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전혀 달라2021.09.17.
윤완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세훈은 본능적으로 길을 터주었다.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공포심이 일었다. 덕분에 쉽게 사정거리를 확보한 윤완은 준우의 어깨를 강하게 튕겨냈다. 이미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의 준우가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만다. 준우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는가 싶었던 나린의 팔이 이번엔 윤완에게 붙들렸다.
“부사장님…….”
아무런 색을 입지 않은 눈으로 나린을 잡아 일으킨 윤완은 그대로 나린과 함께 테이블을 벗어났다.
“야, 명준우, 정신 차려!”
세훈이 준우에게 다가간 사이 절망감으로 자욱한 태준의 눈이 윤완을 좇았다. 넋 놓고 있다가 순서를 빼앗기고 말았다. 완벽한 패배였으나 패배할 수밖에 없는 반응 속도였다는 것만큼은 인정을 해야겠다. 인사불성이 된 준우는 여전히 맥을 추지 못하였다. 가여우리만큼 슬픔에 절은 친구의 몰골에도 윤완의 눈엔 일말의 동정심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몇 초간 준우를 무감하게 쏘아보던 윤완은 나린을 데리고 뚜벅뚜벅 출구로 향했다. 나린도 윤완이 이끄는 대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지금은 여길 벗어나는 게 중요하니까……, 잠시만 부사장님이 내민 이 손에 의지하자.
“어디 가?!”
뒤에서 태준이 물었지만 윤완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나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이동 수단이 없는 두 사람은 보도블록이 놓인 길을 따라 쭉 걸어 내려갔다. 나린은 윤완의 등 뒤에서 딱 한 발짝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폭이 훨씬 넓은 사람을 쫓아가는데도 힘에 부치지 않는 건 다 보이지 않는 그의 배려 덕분이었다. 겉옷을 두고 나온 탓에 몸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 두 뺨도 슬슬 감각을 잃어가는 듯하였다. 윤완의 넓은 등은 나린의 시야를 가로막은 채……. 나린은 언제쯤 그가 이 기약 없는 전진을 멈출지 궁금해졌다.
“어디까지 갈 거예요?”
이대로 두었다가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입을 연다. 찬바람을 이기지 못한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대답도 없이 한참을 더 간 윤완은 불을 환하게 밝힌 어느 부티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거침없이 문을 밀고 나아가는 윤완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더운 기운이 닥쳐와 꽁꽁 얼어 있던 나린의 몸을 녹여주었다.
“어머, 도 부사장. 어서 와.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부티크의 젊은 여사장 세리가 윤완을 보며 친근하게 인사했다. 세리의 시선은 곧장 나린에게로 옮겨갔지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궁금한 대로 다 물어보는 건 VIP 고객을 잃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그녀였다.
“여기 입을 코트 좀. 제일 따뜻한 걸로.”
윤완의 요청에 세리는 영업용 미소를 내보였다.
“걱정 마. 다 따뜻한 소재니까.”
그러더니 스태프 룸 안에 있는 직원을 큰 소리로 호출한다.
“연주 씨! 여기 VIP 코트 좀 골라 드려요. 다 잘 어울리시겠지만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뒤에 붙인 아부 발언은 백 퍼센트 구매할 고객을 위한 사은품 같은 것이었다. 나린은 황당해서 윤완을 돌아봤다.
“무슨 코트를 사요? 그냥 택시 타고 집으로 가면…….”
윤완은 나린의 반대 의견을 묵살한 채 연주라 불린 직원에게로 살포시 등을 떠밀었다. 보는 눈이 있어 아웅댈 수 없었던 나린은 하는 수 없이 쭈뼛쭈뼛 연경을 좇아갔다.
“누구야?”
윤완 혼자 남겨지자 기회를 포착한 세리가 거리를 좁히며 물었다.
“연나린.”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테라 호텔 손녀.”
세리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땡그래진다.
“어머! 그 신데렐라?!”
그랬다가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깨닫고 나린 쪽을 한번 힐끔거렸다. 세훈의 생일 파티 이후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져서 이 세계와 연관된 사람이라면 나린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 부티크는 소문을 물어오는 이들의 집결지가 아니겠는가.
“신데렐라는 무슨. 자기 자리를 찾은 거지.”
윤완이 무심히 대꾸하였다. 두 눈은 한시도 엇나가지 않고 줄곧 나린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좀 닮은 것도 같네. 다현 씨랑.”
“…….”
“부럽다. 어떤 기분일까. 고아에서 하루아침에 재벌 3세가 되는 건.”
팔짱을 낀 세리가 한탄했다. 오래 알고 지낸 윤완과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비어진 것이었다.
“이번만 봐준다.”
“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대화가 시작되고 처음, 윤완의 시선이 세리에게 옮겨온 순간.
“아, 그, 그래.”
섬칫하게 만드는 눈빛에 세리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세리가 꼬리를 내리자 윤완의 시선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 제자리의 주인 나린은 연주가 추천하는 코트들을 이리저리 몸에 대어 보는 중이었다. 고아에서 재벌 3세라.
‘글쎄. 저 여자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던데.’
윤완의 눈빛을 점령하고 있던 냉기가 가만가만 흩어졌다. 늘 그래 왔던 대로 회사에 나오고, 늘 그래 왔던 대로 알뜰하게 굴고, 늘 그래 왔던 대로 고작 케이크 하나에 행복해하고. 늘 그래 왔던 사람들 곁을 떠난 걸 외로워하고. 코트 선별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연주의 손엔 엄선된 코트가 세 벌 들려 있었다.
“뭘로 할까?”
세리의 물음에 윤완은 곧장 카드를 들이밀었다.
“하나는 입고 갈 거고, 다른 두 개는 연 회장님 댁으로 보내 줘.”
나린은 카드를 내미는 윤완의 오른팔을 다급하게 제지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코트 사는데.”
보고도 모르냐는 투.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정 사줘야겠으면 하나만 사요. 지금 입고 나갈 거.”
이것 봐. 이 여자는 바뀐 신분이 주는 특권을 하나도 누릴 줄 모르잖아. 윤완이 왼손으로 카드를 바꿔 쥔 뒤 세리에게 건넨다. 오른팔에 감긴 나린의 손을 뿌리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매출이 세 배가 되니 세리의 입이 귀에 걸렸다.
“화이트 잘 어울리던데 그거 입고 가면 되겠다. 연주 씨, 태그 제거하고 입혀 드려.”
언제 눈여겨봐 두었는지 세리는 나서서 추천까지 해주었다. 눈썰미 좋은 세리의 추천대로 새하얀 코트는 나린에게 마침맞게 잘 어울렸다. 계산이 모두 끝나자 윤완은 눈인사만 남기고 부티크를 떠났다. 윤완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연주는 괴생물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했다.
“처음 아니에요? 도 부사장님이 친척이나 클라이언트 아닌 분 옷 사러 온 거. 그것도 직접 데리고.”
똑같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세리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 나린과 윤완이 한적한 공원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추운 날씨 덕인지 비어 있는 벤치가 있었다.
“부사장님은 안 추우세요?”
나린은 달랑 정장 차림의 윤완을 보며 물었다.
‘자기 거나 좀 사 입지.’
걱정 섞인 타박은 늘 그렇듯 혼자 생각으로만 그쳤다.
“괜찮아.”
“아까는 고마웠어요.”
아까 ‘너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했다. 준우에게 안겨 다른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 머리가 텅 빈다는 말은 그런 순간을 수식하고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기분은 좀 어때?”
“괜찮아요.”
“나중에 준우 만나면 꼭 사과받아. 멀쩡한 정신일 때.”
“……그럴게요.”
근데, 꼭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실수였을 텐데……. 얼마나 그리웠으면. 떠나보낸 언니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속마음과 다른 답을 한 건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다. 나린은 걱정하고 있을 세훈에게 메시지라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수중에 폰도 지갑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부사장님, 휴대폰 갖고 있으세요?”
“아니. 코트 안에 넣어뒀어.”
그리고 그 코트는 바에 있고. 이로써 연락을 취할 방법은 없는 거였다. 나린은 곧바로 단념했다. 오히려 선택지가 없어진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괜히 연락했다가 이쪽으로 오겠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난감할 테니까. 오늘 밤엔 이대로 집에 들어가 쉬고 싶었다.
“근데, 제가 엄청 닮긴 했나 봐요.”
윤완과의 사이에 내려앉은 적막을 멀리 치워보려 나린이 말을 꺼냈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다현에 대한 얘기였다. 별일 아니란 말투를 한 건 그러면 윤완의 마음도 달래지지 않을까 하고. 저보다 더 준우에게 화가 나 버린 것 같은 그의 마음도.
“다현……언니 말이에요. 지난번에 태준 씨도 그런 얘기했었거든요. 다들 처음에 많이 놀랐다고.”
“…….”
“제가 언니랑 많이 닮아서.”
윤완이 침묵하자 그게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착각한 나린이 친절히도 배경 설명을 덧붙인다. 윤완은 땅바닥을 향해 떨어진 나린의 얼굴을 애달프게 훑었다. 아닌데. 하나도 안 닮았는데.
“그래도 그 덕에 잘 적응하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저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나린의 중얼거림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났다. 어쩌면, 할아버지도 그래서 절 찾은 건지 모르겠어요. 그리운 언니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래.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요. 평생을 남남으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가족으로 받아들여진 이 상황이. 어느 날 손바닥 뒤집듯 뒤집혀 버린 내 세상이.
“안 닮았어.”
윤완은 딱 부러지게 잘라 말했다. 나린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윤완을 쳐다보았다. 윤완 또한 피할 생각이 없다는 듯 정면으로 나린을 마주한다. 널 보면, 너 말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나지 않아. 세상에 하나뿐인 사람.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마음을 뒤흔든 사람.
“다들 닮았다던데.”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나린이 뱉은 문장이 밤공기를 타고 더욱 외로워졌다.
“안 닮았어. 전혀 달라.”
거듭 강조하며 윤완이 부인했다.
“…….”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동안 베풀어 주었던 친절들. 그거 전부, 다현 언닐 닮은 날 동생처럼 아껴 주던 거…… 아니었어요?
“저는 그동안 다현 언니 때문에 부사장님이 저한테 잘 해 주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면…….
“누가 그래.”
“…….”
“그런 거 아니야.”
설명이 안 되잖아. 미소가 어려 있던 나린의 얼굴이 조금씩 경직되고. 나린은 어렴풋이 대화를 더 이어가면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춥다. 이만 들어가요.”
왠지 감당할 수 없는 얘기를 듣게 될 것 같으니. 의자에서 일어서는데 커다란 손이 덥석 나린의 손을 움켜쥐었다. 긴 손가락들이 마디마디 감겨드는 감촉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삽시간에 피부를 타고 번진다. 번진 건 분명 열기인데 도리어 얼어붙은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윤완이 성큼 나린의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손은 여전히 꼭, 깍지를 낀 채로.
“연나린.”
처음이었다. 그가 온전히 이름으로만 불러준 건. 그의 마음 안에서 충동이 결심으로 바뀌느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 봐.”
나린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이 순간에도 어쩐지 윤완의 말은 따라야 할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윤완의 말은 나린으로 하여금 거스를 수 없게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좋아해.”
이렇게 멋없는 방식으로 고백을 하려던 건 결코 아니었는데.
“……네?”
무수한 별처럼 반짝반짝한 나린의 눈동자가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려 해보았다. 맞닥뜨린 중력에 저항이라도 해보겠다는 듯. 그래. 넌 그랬지. 언제나 두 번씩 말하게 만들었으니까.
“좋아해.”
몇 번이고 말해 줄 수 있어.
“좋아해.”
말하고 싶었던 마음을.
“좋아해, 연나린.”
전하고 싶었던, 감정을. 너무 비현실적이면 오히려 넋을 놓고 들여다보게 되나 보다. 나린은 윤완의 눈을 넋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블랙홀에 삼키어진 별처럼 나린도 어느새 윤완의 눈동자 안에 쏙 빨려 들어가 있다. 이렇게 오래 눈을 맞추고 있는데도 아무 느낌이 안 드는 걸 보니 정말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맞아. 꿈일 거야. 진짜일 리가 없어. 금방이라도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 낯설지만 기분 좋은 향과 함께. 이건 무슨 향수지? 처음 맡아 보는 향인 것 같은데. 감각은 단편적인 것들만 인식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뇌에서 처리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잠시 후 나린은 확신을 했다. 하루 사이 어떤 남자의 품에 안기고, 또 다른 남자의 고백을 받고. 이게 정말 현실일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