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베일에 싸인 과거2021.10.01.
달아오른 뺨을 매만지며 계단을 오른 나린은 2층 복도 초입에서 세훈과 조우했다. 세훈은 마침 아버지 주환의 호출을 받고 1층 서재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늦었네?”
세훈의 고개가 기우뚱 사선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본래 자리를 찾았다.
“오늘은 늦는 날도 아닌데 바빴어? 윤완이가 일을 막 던지나?”
윤완이가. 들려온 이름에 나린의 볼이 거듭 달아올랐다.
“아뇨.”
“일찍 일찍 다녀. 우리 어머니가 은근 신경 쓰신다, 너. 안 그래도 평사원으로 남의 회사 다니는 거, 말씀은 안 하셔도 얼마나 못마땅해 하시는데.”
“네, 조심할게요.”
때 아닌 잔소리를 퍼부은 세훈은 픽 웃어 보이더니 그 길로 나린을 스쳐 지났다. 방으로 돌아온 나린은 잽싸게 문을 닫았다. 주르륵. 다리에 힘이 풀리며 등이 문을 타고 미끄러져 내린다. 집으로 들어오기 전 잠시 윤완의 차에 올라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나린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움직여버린 제 마음을 조곤조곤 속삭여주었다.
‘연나린.’
‘네?’
돌아보자마자 부지불식간에 입술 위를 훑던 감촉과 한참을 붙들려 뜨겁고 촉촉하게 건드려지던 기억.
분명 숨을 쉬고 있었는데, 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는지. 왜 내 손은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는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그건 공중에 매달린 듯 발이 땅을 딛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한 감각이었다. 그럼에도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서, 쭉 그의 손 안에 놓여 있기를. 입술을 달구는 이 온기가 밤새도록 사라지지 않기를……. 나린은 엄지와 검지를 세워 아랫입술을 살포시 꼬집어 봤다. 그러자 엄청난 일을 벌인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리고, 다시 그의 품에 안기고픈 소망만이 소복소복 내려앉았다. *** 세훈은 형식적인 노크 후 바로 문을 열었다. 서재에는 태용도 함께였다.
“어? 할아버지도 계셨네요.”
쪼르르 달려간 세훈이 태용의 어깨를 주무르며 해맑게 웃는다.
“촐싹대지 말고 앉아라.”
주환이 엄중히 이르자 세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세훈이 착석한 뒤 태용이 입을 뗐다.
“이제 슬슬 때가 됐지 싶다.”
중대 발표를 예고하듯 의미심장한 서두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주환이 되묻고 세훈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연 회장을 쳐다보았다.
“내 주식, 적당히 추려서 나린이 앞으로 돌려줘라.”
단호히 떨어지는 명령에 주환 세훈 부자는 입도 뻥끗 못한 채 시선만 부딪혔다.
‘언젠가 있을 일이었지만 이렇게나 빨리.’
주환은 당혹감을 감추고 담담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의결권엔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혼사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만.”
혼사라는 말에 세훈의 얼굴이 근심에 휩싸였다.
‘슬슬 태준이와의 약혼을 준비하시려는 거구나.’
“예. 차질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주환의 답을 들은 태용의 눈이 이번엔 세훈을 겨냥한다.
“널 부른 건, 네가 오해하지 않길 바라서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세훈은 할아버지의 배려에 감사해하며 차분히 대답했다. ‘의결권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라는 문구가 모든 걸 설명해주었다. 주환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다부진 말투로 연 회장을 안심시키긴 했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께름칙했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아버님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제 아비를 쏙 빼닮았구나. 별것 안 해도 사랑을 독차지했던 성환이를……. 한때는 테라 그룹 후계자 자리를 두고 자웅을 겨뤘던 동생 성환을 회상해본다. 어릴 때부터 똑같은 성과를 내도 아버지는 언제나 동생을 더 치켜세웠다. 주환은 아무리 노력해도 태생적으로 사랑받는 법을 아는 성환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랬었다. 성환이 어느 가난한 집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가출을 감행하기 전까지는. 성환의 가출 이후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주환에게로 옮겨왔다. 절호의 기회를 맞은 주환은 기대에 부응하려 최선을 다했다. 차츰 아버지의 신임도 쌓였다. 동생이 그만 돌아와 줬으면 하는 마음 반, 이대로 영영 인연을 끊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반으로 감정이 복잡해져만 가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성환이 귀환하였다. 충격적인 것은 그가 전부를 버리고 선택했던 연인이 아닌, 결혼을 강요받았던 정혼자 민경과 함께였다는 점이었다. 민경의 품에는 어여쁜 딸이 안겨 있었다. 성환과 민경의 아이, 다현은 이른 출생 탓에 병원 신세를 오래 졌다고 했다. 아버지는 손녀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성환 가족을 맞이했다. 주환이 아는 성환은 사랑하는 사람을 저버릴 위인이 못 됐다. 하지만 다현의 존재는 발뺌할 수 없는 배신의 증거였다. 주환은 동생의 변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거니 하며. 그리고 2년 반 전 동생 일가에 닥친 불행한 사고 이후, 더더욱 경악할 만한 사실이 밝혀졌다. 성환에게 딸이 또 하나 있었던 것이다. 옛 연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그 아이는 다현과 고작 4주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의 성환이 양다리를 걸쳤다는 의미였다. 주환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건 그가 알던 동생의 모습이 아니다. 성환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었다. 내막을 아는 게 분명한 연태용 회장은 이 일에 관해서 만큼은 입도 벙긋 못하게 했다.
‘대체 가출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주환은 대답할 수 없는 동생을 향해 소리 없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 어느새 사흘밖에 남지 않은 1월. 나린이 맡고 있는 인건비 결산 일정상 야근이 불가피한 날이 돌아왔다. 경험에 비추었을 때 아무리 빨라도 아홉 시는 돼야 퇴근이 가능했고 대부분이 열 시였다. 한두 번은 새벽에 퇴근한 적도 있었다.
‘열 한시에만 끝내도 선방하는 건데.’
적어도 날이 바뀌기 전엔 업무를 끝마칠 수 있기를. 출근길에 나린은 누구에게 바치는지 모를 기도를 드렸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곧장 윤완에게 메신저를 한다.
[저 오늘 늦어요. 7시 퇴근 안 되니까 먼저 가세요.]
어제 얼굴 보고 말했어야 하는데 깜빡했다. ……그럴 겨를이 없었지. 생생히 되살아나는 어젯밤 차 안에서의 기억에 혼자 찔려하는 나린이었다.
‘정신 차려, 연나린. 사무실에서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나도 일 많아. 기다릴게.]
윤완의 답이 도착하고, 겨우 메신저일 뿐인데도 나린의 얼굴은 수줍은 미소로 물들었다. 직원들의 메신저 실수를 미연에 방지코자 임원 이름 앞에는 눈에 잘 띄도록 파란색 별 표식이 달려 있었다. 푸른 별. 도윤완 부사장. 별이 실제로 빛을 내는 듯한 착각에, 나린은 그 이름 세 글자 위로 반듯한 시선을 고정시켰다.
‘안 돼! 정신 차리라고! 사무실이라고!’
불현듯 깨달으며 누가 볼까 황급히 메신저 창을 닫는다. 몸 안의 연애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새로 생성되고 있는 것 같았다. *** 점심시간. 힘없는 걸음으로 터덜터덜 출입문을 나서던 태준은 회사 건물 외벽에 기대어 선 낯익은 얼굴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도 이쪽을 향해 꾸벅 인사하는 걸 보니 태준에게 용건이 있어 온 모양이었다.
“먼저들 가시겠어요? 금방 따라갈게요.”
태준은 점심을 같이하기로 돼 있는 산하 팀장들을 돌아보며 일렀다.
“네, 전무님.”
팀장들을 보낸 태준이 남자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남자의 이름은 장기호. 지아의 지인으로, 한 번씩 태준의 질투심을 유발했던 자이다. 지아가 곤경에 처했을 때 몇 번 도움을 받으면서 본의 아니게 안면을 튼 바 있었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태준을 지그시 응시하는 기호는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혹시 지아 문제라면,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지레짐작만으로 태준은 선수를 쳤다. 나린에게 실연 같지 않은 실연을 당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준은 지아에게 돌아가는 것만큼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히려 나린 덕분에 멀어진 지금의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게 지아를 지킬, 유일한 방법일 테니.
“그래서 계속 지아 연락 무시하는 겁니까.”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기호의 용건은 지아가 맞았다.
“지아 얘긴 더 듣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요.”
“무책임하시네요.”
이 말은 태준을 발끈하게 했다. 그동안 책임감이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는데. 헤어지기로 하고도 그 애가 부르면 만사 제쳐 놓고 달려갔으니까.
“아시다시피 끝난 사이입니다만.”
애써 침착한 어조를 유지한 건 괜한 말다툼으로 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기호는 기자라는 직업답게 집요했다.
“말로만 끝냈지 계속 만나지 않았습니까?”
태준은 야트막한 한숨을 뱉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끝내 보려고요. 언젠가 장기호 씨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인 거죠?”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죠.”
“이런 식이라뇨?”
“지아, 지금 많이 힘들어합니다.”
지아가 힘들어한다는 말에 일순 움찔했지만 태준은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우유부단해하는 사이 놓쳐버린 나린을 떠올리자 놀랍도록 마음이 고요해졌다. 어쩔 수 없는 거야. 이별이 힘든 건 당연한 거니까. 어쩌면 그동안은 내가 그 당연한 시간을 빼앗았는지도 모르지. 똑같은 실수를 답습할 수는 없다. 태준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끝내려면 당연히 힘든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이렇게 찾아올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
“그럼, 전 약속이 있어서…….”
기호의 침묵을 설득의 결과물로 이해한 태준은 진심으로 지아가 행복하기를 빌며 발길을 돌렸다. 눈물로 끝낸 자신과의 추억 따위 싹 잊어버리고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이를테면, 지금의 기호 같은 사람…….
“지아, 회사에서도 잘리고 당신한테도 버림받고, 완전 폐인 상태입니다.”
태준의 등 뒤에서 기호의 날 선 음성이 날아들었다. 태준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태준은 기호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그 앤 지금, 사랑, 일…… 한꺼번에 모든 걸 잃었으니까요.”
기호는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아는 회사에서 잘린 게 아니라 제 손으로 사표를 낸 것이었다. 사건의 중심엔 혜원이 있었다. 새해맞이 쇼핑 때 지아에게 실컷 분풀이를 한 혜원은 재오를 움직여서 지아를 아예 VVIP룸 정식 담당으로 발령 냈다. 그런 뒤 서너 번 더 혜원의 괴롭힘이 이어졌다. 혜원은 기분이 상하거나 불쾌한 일이 있으면 지아를 찾아가 하녀 부리듯 하거나 폭언을 하는 등 화풀이를 해댔다.
‘신발에 붙은 먼지 좀 떼 줘.’
‘한지아 씨, 지금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뇌가 없나? 초등학교는 나왔고?’
백화점 차원의 대응 매뉴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미리 재오의 언질을 받은 VVIP룸 매니저는 혜원의 횡포를 모른 척 눈감아주었다.
‘조금 지나친 면이 있으시긴 해도 우리 지점 실적을 책임지시는 분이니 지아 씨가 좀 참아요. 다 연말 보너스로 되돌아올 거예요.’
매니저는 도움을 요청하는 지아를 이렇게 타이르고 나 몰라라 했다. 그리고 혜원이 윤완으로부터 약혼 얘기를 무효화할 것을 통보받은 다음 날, 괴롭힘은 절정에 달했다.
‘손길이 왜 이렇게 거칠어?! 똑바로 좀 할 수 없어?’
짝! 급기야 손찌검까지 당한 지아는 결국 혜원을 밀치고 도망을 쳤다. 그러고 나니 남은 건 사표 제출뿐이었다. 지아가 태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날이 바로 사표를 쓰던 날이었다. 하지만 태준은 메시지를 읽고도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날 지아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태준이 사랑했던, 가녀린 몸에서 뿜어지던 생동감은 그렇게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