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좋아해요2021.09.28.
나린이 윤완의 차로 퇴근하게 된 지 사흘째. 약속대로 그는 일곱 시 퇴근을 준수해주었다. 검토할 게 쌓여 있던 어제는 사무실로 되돌아갔지만 그런 비효율을 감수한 줄 나린은 감감히 알지 못했다.
“내일부터는 안 데려다주셔도 될 것 같아요.”
안전벨트를 풀며 나린이 조심스레 건의했다.
“왜?”
“계속 데려다주시는 것도 번거롭고, 퇴근 시간 맞추는 것도 불편하고……. 지금까지 별일 없었잖아요.”
그날 이후 형식은 나린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린이 도윤완 부사장의 행렬에 뛰어들었을 때 이미 승산이 없다는 걸 절감한 것이었다.
“그럼 이번 주까지만.”
나린을 데려다주는 시간을 내심 즐겼던 윤완은 아쉬운 마음에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최선을 다한 하루에 주어지는 달콤한 보상 같던 시간.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설레고 행복했던……. 그러니까 이틀만 더. 딱 이틀만 더 욕심내자, 연나린.
“알겠습니다.”
“…….”
“그럼 이만 가볼게요.”
오늘도 나린은 예쁜 눈웃음으로 끝인사를 전했다. 애틋함이 스며든 표정으로 윤완이 고개를 끄덕인다. 딸칵, 문고리를 당기면서 나린은 어쩐지 좀 더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제, 어제, 오늘. 윤완과의 퇴근길은 나린에게도 못지않게 설레는 시간이었다. 걱정과 달리 윤완은 아무런 요구도 해오지 않았다. 이쯤 되었으면 고백에 대한 답을 달라 재촉할 법도 한데. 둘만 남겨진 차 안에서 그토록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다만 이따금씩 폭발하는 나린의 수다에 미소를 지었고, 나린의 신변에 위협은 없는지 오직 그것만을 걱정했다. 마음이 점점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왼 팔목에 두른 팔찌도,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두근두근하는 심장도 모두 한곳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각기 다른 상대와 약혼하도록 정해져 있는 우리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적어도 부사장님은……. 나는 가짜라지만 부사장님은…….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로 보아 윤완의 차는 아직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나린의 방에 불이 켜진 후에야 움직일 것이다. 지난 이틀 내내 그러했듯.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걸음을 내디디던 그때, 저만치서 백색 불빛 한 쌍이 가까워 왔다. 훤한 불빛이 널따랗게 바닥을 비추는 통에 나린이 시선을 빼앗기고, 윤완도 룸미러를 통해 그 빛의 정체를 확인하였다. 불빛을 내쏘며 달려온 것은 태준의 차였다. 나린을 발견한 태준은 반가워하며 차에서 내렸다.
“이제 퇴근해요? 안 그래도 만나러 오는 길이었는데…….”
나린의 눈이 어쩔 수 없이 윤완이 있는 쪽을 곁눈질한다. 따라서 돌아간 태준의 시선도 자연히 윤완의 존재를 발견해냈다. 태준의 얼굴이 돌려지는 순간 윤완의 차 운전석 문이 열렸다. 태준은 차에서 내리는 윤완을 보자마자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
윤완이 입을 닫아걸자 질문의 끝은 나린에게로 겨누어졌다.
“같이 퇴근한 거예요?”
“……네.”
약혼하려는 여자와 절친한 친구. 그 둘이 같은 차를 타고서……. 태준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늦은 저녁 시간인 건 참 다행이다. 오염된 서울 하늘에 별들이 꼬리를 감춘 것도. 태준은 윤완의 존재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도 제 존재를 무시하고 있으니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나린 씨.”
“무슨 얘기요?”
대답 끄트머리에 나린의 눈이 또 윤완을 향하여서 태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자꾸 도윤완 눈치를 보는 거예요. 왜.
“여기서 해요?”
“아, 아뇨.”
나린의 눈이 또 한 번 윤완에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그걸 본 태준의 얼굴은 굳어지다 못해 창백해졌다. 핏기없는 얼굴을 한 태준이 앞으로 성큼 나아가자 나린도 떼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그의 차에 탔다. 뒤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윤완이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 태준은 멀지 않은 데 위치한 공터에 차를 댔다. 근처 공원 야간 이용객들을 위한 무료 개방 주차장이었다.
“잠깐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비운 그는 잠시 뒤 따뜻한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 태준이 한결 수월할 수 있도록 나린이 커피를 받아주었다.
“저녁엔 잠 못 잘까 봐 잘 안 마시는데…….”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삐딱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냥 ‘고맙습니다.’ 하면 될걸.
“들고라도 있어요. 따뜻하게.”
“……네.”
그래도 향만큼은 고소하고 매혹적이다. 나린은 날아가는 커피 향을 조금이라도 붙들어 보고자 컵을 쥔 손에 살포시 힘을 가했다.
“퇴근 시간 맞아서 윤완이가 태워다 준 거예요?”
똑같이 꼭 쥔 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태준이 물었다.
“네.”
애꿎은 커피만 내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랬군요.”
쌉싸름한 읊조림을 끝으로 찾아온 고요는 나린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도윤완 부사장님이랑 퇴근할 땐 이런 침묵도 나쁘지 않았는데…….
“뭐예요? 할 얘기란 게.”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나린이 결국 입을 연다.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걸로는 안 되는 거예요?”
커피 향에 실린 서글픈 대답. 침묵을 수용할 걸 괜히 말을 걸었다고 나린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왜 자꾸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우린 한 달이면 끝날 가짜 사이인데.
“나린 씨.”
“……네.”
“혹시 윤완이가 무슨 얘기 했어요?”
달라진 태도. 달라져 가는 표정. 속절없이 벌어지는 간극. 세훈이 귀띔해 준 걸로 어림짐작한 것도 없잖아 있었지만 이쯤 되면 아무리 둔감한 태준이라도 눈치채지 않을 수 없다.
“…….”
“윤완이 마음, 안 거죠?”
거듭 묻는 어조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어서 나린은 안 그래도 떨어져 있던 시선을 한 번 더 떨어뜨리는 걸로 답을 대신하였다. 태준은 바닥에 부딪히는 심장을 견디려 눈을 감았다. 짐작하고 대비한 바임에도 타격은 전혀 줄지 않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니. 도윤완이 진짜로, 마음을 전할 만큼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다니.
“그래서 흔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나한텐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거예요? 나린을 담는 태준의 눈은 애절함으로 뭉그러졌다.
“…….”
이번에 나린이 대답하지 못한 건 정말로 답을 몰라서였다. 사실은…… 생각 중이에요. 왜 그를 두고 차에서 내리는 시간이 이토록 아쉬운지……. 왜 조금만 더 같이 있자고 보채고 싶은지……. 왜, 자꾸만 돌아보고 싶은지……. 태준은 애가 탔다. 이 세계의 화려한 여자들과는 좀처럼 맞지 않아 하는 그에게 나린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나린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지아는 잃었어도, 나린이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연극은 나 혼자 할 걸 그랬나 봐요. 나만 가짜였음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거잖아요. 나린 씨는 가짜인 줄 몰랐더라면…….’
“이런 얘기,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태준은 마지막 발버둥을 쳐 보기로 했다.
“윤완이는 입장이 달라요. 난 아니지만 그 앤 그룹의 후계자거든요.”
“…….”
“나린 씨는 모를 거예요. 한 그룹의 후계자가 갖는 의미가 어떤 건지. 얼마나 버겁고 살얼음판 같은 건지.”
얘기가 끊어지고 태준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아마…… 나린 씨의 출신이 발목을 잡을 거예요.”
찌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출신’이라는 비정한 표현이 나린의 가슴에 비수를 들이댈 걸 알면서도.
“그러니 가시밭길로 뛰어들지 말아요. 내가 지금보다 배로 노력할게요.”
나린이 받았을 상처를 조금이라도 어루만져주고자 태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바꾸어 재차 애원을 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나린의 시선이 무심결에 팔찌에 닿았다. 단지, 커피 향이 나는 곳을 따라갔을 뿐인데.
‘잘 어울리네. 그대로 하고 가.’
이 팔찌를 선물해 줄 때에 윤완이 했던 말이 떠올라 울컥하는 기분이 되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연나린.’
마음 안에 저장된 음성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 재생된다. 가슴이 아렸다. 태준이 했던 출신이 발목을 잡을 거란 말도, 가시밭길이 될 거라는 경고도 소용없이 다시 그를 볼 수 없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미안해요.”
나린은 마침내 목소리를 냈다.
“…….”
정말 미안해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용서해주세요.
“뭘요?”
태준 씨도.
“우리 지금 하는 연극이요. 한 달만 더 만나는 척하기로 한 거.”
……혜원 씨도.
“저……”
“…….”
“도윤완 부사장님이 좋아요.”
커피가 도착한 이래 단 한 번도 컵을 떠난 적 없던 나린의 눈이 처음으로 태준을 직시한다. 나린의 눈엔 비눗방울 같은 투명 결계가 쳐져 있었다. 그럼에도 입술만큼은 단호한 의지를 그려냈다. 태준의 심장이 크고 강하게 쿵 소리를 내었다. 그렇구나. 결국엔…… 이렇게 되었구나. 이미 저 아래로 추락한 심장이라 더 내려앉을 수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태준은 쓴웃음을 삼켰다. *** 목적지가 가까워올수록 긴장이 된다. 태준의 차를 빠져나와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탄 나린은 곧바로 윤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예요?]
[아직 그 자리야. 너희 집 앞.]
[지금 갈게요. 기다려줘요.]
[그래.]
두 손으로 폰을 감싸 쥔 나린은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가만히 제자리를 지켜주는 사람. 우직하게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 거짓말이 아니다. 그가 안겨 주었던 케이크도. 싱가포르에서의 데이트도. 따뜻했던 위로도. 좋아한다는 말도. 모두 거짓이 아니었다. ……닮아서가 아니었어. 진심이었던 거야. 줄곧 진심으로 나를 봐왔던 거야. 목적지에 도착한 나린은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언제 보고 따라 내렸는지, 제 차에 비스듬히 기댄 윤완이 나린을 향해 서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에 나린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처럼 감동적이고, 뭉클하고……. 있죠. 나, 부사장님이 어떤 사람이라도 상관없어요. 태준 씨 말대로,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상관 안 해요. 해볼게요. 당신에게 가는 거. 용기 내서 해볼게요. 두 눈 안에 오롯이 그가 박힌 순간. 나린은 눈동자에 그려진 환상을 손에 잡으려 힘차게 달려갔다. 좋아해요. 깨닫느라 시간은 좀 걸렸어도……. 나린의 얼굴이 그의 가슴팍에 부딪히고. 나도……. 부사장님이 좋아. 무방비였던 윤완의 상체가 출렁였다. 동공에 인 파도만큼은 아니었지만. 놀란 윤완의 몸이 뻣뻣하고 단단해진 새 나린의 팔이 허리에 감긴다. 가느다란 두 팔은 잠기지 않은 그의 코트 사이로 쏙 자취를 감추었다. 코트 안에 갇혀 있던 훈기가 얼어 있는 나린의 손을 다독여주었다. 나린은 윤완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팔은 여전히 그의 허리를 두른 채. 앙증맞은 턱은 그의 품에 바짝 밀착된 채.
“……좋아해요.”
붉게 물든 볼로 나린이 수줍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좋아해요. 나린이 선물한 언어의 의미를 인지하자마자 윤완의 심장이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내달린 심장의 목적지는 두말할 것 없이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이 작고 어여쁜 아이. 뇌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윤완의 팔도 가만히 나린을 마주 안았다. 다 겪은 줄 알았는데. 생경하고 신선하고 새롭고 설레는 감정들은 좋아하는 걸 깨달은 순간 샅샅이 겪어낸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뭐지……. 가슴을 간질였다가 두들겼다가 흔들어댔다가 하는 낯선 감각들을 이기지 못한 윤완은 두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도리어 나린의 생김생김이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아픈 기분이라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그런 건 다른 사람의 세계에나 존재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저 제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달려와 제 품에 안긴 세상. 전부가 되어 버린 세상을 놓칠세라 윤완은 더 꽉 힘주어 나린을 안았다. 그러자 같은 힘으로 꼭 안기는 순수한 마음이 여실히 전달되어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자를 놓지 않으리라. 단단한 맹세가 굳건히 뿌리를 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