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벌써 다섯 번째2021.09.24.
나린을 만난 준우는 다짜고짜 고개부터 푹 수그렸다.
“미안해요! 진짜 진짜 잘못했어요!”
“괜찮아요.”
나오기도 전에 용서해 버렸기에 나린이 미소로 받아넘긴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왜긴요. 난 너무 알겠는데. 그만큼 다현 언니를 사랑했으니까.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그러니 실수로 일으킨 작은 소동 정도는 없던 일인 것처럼 덮어줄 수 있다.
“정말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그러나 다음 준우의 발언 차례에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윤완이 화 많이 났죠?”
여기서 왜 또 도윤완 부사장님 얘기지? 설마 명준우 씨도 다 아는 건가, 세훈 오빠처럼?
“……글쎄요.”
거두어지려는 미소를 가까스로 유지하며 답했다.
“그날 일, 두고두고 갚을게요.”
“그냥 잊으세요. 저도 그러려고요.”
“마음 같아서는 밥이라도 사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윤완이랑 태준이한테 맞을 거 같아서…….”
또 부사장님이다. 부사장님이 자꾸 별책 부록처럼 따라서 언급된다. 역시 알고 있는 거야. 부사장님 마음을. 나린의 가슴에 쿵 돌덩이가 얹어졌다. 절친들이 알 정도면 더 이상 현실이 아니라고 외면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들키지 않게 한숨을 삼켜 보았다. 이날 준우와 나린은 커피 한 잔에 의지하여 제법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린이 가장 듣고 싶었던 다현에 관한 얘기만큼은 쏙쏙 피해갔다. 그 이름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준우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말 테니. 한층 가까워진 두 사람은 말미에 호칭도 편하게 바꾸고 전화번호도 교환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린은 그가 어느 집안 좋고 학벌 좋은 여자와 약혼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 어김없이 찾아온 주말의 끝, 그리고 월요일. 출근을 한 나린은 강형식 사원과의 메신저 창부터 띄웠다. 금요일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에도 형식과 있었던 일을 잊지 않았다. 상황 파악을 위해 그를 만날 필요가 있었다. 회사 바로 옆 건물 카페에 도착한 나린은 형식의 몫까지 커피 두 잔을 사서 자리에 앉았다. 먼저 도착해 있던 형식은 기분이 밝아 보였다. 막상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뭐라 운을 떼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은 만만한 소개팅 얘기부터 꺼내 볼까.
“금요일에 얘기했던 소개팅 건은 안 되겠어요.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한 건 예의상 첨가한 빈말이었다.
“왜요? 그쪽에서 별로래요?”
“그렇다기보다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요.”
둘러대려다 보니 자연히 말끝이 흐려지고 말았다.
“괜찮아요.”
그는 툭 털어냈다. 쿨하고, 예의 바르고. 도무지 나쁜 의도로 접근할 사람 같아 보이질 않는데.
“사실은 저도 그 소개팅 하기 싫었어요. 내가 외롭다고 한 건 소개팅 시켜달란 의미가 아니었거든요.”
“…….”
“대리님.”
한순간에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바뀌고.
“네?”
“내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
“대리님이었어요.”
나린은 아무 시도도 하지 않았는데 형식 쪽에서 제풀로 쑥 발톱을 드러냈다.
“저를요? 왜요?”
우리는 그만큼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마음에 드는데 이유가 뭐 있나요.”
그는 돌직구를 고무공인 양 아무렇지 않게 툭 던져댔다. 설렐 법한 대사였음에도 나린은 비상식적이고 더 나아가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와 딱 붙어 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자연스레 팔짱을 끼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대리님이 남자친구 없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 광경을 목도하지 않았더라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사실, 이렇게 빨리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수줍게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까지. 저게 다 연기라니.
“미안하지만 전 그럴 생각이 없어요.”
“무슨 생각이요?”
“사원님 마음 받아줄 생각이요.”
“괜찮아요. 아직 저에 대해 잘 모르니까 당연한 거예요. 대리님은 그냥 모르는 척하세요. 저 혼자 열심히 좋아할게요.”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단 생각이 나린의 머리를 강타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상대이니 조금은 더 솔직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
“있죠, 소개팅 못 하게 됐다고 한 거 말이에요.”
“네.”
“사실 금요일에 다 봤어요. 사원님, 어떤 여자랑 걸어가는 거.”
찰나였지만 형식의 얼굴에 스친 당혹감을 나린은 놓치지 않았다.
“다정해 보이던데…….”
그래서 잽싸게 공격을 보탠다.
“아, 네. 오해했구나. 그냥 친구인데, 너무 친해서 가끔씩 그렇게 들러붙기도 하고 그래요. 여자친구 생기면 거리를 둬야죠. 당연히.”
금세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태연스레 되받아쳤다. 일단 시작했으니 호락호락 물러날 수 없었다. 나린은 무리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그럼 확인시켜 줄 수 있어요?”
“무슨 확인이요?”
“전화든, 메시지든요.”
형식의 낯빛이 달라졌다. 그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와. 대리님 너무하네요. 지금 날 못 믿는 거예요? 내 휴대폰 검사라도 해야겠다 이거예요?”
“글쎄요. 하긴. 애초에 제가 사원님을 믿고 말고 할 입장인지 모르겠기는 하네요.”
“…….”
펄쩍 뛰며 언성을 높이는데도 침착하게 나오는 나린 앞에서 형식은 준비해 온 대응 매뉴얼을 홀랑 잊어버렸다. 순진하고 상냥하게만 보였던 연나린 대리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너무 쉽게 생각했나. 나린은 더 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아졌다. 거리를 둬야 하는 사람이라는 확신만이 견고해진다.
“전 먼저 일어나 볼게요.”
입도 대지 않은 머그잔을 미련 없이 반납한 나린은 카페 바깥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쫓아올 것 같아 속력을 높여 보았는데 별 성과도 없이 몇 걸음 못 가 따라잡히고 말았다.
“대리님, 잠시만요.”
형식의 손이 닿는 순간 나린은 그어둔 선을 침범당했다고 느꼈다.
“무슨 짓이죠?”
있는 힘껏 뿌리쳤으나 곧바로 다시 붙들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서 다시 한번 뿌리치는데, 형식의 어깨너머로 친숙한 얼굴이 보인다. 나린은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쪽으로 들입다 달렸다. 윤완을 위시한 임원들의 행렬 앞에 나린이 불쑥 등장하게 되었다.
“…….”
윤완은 길을 가로막고 선 나린을 묵묵히 치훑었다.
‘안녕.’
본능적으로 떠오른 다정한 인사말은 깨우친 현실에 금세 파묻힌다.
“무슨 일입니까.”
회사에서는 사적으로 아는 척하지 말라더니. 사흘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육성 대신 굳이 메시지를 활용하던 나린을 윤완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저, 그게.”
나린의 불안한 시선이 짧게 머물다 간 곳에 윤완의 시선도 따라갔다. ……그 남자다. 나린이 우산을 씌워 주었던 남자. 윤완의 직감엔, 쌀알 사이사이 섞인 모래처럼 꺼림칙하기만 하던…….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짓이기는 나린을 본 순간 하마터면 윤완의 이성도 함께 짓이겨질 뻔했다. 뒤에서 재무팀장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대로 형식에게 직행했을 것이다.
“연 대리, 왜 그래요?”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임원들의 면면을 본 나린은 쭈굴쭈굴 물러났다. 다행히 형식도 더는 쫓아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윤완은 나린을 구해준 셈이 되었다.
“사무실 들어가는 길이면 같이 가죠.”
차분하게 내뱉은 윤완은 무리의 선두를 유지한 채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다. 발을 떼기 전 형식을 빠르게 스캔하는 두 눈엔 살기가 번뜩였다. *** 팀장에게 불려가 주의를 받은 뒤 자리로 복귀하자 윤완의 호출 메신저가 도착한다.
[내 방 회의실로.]
나린은 살그머니 문을 밀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반대편 상석에 윤완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가까이 와서 앉아.”
이 회의실이 이렇게 넓었던가. 기본적으로 예닐곱 명은 모이던 곳이라 달랑 둘만 들어 있으려니 거리감이 새로웠다. 윤완이 있는 자리까지 걸어가는 길이 하세월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슨 일 있었어?”
그가 있는 자리에서 한 칸 띄어 앉은 나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뭔가 있었던 건 분명하고. 무슨 일이야?”
직접 본 게 있으니 그냥 넘어가려는 나린의 시도는 효력이 없었다.
“별일 아니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에도 꿋꿋이 묵비권을 행사했다. 개인적인 문제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을뿐더러 일러바치는 건 형식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완은 직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니까.
“아까 그 녀석이 귀찮게 구는 거지?”
“아니에요.”
“아니라기엔 너무 위급하고 초조해 보이던데.”
“아깐, 그냥…… 좀 그랬는데, 이젠 괜찮을 거예요.”
“앞으로 모든 질문에 그냥은 빼고 대답해.”
그럼 할 수 있는 대답이 없는걸요. 그 비장의 무기를 앗아가 버리면.
“…….”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했을 텐데.”
이걸로 다섯 번째. 그로부터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건.
“좋아하는 사람 걱정시켜 놓고 모르는 척하라고?”
나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그냥이란 말을 쓸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죄송합니다도 빼.”
채워진 족쇄가 하나 더 늘어났다.
“부사장님.”
‘죄송’하지만 ‘그냥’ 넘어가 줄 순 없나요? 그가 정한 규칙을 와장창 깨부술 작정으로 호기롭게 고개를 든 나린 앞에 한없이 옅어진 윤완의 눈동자가 놓였다. 그래서 나린은 하려던 말을 취소하고 입을 앙다물어야 했다. 저 애틋한 눈이야말로 진짜 족쇄였으니까. 왜. 자꾸만 현실이 되는 건데. 그럼 안 되잖아요. 혜원 씨는 어떡하라고. 태준 씨 문제는 어떡하라고.
“좋아.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대신 당분간은 내 차로 퇴근해. 퇴근, 최대한 일곱 시로 맞춰 볼 테니까.”
윤완이 한발 물러섰다. 고민이 해일처럼 나린을 덮친다.
“…….”
“대답해.”
일단은 이 사람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겠지.
“알겠습니다.”
“나가 봐.”
나린은 회의실을 나왔다. *** 신데렐라의 힘을 빌려 또 다른 신데렐라가 되어 볼까 했던 야심이 물거품이 됐다. 형식은 망연자실했다. 그것만 물거품이면 다행이게. 사무실 책상도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게 아닐까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다. 아까 본 도윤완 부사장의 표정을 되새긴다면. 모든 일의 시작은 한 달 전. 소문에 빠른 사업 1팀 입사 동기와 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그 동기가 별안간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여자를 은밀히 가리켰다.
“저 사람, 보여?”
“누구?”
“저기 베이지색 니트 입은 여자. 세 번째 자리.”
형식은 별생각 없이 돌아봤다. 거기엔 아는 얼굴이 있었다. 그녀다. 연나린 대리. 필리핀 법인 세무 이슈를 푸느라 협업한 바 있던, 친절한 재무팀 선배.
“저 사람, 왜?”
형식은 맑고 상냥했던 나린의 첫인상을 상기하며 물었다.
“저 여자가 그 여자야. 신데렐라.”
“신데렐라?”
“왜, 있잖아. 하루아침에 재벌가 손녀로 밝혀졌다는. 테라 호텔.”
저 선배가? 형식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아직 회사 다니나 봐. 나 같으면 당장 때려치울 텐데. 미리 친해 둔 사람들은 좋겠다. 재벌 인맥 생긴 거니까.”
그랬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땐 내 가까운 곳에도 재벌이 있구나, 나도 재벌이랑 얘기해 봤구나 하는 신기함 정도로 끝이었다. 그럴 줄 알았음 더 친해 놓을 걸 하는 후회를 했다가 다시 나린과 가까워지는 망상을 했다가. 그러다가 망상의 규모가 차츰 몸집을 키우더니 형체를 갖추고 야심이 더해져 구체적인 목표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못할 게 뭐지 싶었다. 평범한 집안의 남자가 재벌 2세와 결혼한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사귀는 여자친구가 슬슬 권태롭기도 하고. 그러다 운 좋게 엘리베이터에서 나린을 딱 마주쳤다.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살갑게 말을 걸었는데, 뜻밖에도 우산을 씌워 주는 친절이 베풀어졌다. 그러자 야심이 더욱 그를 자극했다. 다른 여자와 소개팅을 주선하는 모습을 보니 초조함이 불을 당겼다. 도전해볼까? 밑져야 본전일 텐데. 형식은 작정하고 내질렀다. 콘셉트는 첫눈에 반해 순정을 다 바치는 ‘직진남’ 후배로. 그러나 무모했던 도전은 처참한 실패로 점철됐다. 계획이 와르르 무너지던 마지막 순간. 경각이었지만 자신을 향했던 윤완의 살기등등한 눈빛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