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후회하지 않을게요 (38/101)

#38. 후회하지 않을게요2021.10.08.

네 개의 바퀴가 일사불란하게 속도를 줄인다. 윤완은 사이드브레이크를 당기면서 옆자리의 나린에게 눈길을 주었다. 나린은 연신 하품을 해대면서도 악착같이 깨어 있었다.

1655803148313.jpg“자라니까.”

졸음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나린을 안쓰러워하며 윤완이 말했다.

16558031483135.jpg“어떻게 그래요.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예의가 아니죠.”

나린은 오른손으로 입마개를 만들고 그 아래서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윤완의 손이 헝클어진 나린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못 이긴 척 그냥 잘 법한데도 꾹 참아낸 나린이 대견하기만 했다.

16558031483135.jpg“또 운전해서 가려면 피곤하겠다. 그냥 택시 탈걸 그랬나 봐요.”

1655803148313.jpg“그럼 내 마음이 편치 않지.”

16558031483135.jpg“그래도……. 또 언제 가요.”

1655803148313.jpg“금방 가. 걱정 마.”

16558031483135.jpg“아니면 제가 데려다드릴까요? 안 졸리게 옆에서 계속 말 걸어 드릴게요.”

1655803148313.jpg“말 되는 소리를 해.”

16558031483135.jpg“진짠데.”

1655803148313.jpg“그다음엔 어떻게 올 건데?”

16558031483135.jpg“안 오고 근처 24시간 패스트푸드점 같은 데 가 있으면 되죠.”

1655803148313.jpg‘쓸데없는 소리.’

윤완이 일침을 가하려는데 나린의 다음 말이 더 빨랐다.

16558031483135.jpg“실은 지금도 그럴까 고민 중이거든요.”

윤완의 머리가 기우듬하며 어깨와의 거리를 좁혔다.

1655803148313.jpg“왜?”

16558031483135.jpg“시간이 너무 늦어서……. 미옥 아줌마한테 미안해서요.”

출입의 부자유. 나린이 이곳에 온 뒤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비밀번호만 알면 타인의 도움 없이도 언제든 드나들 수 있었던 외삼촌 집과 달리, 이곳은 반드시 누군가 문을 열어줘야 했다. 나린은 야근을 할 때마다 졸린 눈으로 문을 열어주는 미옥 앞에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16558031483135.jpg“하루 종일 고단하셨을 텐데…….”

나린의 덧붙임에 윤완은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눈을 했다.

1655803148313.jpg‘넌 안 피곤하고?’

그러다가 나린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음을 상기해낸다. 그랬지, 내가 반했던 너는. 파티에서 곤경에 처한 지아를 구해주고, 선뜻 태준이랑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랬었지.

1655803148313.jpg“잠깐 깨는 건데 뭐 어때.”

16558031483135.jpg“그게 얼마나 피곤한데요.”

제 처지는 한 터럭도 고려 않는 나린 앞에서 윤완은 백기를 들었다.

1655803148313.jpg‘그래. 너는 그렇게 다른 사람 생각만 해라. 네 생각은 내가 다 할 테니.’

그러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윤완의 머리를 스친다. 이 기회에 소소한 복수나 해 볼까? 윤완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나린은 알쏭달쏭한 표정이 되어서 윤완을 예의주시했다.

16558031512459.jpg[뭐야……. 몇 신데 전화야…….]

짧은 통화 연결음 끝에, 한창 단잠에 빠져 있던 상대방이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난 투로 응답했다.

1655803148313.jpg“잠깐 나와. 너희 집 앞이야.”

16558031512459.jpg[이 시간에……? 미쳤냐…….]

밤인지 새벽인지 명확히 가를 수 없는 시각. 졸음에 겨운 전화 속 말소리가 하염없이 늘어진다.

1655803148313.jpg“얼른 나와라. 끊는다.”

16558031512459.jpg[야…….]

윤완은 단호하게 종료 버튼을 누르고 폰을 코트 안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1655803148313.jpg“나가자. 세훈이가 문 열어 줄 거야.”

16558031483135.jpg“……네?”

나린이 뭐라 물을 틈도 없이 윤완은 새벽 공기 속으로 성큼 들어가 버렸다.

16558031483135.jpg“세훈 오빠한테 전화한 거예요?”

다급하게 따라 내리며 나린이 재차 확인했다.

1655803148313.jpg“응.”

16558031483135.jpg“왜요?”

복수하려고. 내색하진 않았어도 지난번 약점 잡혀 놀림당했던 일을 앙금으로 간직하고 있던 윤완이었다. 당하고는 또 못 살지, 내가.

1655803148313.jpg“세훈이는 좀 피곤해도 되잖아.”

별일 아니란 듯 던져진 답에 나린의 눈이 양옆으로 길어졌다. 서른을 훌쩍 넘겨서도 이렇게 유치하다니. 저 넷은 그래도 다른 남자들에 비해 어른스러운 줄 알았는데. 별안간 담요를 덮은 듯한 온기가 나린을 둘러쌌다. 그 온기만큼이나 짙은 숲의 향기가 나린의 주위에 결계를 친다. 추워서 잔뜩 움츠러든 나린을 윤완의 두 팔이 포옥 감싸 안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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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031483135.jpg“세훈 오빠 나온다면서요…….”

1655803148313.jpg“바로 나오는 거 아니니까.”

16558031483135.jpg“그래도…….”

1655803148313.jpg“…….”

마냥 행복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지진과도 같은 불안이 일었다.

16558031483135.jpg“있죠…….”

1655803148313.jpg“…….”

뒷말은 차마 나오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아직 윤완이 혼담을 정리한 줄 모르는 나린은 줄곧 혜원을 마음에 걸려 했다. 그의 마음에 응한 이후로 줄곧. 그렇지만 먼저 얘기하지 않는데 굳이 나서서 묻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말해 주겠지. 최적이라 판단하는 때가 오면. 무한한 신뢰가 절로 생성되는 사람. 나린에게 윤완은 그런 존재니까. 그러나 윤완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윤완은 나린이 혜원의 일을 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소문이 나린의 귀에까지 닿았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것이었다. 나린이 말을 잇지 못하자 윤완은 나린을 품에서 떨어뜨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1655803148313.jpg“말해. 괜찮으니까, 뭐든.”

그때 철컹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고,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세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16558031512459.jpg“뭐야, 너네…….”

바짝 붙은 두 사람의 거리에 잠이 확 달아나는 세훈이었다. 그 틈을 타 윤완은 날름, 나린을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불시의 기습에 세훈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길을 터 주었다.

1655803148313.jpg“고맙다.”

목적을 달성한 윤완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남기고 떠난 뒤,

16558031512459.jpg‘당했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세훈의 뒤통수를 강타했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하지만 세훈은 방금 목격한 흥미로운 장면 덕에 분한 마음을 금방 삭일 수 있었다. 윤완이 가고 없는 이상, 만개한 호기심은 온전히 나린의 몫이었다.

16558031512459.jpg“어떻게 된 거야? 둘이 사귀어?!”

나린은 대답을 피하며 재빨리 안으로 이동했다. 세훈이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질문 폭탄을 퍼부어댔다.

16558031512459.jpg“이 시간까지 둘이 뭐 했는데? 뭐 하다가 이제 들어오는데? 나린이 너, 야근한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16558031483135.jpg“…….”

한 번 대답해주기 시작하면 다른 질문에도 대답을 해줘야만 한다. 나린은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침묵이 긍정의 신호가 되지 않도록 부정해야 할 말들에도 침묵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16558031512459.jpg“연나린.”

2층에 올라와서 세훈은 내내 장난스럽던 분위기를 일순간에 바꾸었다.

16558031483135.jpg“네?”

그래서 나린 또한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558031512459.jpg“그러니까, 선택한 거지?”

16558031483135.jpg“……뭐를요?”

16558031512459.jpg“윤완이를.”

16558031483135.jpg“…….”

16558031512459.jpg“이태준, 도윤완 사이에서 윤완이로 결정한 거…… 아냐?”

애초에 내 손에 결정권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6558031483135.jpg“네.”

마음은 그랬으니까. 부사장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 버렸으니까.

16558031512459.jpg“……복잡해졌네.”

하필 선택을 해도……. 세훈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

16558031483135.jpg“깨워서 죄송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세훈이 고민에 빠진 사이 나린은 잽싸게 인사말을 던지고 제 방으로 달음질쳐 왔다. 복잡하다는 거,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는데 세훈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심장에 경련이 일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게 이렇게나 행복한데. 하루하루 이렇게 빠져들고 있는데. 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손을 놓지 않는 거……. 아니, 그 사람은 할 수 있을까. 세상이 무너져도 나를 고집하는 걸.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 너무 많은 그의 세상에 오롯한 제 자리가 존재하긴 하는 건지 두려워졌다. 어쩌면 신선한 바람에 흔들린 짧은 외유로, 순간의 달콤하고 허무했던 꿈으로 끝이 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16558031483135.jpg‘후회하지 않을게요.’

잠시나마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걸. 잠시나마 내가 당신의 전부였던 걸.

16558031483135.jpg[오늘 고마웠어요. 잘 자요.]

나린은 윤완에게 마음을 다한 메시지를 보냈다. 이 메시지가 그의 귀갓길을 외롭지 않게 보살펴 주길 바랐다. *** 토요일 오전, 연 회장의 지시로 온 식구가 다이닝룸에 모였다. 화목한 가족 식사라는 기치 아래 테이블 위엔 평소엔 식탁에 잘 오르지 않는 브런치 메뉴가 차려져 있다. 밤샘의 후유증은 하루건너 온다고 했던가. 나린의 컨디션은 요 몇 달간 가장 최악이었다. 목요일에 못 잔 잠을 토요일 오전에 다 자리라 벼르던 나린에게 이 모임 통보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16558031555403.png“근데, 도윤완 부사장은 무슨 일이라니?”

연태용 회장이 급한 연락을 받고 자리를 비운 사이, 막 준우의 약혼 소식을 전해 나린을 놀라게 한 채 여사가 또 한 번 화제를 바꿨다. 제 발 저린 나린은 괜히 주스 잔을 만지작댔다. 졸음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16558031512459.jpg“왜요?”

세훈도 뜨끔했지만 시치미를 뗀다.

16558031555403.png“창조 일보에서 혼담 무른 것 같던데. 소문에 그래.”

16558031512459.jpg“창조 일보에서요?”

도일 그룹이 아니라? 이건 좀 뜻밖이었다. 세훈이 아는 한 약혼 얘기를 엎길 원했던 건 윤완 쪽이었는데. 실상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혜원이 선수를 친 것이었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윤완 쪽에서 거절을 당한 것으로 굳어지는 모양새였다.

16558031555403.png“별일이지. 도일 그룹 차기 안주인 자리를 마다하다니 말이야. 그런 자리는 신 전무 아니면 감당할 사람도 없을 텐데.”

채 여사는 숨을 골랐다.

16558031555403.png“어쨌든 그 자리가 공석이 됐으니 노리는 사람이 많겠네.”

나린은 숨이 콱 막혔다. 도일 그룹 차기 안주인 자리. 타이틀 참 화려하기도 하다. 그래도 혜원이 나서서 혼담을 깼다고 하니 내내 돌덩이 같던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용건을 마친 연 회장이 다이닝룸으로 되돌아오고 가십거리로 샜던 대화는 중단이 됐다. 졸음이 엄습해오는 가운데 나린은 두 눈을 부릅뜨려 노력했다. 얼른 이 자리가 끝나서 낮잠이나 실컷 잤으면 좋겠다. 나른함에 몸도 마음도 노곤노곤하였다. *** 혜원의 손에 들린 병이 180도 뒤집혔다. 그럼에도 와인은 고작 한두 방울 떨어지는 게 다였다.

16558031572911.png“한 병 더 가져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진 발음이었는데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웨이터가 같은 병을 내왔다. 와인을 따라주려는 친절한 손길은 혜원이 거부했다.

16558031572911.png“그만 나가…….”

웨이터가 프라이빗 룸을 빠져나가는 순간 바통 터치라도 하듯 재오가 등장했다.

1655803157292.jpg“대낮부터 뭐하냐.”

16558031572911.png“웬일이야……? 여긴 어떻게 알았고……?”

풀어진 눈을 한 혜원이 재오를 올려다본다.

1655803157292.jpg“강 비서한테 들었어.”

16558031572911.png“가지가지 한다, 윤재오……. 이젠 내 비서랑도 연락해……?”

1655803157292.jpg“비꼬지 말고. 걱정돼서 온 거니까.”

16558031572911.png“필요 없어…….”

창조 일보에서 도일 그룹과의 혼담을 깼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간 끝에 오늘 아침 재오에게까지 도달했다. 재오는 즉각 혜원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겨우 찾아낸 혜원은 보다시피 매우 처참한 상태였다. 이게 어딜 봐서 혼담을 파기한 사람의 모습인가. 누가 봐도 파기 당한 피해자의 몰골인데. 재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혜원의 손에서 와인병을 빼앗았다. 도윤완이라면 간도 쓸개도 빼줄 것처럼 매달리던 걸 잘 알기에 약혼을 무르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랬다.

16558031572911.png“줘…….”

1655803157292.jpg“그만 마시고, 어떻게 된 건지나 얘기해 봐.”

16558031572911.png“뭐가…….”

1655803157292.jpg“도윤완이 먼저 깨자고 한 거지? 나한테까지 거짓말할 생각 말고.”

혜원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재오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감히 누가 나의 여신을 울린단 말인가.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1655803157292.jpg‘도윤완.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녀석.’

1655803157292.jpg“이유가 뭐래?”

16558031572911.png“나도 몰라.”

혜원은 테이블 위로 몸을 쓰러뜨렸다.

16558031572911.png“진짜 죽고 싶어……. 사랑 같은 거 바라지 말라고 했던 사람한테 내가 너무 매달렸던 걸까…….”

도도한 혜원과 하등 어울리지 않는 자책에 재오는 이를 꽉 깨물었다.

1655803157292.jpg“내가 알아봐 줘?”

16558031572911.png“오빠가 무슨 수로? 도윤완이랑 앙숙이면서.”

맞는 말이었다. 기세등등하게 제의한 것과 달리 방법이 없었다. 윤완에게는 미행을 붙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어설프게 움직여서 PK 그룹에 타격을 입히기라도 하면 이미 그룹 승계 후보에서 저만치 밀려나 있는 그는 변명의 기회도 없이 내쳐질 게 뻔했다.

1655803157292.jpg“연나린 때문은 아니겠지?”

재오는 싱가포르행 비행기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16558031572911.png“도윤완이 미쳤어? 이태준이랑 약혼할 여자를…….”

1655803157292.jpg“그건 그렇지만.”

16558031572911.png“도움도 안 될 거면서 헛소리나 할 거면 그냥 꺼져 줄래…….”

1655803157292.jpg“말 한번 교양 있게 한다.”

동정심이 인 재오는 어떻게든 혜원을 위로하려 했지만 혜원은 그와 눈을 맞출 마음조차 없는 듯했다. 오직 한 가지. 어떻게든 이 약혼을 되돌려야겠는데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혜원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이렇게 술에 취해 현실을 도피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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