기호는 용기를 내서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지아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개었다.
“약속할게요. 이 녹음이 가장 결정적으로 쓰일 수 있을 때 헛되지 않게 쓰겠다고. 나 믿을 수 있죠?”
지아는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호는 창조 일보와 함께 국내 2대 언론사인 정음 일보 사회부 기자였다. 지아로부터 혜원의 실체를 전해 들었던 날, 그는 혜원의 정체를 폭로하는 기사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지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여자의 민낯을 세상에 까발리리라. 기호의 의지는 결연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