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예쁘니까2021.09.21.
나린은 침대에서 느지막이 눈을 떴다. 오늘이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인 건 천만다행이었다. 밤새 기억나지 않는 꿈을 길게도 꾸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단잠을 잔 것 같다. 개운한 몸 상태가 그걸 증명했다. 몸을 일으킨 나린은 습관처럼 폰을 확인했다. 그러자 어젯밤, 폰이 제 손에 되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 조금만 움찔해도 닿을 듯 붙어선 두 사람의 시간이 정지해 있다. 어느 누구 하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되면 그만 멋대로 안아버리게 될까 봐. 달아나고 싶지만 눈빛을, 향기를 멋대로 벗어날 수 없어서. 가늠할 수 없는 길이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두 사람을 꽁꽁 묶고 있던 얼음 마법이 풀렸다.
“가자. 집에 데려다 줄게.”
먼저 얼음을 깬 윤완이 저벅저벅 앞장서서 걸었다. 나린도 냉큼 그의 등을 좇았다. 윤완에게서 전이된 잔향이 코끝을 맴돌고 있어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풀내음이 나는 듯 나무 향이 이는 듯, 신비로운 숲으로 데려다 놓는 향. 도시적인 이미지의 윤완이라서 자연과는 상극일 것 같은데 어쩐지 참 잘 어울린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너무 고요해서 나린은 걱정이 됐다. 제 심박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하는. 그리고 꿈인데. 꿈이지만, 그래도 고백을 받았으니 대답은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과 걱정이 뒤엉켜만 갔다. 윤완은 나린을 외면한 채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행여 창에 얼굴이 비칠까 봐 고개를 바로 했다. 근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거지? 그러다가 스스로를 어이없어했다.
‘연나린. 너, 이걸 왜 고민하는 거니.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 걸…….’
모순. 단 한 번도 윤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에 왜 단박에 거절해야겠다는 마음은 안 드는 건지. 팔찌에 넘어가고 코트에 흔들리고 고백에 휩쓸리고. 내가 이토록 유약한 존재였나. 택시는 두 사람을 고이 연 회장의 저택 앞에 내려주었다. 당연히 혼자 내릴 줄 알았던 나린은 뒤이어 내린 윤완을 향해 날을 세웠다.
“왜…… 따라 내리세요?”
뾰족해 본 적 없는 나린이라서 세운 날 끝은 마냥 무디기만 했다. 윤완의 코에서 짧은 숨이 훅 뿜어져 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연나린.’
하지만 대답을 할 때엔 으레 그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선 나린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세훈이 집에 왔나 하고.”
치켜 올라간 나린의 눈썹은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뭐야, 또 세훈 오빠 핑계야? 어쩐지. 아까도 이상했어. 이번엔 안 속아.’
“아까 낮부터 세훈 오빠한텐 무슨 볼일이 그렇게 많은데요?”
윤완은 참지 못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귀엽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그건 아까 퇴근할 때 따져 물었어야지.
“내 코트랑 휴대폰, 세훈이가 들고 왔을 수도 있으니까?”
“아.”
이게 무슨 망신이람. 무안해진 나린은 두 손을 양 볼 위에 얹었다. 나린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은 걸 확인한 윤완은 성큼성큼 대문 앞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다.
“내가 왜 따라 내린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왜? 또 좋아한다고 말해줄까 봐?”
“네?”
“네, 라고 한 건가 지금?”
“아니요?!”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말끝을 올렸잖아요! 말끝을! ‘네.’랑 ‘네?’도 구분 못 해요?’
당황해서 커진 나린의 성량을 따라서 윤완의 웃음소리도 저 하늘 위로 높이 치솟았다.
*** 다시 토요일 오전. 나린은 키친으로 내려왔다. 방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배에서 연신 꼬르륵꼬르륵 먹을 걸 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일하는 분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대충 때우기로 하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낸다. 그때 마침 점심 준비를 하러 들어온 미옥과 맞닥뜨렸다.
“아이고. 이제 일어나셨어요? 배고프죠?”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나린의 습관을 잘 아는 미옥은 걱정부터 했다.
“조금요. 근데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아서 우유로 버텨 보려고요.”
“그래도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괜찮아요. 제가 뭐 도와 드릴까요?”
매번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나린을 미옥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담아낸다.
“아서요. 저 사모님한테 쫓겨나요.”
“그래도…….”
“제 일인걸요. 얼른 익숙해지세요, 아가씨도.”
“으. 아가씨란 호칭 닭살 돋는다니까요.”
나린은 두 팔을 교차해 제 몸을 감싸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미옥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회장님, 부사장님처럼 회사에서의 직책이 높기라도 하면 그렇게라도 부르련만.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냥 나린아, 그래 주시면 안 돼요?”
“아이고. 경을 칠 소릴.”
미옥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양, 손을 크게 휘저었다. *** 쟁반에 찻잔을 받쳐 든 나린이 2층 어느 문 앞을 서성인다. 같은 2층인데, 제 방이 아닌 다른 이의 방문 앞.
‘저, 그럼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조금 전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미옥이 말을 바꿨다. 나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뭔데요?’
‘방에 올라가실 때 부사장님 서재에 차 좀 갖다 주셨으면 해서요.’
그게 이런 부탁인 줄도 모르고. 부사장님. 그 짧은 호칭에 나린의 심장은 저 수면 아래로 빠르게 침전했다. 예전에도 부사장님 하면 긴장이 됐던 건 맞는데 이젠 긴장의 종류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하나의 호칭에 짝지어진 두 개의 얼굴. 이 집에 사는 부사장님과……. 아니야. 생각하지 마. 그 부사장님 쪽은 생각도 하지 말라고. 도리질을 친 나린은 심호흡을 하고서 똑똑 2층 서재 문을 두드렸다. *** 또다시 어제, 금요일 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나린일 거라고 추측하고 무심히 인터폰을 받은 세훈은 난데없이 들려오는 남자의 웃음소리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말세다. 들려온 게 정말 도윤완의 웃음소리가 맞다면 이건 틀림없는 말세였다. 문을 열어주자 나린과 윤완이 차례로 들어왔다.
“집에 있었네.”
언제 소리 내서 웃었냐는 듯 윤완은 예의 그 특유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 코트?”
세훈은 윤완의 방문 목적을 손쉽게 유추해냈다.
“응.”
세훈이 때마침 거실을 지나던 가정부에게 윤완의 코트를 챙겨올 것을 주문한다.
“제 옷이랑 휴대폰은요?”
곧이어 나린이 제 소지품의 소재를 물었다.
“아, 네 건 방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어. 근데, 지금 입고 있는 건 웬 거야?”
나갈 때와 달라진 차림에 어리둥절한 세훈이었다.
“그게…… 그냥 생겼어요.”
“그냥 생겨?”
하다가 세훈은 알만 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누가 사줬구만.”
그의 눈은 곧장 윤완에게로 날아갔다.
“응. 내가 사줬어.”
윤완이 대수롭지 않게 세훈의 도발을 받아넘긴다.
“왜 사줬는데?”
기회를 포착한 세훈은 여지없이 그를 놀리려 들었다. 도윤완과의 관계에서 갑이 되는 진귀한 찬스는 왔다 하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으니 방금 전 윤완이 나린에게 고백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윤완에게는 더 이상 진심을 숨겨야 한다는 약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예쁘니까.”
“뭐?!”
예상치 못한 답변에 세훈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닫혀 있던 나린도 입술도 위아래로 틈을 벌렸다.
“뭘 놀라? 예뻐서 사줬다니까.”
윤완은 초연히 주문을 반복했다. 이 사촌 남매를 얼음으로 만들 주문을. 충격에 휩싸인 세훈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어버버했고,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나린은 2층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아나버렸다. *** 2층 서재 앞. 똑똑.
“네, 들어오세요.”
나린의 두드림에 세훈이 답을 한다. 나린은 집들이에 초대된 손님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이 저택에 온 지 한 달 보름째인데도 이 공간은 처음 들어와 보는 것 같았다. 벽면을 빼곡히 채운 장서의 양에 소리 없는 감탄이 연발되었다.
‘도서관이 따로 없네. 나도 여기 있는 책들 가져다 봐도 되나.’
이담에 서재의 주인이 기분 좋을 때를 노려 허락을 받아내야겠다는 의지를 다져 본다.
“차 드세요.”
“이걸 왜 네가 해?”
“우유 마시러 내려갔다가 미옥 아줌마가 직접 들고 오신다고 하는 거 빼앗았어요. 어차피 올라올 거 한 번에 들고 오면 좋잖아요.”
미옥이 부탁했다고 하면 문제가 불거질까 봐 자신이 우긴 걸로 해두기로 했다. 세훈은 읽던 자료를 한편으로 미룬 뒤 뜨거운 차를 후 불어 목을 축였다. 눈을 감고 길게 향을 음미한다.
“그래, 기분이 어때?”
눈을 뜬 세훈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슨 기분요?”
“도윤완한테 예쁘다는 말 들은 기분.”
나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코, 코트가 예쁘다고 한 걸 거예요.”
믿을까. 안 믿을 것 같은데.
“그럴 리가. 둘이 바에서 그러고 어디로 갔는데?”
이것 봐. 안 믿을 줄 알았어.
“그냥, 코트 사러요.”
“코트 하나 사길 그렇게 오래 걸렸어?”
“이것저것 입어보고 고르다 보니까…….”
“흐음.”
세훈은 나린의 말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 듯했다. 길고 가늘게 뜬 눈에는 의심이 한 바가지였다. 역시 세훈 오빠는 부사장님의 마음을 아는 게 분명해.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직도 긴가민가한데. 냉혈한 도윤완 부사장님이 나를 좋아한다니. 믿을 수 없어. 거짓말. 그럼에도 또 완전히 거짓말로만 치부할 수만은 없는 건, 어젯밤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되풀이되었던 그 달콤한 말 때문이다. 그가 던진 네 번의 고백이 동서남북을 그리며 심장에 아로새겨졌다.
‘좋아해.’
어느 쪽으로 달아나도 숨을 수 없게. 어제, 방에 돌아온 직후 상황을 반추해 보던 나린은 금방 혜원의 존재를 들추어냈다. 멀쩡히 약혼할 상대도 있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대체. 아무리 정략적인 관계라지만……. 그리고 손은 왜 잡아? 앞으로 출근해서 어떻게 얼굴 보라고. 어찌 됐든 나는 이태준 씨랑 얽혀 있는 사람인데 둘이 절친 아니었어? 친구한테 그래도 되는 거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도 자꾸만 닫히는 눈꺼풀에 져서 끝내는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밤새 긴,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다른 누군가로 오인되어 낯선 품에 안겼던 서글픈 기억은 금세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고백으로 갈음되었고, 코를 찌르던 알코올 향은 시원하고 청량한 숲의 향기로 뒤바뀌었다. ……꿈에선 분명 많이 웃었던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세훈의 날카로운 질문이 어젯밤 꿈을 곱씹는 나린의 머릿속을 파고든다.
“뭘요?”
“이태준, 도윤완. 저대로 둘 순 없잖아. 결정을 해야지.”
세훈은 변죽을 울릴 이유가 없다는 듯 직설적으로 물었다. 직설적인 물음은 묻는 이의 마음은 편하게 해 줄지언정 답을 해야 하는 이의 마음은 바늘방석 위에 올려놓는 법이다. 바늘방석에 올라간 나린의 심장이 따끔거렸다. 지이이잉. 나린의 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시의적절하게 뻗어진 구원의 손길이었다.
“여보세요?”
나린은 냉큼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 표시에 모르는 번호로 뜬 걸 보고도.
[나린 씨, 저 누군지 알겠어요?]
아, 그다. 언니의 옛 약혼자. 명준우. 흔치 않는 음색을 갖고 있는 그이기에 한방에 알아챘다.
“네. 안녕하세요.”
[어젠 잘 들어갔어요?]
“네.”
[다행이네요. 근데. 음. 그러니까.]
횡설수설하고 있었지만 이건 명확한 목적을 가진 전화였다. ‘미안해요.’ 그 말이 하고 싶은 거겠지.
“…….”
[…….]
폰 너머의 준우는 고민을 했다. 이게 과연 미안해, 한마디로 끝내도 되는 실수인 걸까. 실수라는 표현조차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어쨌든 상대방 입장에선 불쾌한 신체 접촉이었을 텐데.
[혹시, 오늘 좀 볼 수 있어요? 아,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요. 부담 갖지 말고…….]
평소 당당하던 그답지 않게 위축된 모습에 나린은 설핏 웃었다. 이 정도면 그냥 사과받은 셈 쳐도 될 것 같은데.
“좋아요. 어디로 가면 돼요?”
그래도 마음의 짐은 확실히 덜어 주는 편이 좋겠지.
[강남 테라 호텔이 낫겠죠? 두 시간 뒤에 거기 라운지요.]
“네.”
준우와 통화를 하면서 나린은 슬금슬금 서재 밖으로 도망을 나왔다. 덕분에 전화를 다 마칠 무렵에는 세훈에게 붙잡히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