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여우가 따로 없네2021.10.05.
막 데이터 점검을 마친 나린은 프로그램 실행 버튼 클릭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긴 시간 집중해야 했던 인건비 결산으로부터 드디어 해방이다. 프로그램 오류라는 무시무시한 우발 사태가 남아 있긴 해도 집중을 요하는 작업은 대강 마무리한 셈이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실행 버튼을 클릭하고, 시간을 확인한다. 밤 아홉 시. 프로그램 수행이 완료되는 데 걸리는 시간과 간략한 결과 보고 작성 시간까지 합하면 앞으로 두 시간은 더 필요했다. 사무실엔 제법 많은 수의 직원이 남아 있었다. 월말 월초가 유달리 바쁜 나린의 부서는 반이나 퇴근을 못 한 상태였다. 피로에 전 팀원들 틈을 비집은 나린의 시선이 불 켜진 윤완의 방에 가 닿았다.
[먼저 퇴근하셔도 되는데.]
나린은 걱정되는 마음에 메신저를 보냈다.
[괜찮아.]
[아무리 빨라도 두 시간은 더 걸린단 말이에요.]
[상관없어.]
[너무 늦으면 피곤하잖아요.]
[안 피곤해.]
단답형이어도 애틋한 마음만큼은 장문처럼 전달되어 와서 나린은 사르르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같은 부서 후배 진원이 나린의 자리로 다가왔다.
“선배님. 팀장님이 법카로 커피 사 오라시는데 뭐 드시겠어요?”
나린은 허겁지겁 메일함을 띄워 메신저 창을 가렸다.
“그래? 난 안 마셔도 되는데…….”
그러다가 남아 있는 팀원 중 자신이 진원 다음으로 막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들고 오기 힘들 텐데 같이 가.”
프로그램 화면이 별문제 없다는 걸 확인한 나린은 흔쾌히 진원을 따라나섰다. *** 이럴 때 메뉴라도 통일해주면 좋으련만 부서 선배들의 주문은 제각각이었다. 거기에다 손님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한참 먼 대기 번호와 가짓수 많은 주문량에 음료가 준비되려면 제법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기다림이 길어질 게 빤하여 진원과 나린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
막 진동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진원의 시선이 카운터에 멈춘다. 나린의 고개도 진원을 따라 비틀어졌다. 카운터 앞, 주문을 하고 있는 인사팀장 뒤에 윤완이 훤칠한 키를 자랑하며 모델처럼 서 있었다.
“부사장님도 아직 퇴근 안 하셨네요.”
들키지 않게 속닥거린다고 진원이 상체를 쑥 들이밀었다. 나린은 윤완이 볼까 봐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저 때문에 괜한 불똥이 튈 일은 없길 바라면서. 마음을 고백한 상대가 막강한 권한을 쥔 존재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난다. 주문을 마친 인사팀장과 윤완은 픽업대 쪽으로 가려다 보니 자연스레 진원과 나린이 있는 방향으로 오게 됐다.
“연나린 대리.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인사팀장이 반갑게 알은체하였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부사장님.”
“여기 앉아도 돼요?”
윤완의 걸음이 멈춘 걸 알아챈 인사팀장은 기민하게 허락을 구했다.
“그럼요. 앉으세요.”
인사팀장에게 답을 해주면서도 나린의 눈은 어쩔 수 없이 윤완을 좇았다.
“월말이라 재무팀이 다 늦나 보네.”
“네.”
“피곤하겠어요.”
“아니에요.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나린 대리는 입사 때부터 쭉 재무팀이었지?”
“네.”
“근데, 여기 이 친구는…….”
처음 본다는 듯 인사팀장이 말끝을 흐리고,
“안녕하십니까! 이진원 사원입니다!”
앉은 채로 넙죽 수그러진 진원의 머리는 금방이라도 테이블에 닿을 듯했다. 일 년도 안 된 신입답게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그래요. 수고가 많아요. 나린 대리도 벌써 후배가 생겼구나.”
인사팀장은 허허허, 사람 좋게 웃었다.
“후배 생긴 지 한참 됐죠. 저도 이제 5년 차 되어가는걸요.”
“와. 벌써 그렇게 됐단 말이야? 신입사원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저도 상무님께서 부장님이시던 게 엊그제 같아요.”
인사팀장은 나린이 친하게 지내던 선배들 중 유일하게 임원으로 승진한 사람이다. 나린이 따르는 선배들은 대부분 후배들 사이에서만 평판이 좋고 상사들로부터는 그렇지 못했다.
“이진원 사원은 재무팀 지원해서 갔어요?”
“네. 마침 전공이 경영학이라서 지원했습니다!”
진원의 목청은 쩌렁쩌렁했다. 윤완을 의식하다 보니 성량 조절에 실패한 탓이었다.
“그렇구먼. 전공을 살릴 수 있으면 좋지요.”
인사팀장은 능숙하게 나린과 진원 사이를 오가며 대화를 주도했다. 원체 오지랖이 넓기도 했지만 윤완 앞에서 제 능력을 호소하고자 하는 목적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윤완은 이 테이블에서 오가는 대화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나린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볼 뿐이다. 그 시선을 모르지 않는 나린은 슬슬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빨리 진동벨이 울렸으면 좋겠는데…….
“아, 맞다, 선배님.”
그때 진원이 나린에게 말을 걸고.
‘안 돼. 그러지 마. 도윤완 부사장님 앞에서 괜한 말실수 하면 안 된단 말이야.’
“응?”
긴장한 속마음과는 달리 후배를 대하는 나린의 태도는 친절하기만 했다. 진원과 눈을 맞춘 나린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 걸려 있었다. 그걸 본 윤완은 가슴이 할퀴어지는 기분이었다. 고작 이런 것에 질투를 느낄 만큼 속이 좁았나.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이따 사무실 가서 뭐 좀 여쭤봐도 돼요?”
“아, 그럼. 되지.”
나린이 진원에게 반말을 하는 것도 너무 가까운 사이처럼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의 다 하긴 했는데 전월이랑 비교하다 보니 의문이 생겨서…….”
“그래. 올라가서 같이 보자.”
이게 굳이 지금 할 말인가. 나중에 둘만 남았을 때 해도 될 것 같은데. 나린은 의아했지만 군말 없이 수락했다. 나린의 의심대로 진원의 이 행동에는 나름의 속셈이 감추어져 있었다. 아직 청운의 꿈을 간직한 사원 1년 차 진원은 제 넘치는 열의와 성의를 윤완에게 어필하고 싶었다. 사원급이 하는 실무 따위 철저히 그의 관심 밖인 줄도 모르고. 도리어 지나쳐서 질투심이나 들쑤시고 말았다. 드르르르르. 때마침 진동벨이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고, 잽싸게 낚아챈 나린은 곧장 픽업대로 달려갔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진원도 싹싹하게 인사를 한 뒤 나린을 뒤따랐다. 픽업대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윤완은 업무고 뭐고, 나린을 끌고 나와 집에 데려다 놓고만 싶었다. *** 불운이 찾아왔다. 지난달엔 아무 문제 없던 프로그램이 다량의 오류 메시지를 토한 것이었다. 절망한 나린은 머리를 세게 움켜쥐며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왜 그러세요, 선배님? 뭐 도와드려요?”
막 일어서서 가방을 챙기던 진원이 파티션 너머의 나린을 굽어봤다.
“아냐. 시스템 문제야…….”
“아이고. 또 언제 끝날지 모르겠네요.”
“응.”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하면 안 되나. 계속 기다리셔야 해요?”
“후속 일정 때문에 안 되지. 먼저 들어가.”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주위를 둘레둘레 하자 이 너른 사무실에 진원과 자신 덜렁 둘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벌써 열 시 반이었다.
“괜찮아.”
“그럼 이따 택시 탔을 때 메시지 주세요. 위험하니까.”
“걱정 말고 어서 가. 피곤할 텐데.”
“네, 선배님.”
“고생 많았어.”
진원이 떠나고 이젠 정말 나린 혼자 덩그마니 남겨졌다. 컴컴한 사무실을 밝히는 것이라곤 재무팀 자리를 국지적으로 비추는 형광등 불빛과 윤완의 방에서 가늘게 새어 나오는 몇 가닥 빛줄기가 전부였다. 출근 때부터 철야 근무를 각오하고 온 시스템 담당자는 오류를 잡으려면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느긋한 메신저를 보내왔다.
‘마냥 기다리기엔 지루한데…….’
CFO실을 바라보는 나린의 두 눈에 담대함이 실린다. *** 빼꼼히 고개를 내민 나린이 살그머니 방 안의 동태를 살폈다. 윤완은 노크도 없이 제 방문을 열어젖힌 겁 없는 손님을 멀뚱히 쳐다봤다.
“프로그램 오류 나서 무한 대기 상태예요.”
들어오라는 허락도 안 떨어졌는데 나린이 생글거리며 발을 들여놓았다. 이렇게 당돌한 면이 있었나.
“그래서, 시스템운영팀장한테 전화해 줘?”
윤완이 심드렁히 대꾸하고.
“아뇨!”
당황한 나린의 목소리가 커진다. 윤완의 전화 한 통이면 이 오밤중에 시스템운영팀 전체가 비상사태에 돌입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치면 다행이게. 몇 달에 걸쳐 결산 프로그램 로직을 갈아엎어야 할지도 모른다. 같은 월급쟁이 처지에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살포시 문을 닫은 나린은 조심스러웠던 지금까지의 태도를 조금 더 대담한 것으로 바꾸었다. 성큼, 나린이 윤완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
윤완의 시선은 늘 그렇듯 나린에게 결박된 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여기까지 들어와 보겠어요.”
CFO 집무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본 나린은 윤완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저 웃음이 잠깐 다른 남자를 향했을 뿐인데도 온 신경이 곤두섰던 불쾌한 기억은 윤완의 속내를 마구잡이로 흩뜨려놓았다. 나린의 손가락이 ‘CFO 도윤완 부사장’이라고 쓰인 투명 삼각 명패를 문질렀다.
“저도 막 입사했을 땐 CFO가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꿨었는데…….”
신입 시절을 회상하자 어쩐지 미소가 새어 나왔다.
“왜 허무맹랑해?”
“우리 회사는 한 번도 여성 CFO가 없었거든요. 모르셨어요?”
현실을 깨닫고 떠나보낸 꿈을 얘기하는데도 나린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꿈은 떠나갔어도 열심히 살아내고자 하는 마음가짐만큼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서. 의자에서 일어선 윤완은 나린을 제 자리에 끌어다 앉혔다. 영문을 몰라서 크게 깜빡 깜빡거리는 나린의 눈에 눈을 맞추며 윤완이 상체를 낮추었다.
“잘 어울리네.”
“…….”
“그러니까 열심히 해서 이 자리 꼭 가져가.”
찰나의 정적. 나린의 팔이 불시에 윤완의 목을 감싸고. 윤완의 체온이 일시에 높아졌다.
“…….”
“외조해줄 거예요?”
장난스러운 나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경계를 허문 이 여자는 이리도 사랑스럽다. 위험해. 대체 어디까지 빠져들게 만들 셈이야. 윤완은 속이 타들어 갔다. 너무 예뻐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눈앞에 있는데도 금방이라도 놓쳐 버릴 것 같은 초조함이 그를 덮쳐왔다. 나린의 팔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윤완의 얼굴이 나아갈 방향은 오직 한 군데였다. 그는 유일한 길을 향해 직진했다. 눈꺼풀을 가지런히 떨어뜨린 나린은 제 입술 위를 불시에 덮친 온기를 고이 흡수해냈다.
한참이나 나린의 입술을 덥히던 윤완의 입술이 마침내 떨어지고. 여전히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그가 멈추었다. 당장이라도 손 붙잡고 나가고 싶다. 여길 벗어나서 마음껏 안아줄 수 있는 곳으로. 우리 둘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밤새도록 품 안에 가둬둘 수 있었으면……. 밤새 사랑해 줄 수 있었으면……. 이 예쁜 아일.
“이제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숨을 고른 나린이 속삭이고 윤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곳이 일어선 나린은 윤완을 잡아끌어 다시 의자로 되돌려놓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조화로워 보인다는 듯 두어 번 목을 까딱거렸다.
“역시 이 자리는 부사장님이 딱이에요.”
윤완은 나린이 하는 대로 가만히 따라 주고 있었다. 뭐든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고픈 사람이니까.
“안 졸려요?”
“괜찮으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일해.”
“알겠어요.”
“…….”
“먼저 들어가라고 안 할게요. 그러니까 꼭 기다렸다가 태워다주세요.”
윤완의 다정함에 용기가 솟아난 나린은 슬며시 투정을 부려 보았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요.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건지도 모르면서. 우리 앞에 놓일 가시밭길이 얼마나 험난할지 감조차 없으면서. 그럼에도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한없이 팽창해 가기만 해서. 나린은 윤완의 입술에 짧게 입술을 대었다 뗐다. 불의의 일격에 윤완의 뺨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얼른 끝내고 올게요.”
깜찍한 행동과 상반되는 단조로운 톤. 있는 대로 불을 질러 놓고 홀연히 떠나가 버리는 무책임함까지. 문을 통과해 사라지는 나린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윤완은 마냥 애가 닳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여우다, 연나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척하더니 이런 여우가 따로 없네. 그럼에도 나서서 제풀에 홀려주고픈 귀여운 여우 짓이었다. 눈이 멀었다고 하면 영원히 먼 채로 살아가고 싶을 만큼. 매일매일 새롭게 마주해야 하는 제 모습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행복해서 피식 웃음이 비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