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서글픈 착각2021.09.14.
나린이 집에 도착했을 땐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나린 입장에서도 윤완 입장에서도 결코 달갑지 않은 손님.
“왔어요, 나린 씨?”
꼭 집주인인 것처럼 태준이 어쭙잖은 미소와 함께 나린을 맞이한다.
“왜 둘이 같이 오냐?”
예상치 못한 삼자대면에 세훈은 대리 긴장을 했다.
“부사장님이 오빠 보러 온다고 해서요.”
나린은 윤완이 아까 한 변명을 그대로 옮겼다. 순진하게 믿어버린, 되도 않는 지껄임을.
‘네가 날 보러?’
기가 찼으나 표현하진 않았다. 그저 윤완을 신기하게 관찰할 뿐이었다.
‘누구냐, 넌. 내가 아는 도윤완은 어딜 가고 왜 딴사람이 와 있냐.’
그러나 윤완은 세훈에겐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눈은 줄곧 태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태준 씨는 어쩐 일이에요?”
나린은 태준을 향해 느릿느릿 물었다. 그를 마주하는 게 거북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고 보면 얼른 정리해야 하는 관계인데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었다. 제 손으로 평화를 깨뜨리자니 좀처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내가 저녁 같이 먹자고 불렀어.”
세훈이 답을 가로채고 이번엔 윤완 쪽에서 세훈에게로 뾰족한 시선을 주었다.
‘나린이가 약혼 얘기 거절한 거 다 알고도 이태준을 집으로 끌어들였단 말이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린을 보고 있던 세훈은 까맣게 몰랐지만.
“그럼 재밌게들 노세요. 전 먼저 올라가 볼게요.”
윤완의 목적도 세훈이었고, 태준의 목적도 세훈임을 확인한 나린은 가뿐한 걸음을 2층으로 옮겼다.
“앗, 어디 가.”
세훈이 다급하게 나린을 불러 세운다.
“우리 술 한잔하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
이 제안은 윤완과 태준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모두 저를 보러 왔다는 연막작전을 쓰고 있지만 공동의 목표는 나린이란 걸 결코 모르지 않았다. 세훈은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을 더 가느다랗게 떴다. 이게 지금 누구 때문에 나온 조합인데 주인공이 어딜 빠지려고.
“술이요?”
“응. 불금이잖아.”
세훈의 말에 나린의 눈은 윤완과 태준을 번갈았다. 한 명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오너이자 직속 상사. 다른 한 명은 의도치 않게 차 버린 예비 약혼남. 물만 같이 마셔도 얹힐 것 같은 이 사람들하고 어딜 가자고?
“아뇨, 전 좀 피곤해서…….”
억지로 웃으려다 보니 미간이 티 나게 일그러졌다. 표정을 감추려 냉큼 돌아서는 찰나 이번에는 태준이 붙잡는다.
“같이 가요, 나린 씨. 내일 출근도 안 하는데.”
“…….”
“……할 얘기도 좀 있고.”
태준은 나린이 더 거절할 수 없도록 쐐기를 박았다.
*** 나린은 결국 그들을 따라나섰다. 세훈의 차와 태준의 차,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엔 주저 않고 태준의 차를 골랐다. 할 말이란 게 뭔지 궁금했으니까. 오늘 태준이 나린의 집에 와 있던 건 세훈이 부른 게 아니고 태준이 부탁한 것이었다. 태준은 나린을 만나 약혼 얘기를 다시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계산에 없던 도윤완의 등장은 악재였다. 그럼에도 태준은 그가 선점하고 있는 고지를 십분 활용했다. 나린이 그의 마음을 모르기에 윤완은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이 점을 활용하면 나린을 제 차지로 만드는 건 수월했다. 할 얘기가 있다, 그 한 마디면 될 만큼.
“할 얘기란 게 뭐예요?”
언제 보아도 똘망똘망한 눈을 한 나린이 운전석의 태준을 채근한다.
“여기서 하자고요?”
“이따가는 세훈 오빠나 부사장님 때문에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하고자 하는 얘기가 내 거절을 받아 주는 거라면 좋겠는데. 나린의 소망은 조급함을 불러일으켰다.
“알겠어요.”
태준은 핸들을 꺾더니 한적한 터를 찾아 차를 세웠다. 태준은 일단 자신의 무례함부터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단 얘기 먼저 할게요, 나린 씨.”
“……뭐가요?”
“나 좀 붙잡아 달라, 약혼하자,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말한 거요. 어차피 집안끼리 정한 상대, 그 정도면 충분할 줄 알았어요. 나린 씨가 기분 나쁠 만했어요. 미안해요.”
그럴 수 있다. 감정이 생겨나기도 전에 맺어지기로 결정된 사이니까. 나린은 금세 너그러워졌다.
“괜찮아요.”
다만 이 대화가 알맹이 없는 사과와 용서에서 그치지 않길 바랐다.
“그럼 약혼 얘긴 처음에 합의한 대로 없던 일로 하는 건가요?”
태준의 상반신이 나린에게로 틀어지고.
“일단은 그렇게 해요.”
나린의 입에서 커다란 안도감이 일시에 분출되었다.
“후우…….”
이게 저렇게까지 안도할 일인가. 서운함을 누른 태준은 최대한 심상하게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대신 어른들 속이는 건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왜요?”
그러기엔 우리 사이가 너무 멀리 와 버리지 않았나요. 단둘이 남겨진 것조차 이토록 숨 막히는데.
“이유는 처음이랑 같아요. 이 평화를 좀 더 유지하는 게 나린 씨도 나도 좋잖아요.”
다음 선볼 타자로 거론되는 윤재오의 얼굴을 떠올리니 매우 설득력 있는 변론이 아닐 수 없었다. 나린은 그의 제안을 승낙하되 조건을 붙이기로 했다.
“대신 기한을 뒀으면 좋겠어요. 딱 한 달만 더 하는 걸로요.”
“한 달이요?”
“네. 한 달 뒤엔 어른들께 사실을 말씀드려요.”
나린은 조금만 더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 시간 동안 집안 분위기를 익히며 어른들에게 통할 만한 설득 방법을 찾아야 한다. 태준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유는 달라도 시간 확보가 필요한 건 똑같았으니.
“알겠어요.”
이렇게 대답해주면서 속으로는 각오를 다졌다. 나린의 거절과 윤완의 고백 이후 태준의 마음 안엔 어떤 오기 같은 게 생겨났다. 나린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다. 나린이 주는 편안함과 신선함을 포기할 수 없기에, 지아가 안 된다면 그 자리만큼은 꼭 나린이 대신해주기를 바랐다. 약혼하고 결혼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린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만 해 준다면 딱히 잘못이랄 것도 없지 않을까. 도윤완이라는 변수가 생기긴 했으나 방향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 유리한 건 그이니까. 이미 굳힌 결심. 이제는 도망치지 않는 것만이 남았다. 나린을 좋아하노라 선포하며 정면 도전을 해왔던 도윤완처럼.
‘비록 한 달이지만, 나는 계속 노력할 생각이에요. 꼭 나린 씨 마음 돌려놓고 말겠어요.’
아집에 짓눌린 태준의 양 입술이 빈틈없이 꽉 다물렸다. *** 조수석의 윤완은 반쯤 굽힌 팔꿈치를 창에 기댄 채 말아 쥔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었다. 무언가에 골몰하는 모습이었다. 운전대를 굴리던 세훈은 슬쩍 그를 일별했다. 출발 전 나린이 태준의 차를 타고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윤완의 눈썹이 있는 대로 구겨지는 걸 보았다. 감정을 드러내는 도윤완이라니. 세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살면서 도윤완을 놀릴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오겠는가. 그러니 목숨을 걸 가치는 차고 넘친다.
“근데 무슨 일이야?”
불쑥 던져진 물음에 윤완은 단상에서 헤어났다.
“어?”
“아까 나린이가 그랬잖아. 너 나 보러 온 거라고. 무슨 일인데?”
세훈의 의도를 대번에 눈치챈 윤완의 눈썹이 꿈틀대었다.
“시끄러워.”
윤완은 짐짓 목소리를 내리깔며 내뱉었다. 여기엔 더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건 세훈의 승리감만 더할 뿐이었다. 훗. 살다 보니 도윤완보다 우위를 점하는 날도 오는구나.
“왜? 갑자기 날 보러 온 이유가 사라졌어?”
“…….”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순간. 고작 연세훈을 상대로. 이건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다. 윤완의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크크큭.”
세훈은 결국 연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입술을 옹다문 윤완은 아까 택시에서 보았던 나린의 미소를 떠올리는 걸로 속을 달래야 했다. *** 먼저 도착한 세훈과 윤완은 태준과 나린을 기다렸다가 함께 바 안으로 들어갔다. 바의 중년 사장은 그들과 아는 사이인지 살갑게 알은체했다.
“어? 왔어? 준우가 너희도 온다고는 안 했는데…….”
“준우요?”
세훈의 머리가 기우뚱하고.
“몰라? 지금 와 있어.”
어쩐지. 합류하라는 메시지에 답도 없더라니. 세훈은 자그맣게 고개를 깐딱거렸다. 나린이 준우를 찾으려 바 안을 휘둘러보는데 세 남자가 익숙하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끼리 공유하는 지정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바 한 귀퉁이에 위치한 프라이빗 룸. 태준이 앞장서서 문고리를 비튼다. 문이 열리며 드러난 공간 안에 열댓 명은 거뜬할 테이블을 준우 혼자 고적히 차지하고 있었다.
“뭐냐. 올 거면 말을 하지.”
예고 없이 침입한 그들을 준우의 눈이 비통하게 우러러봤다.
“어떻게 알았어…….”
혀는 잔뜩 꼬부라진 채.
“뭘 어떻게 알아. 우리도 그냥 술 마시러 온 거지.”
“설마, 이걸 너 혼자 다 마셨냐?”
세훈과 태준이 연달아 내쏘았다. 곧 술잔과 위스키가 보충되고, 세훈은 자리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잔을 채워 주었다. 어쩌다 보니 준우의 옆에 앉게 된 나린은 오늘따라 심상찮은 그를 소심스레 힐끔거렸다. 그러나 말을 붙일 만큼 친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숨죽이고 있기로 했다. 가장 먼저 준우의 마음을 간파한 사람은 태준이었다. 내일이었던가. 준우랑 다현이가 약혼했던 날이. 태준은 텅 빈 준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내일 저녁엔 혼자 이러지 말고 연락해라. 같이 마셔 줄 테니까.”
뒤이어 윤완도 태준의 말 속 숨은 뜻을 포착해냈지만 내색하지는 않는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이기에. 그랬는데. 맞은편에 앉은 저 여자, 연나린을 만나기 전까지는.
“뭔 소리야?”
그들 무리에서 오직 한 사람, 세훈만이 이 비밀 교신에 담긴 뜻을 눈치채지 못했다.
“너는 사촌 오빠라는 게…….”
“아.”
그제야 내용을 해독한 세훈은 외마디 탄성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준우가 채워진 술잔을 단숨에 비워내자, 혈관으로 흘러든 지독함이 켜켜이 쌓인 그리움에 엉겨 붙는다. 나린도 태준이 세훈에게 던진 ‘사촌 오빠’라는 단서로 상황을 어림짐작해내었다. 뭔가…… 다현 언니랑 관련된 일인가 보다. 그렇지만 이토록 망가져 버린 모습이라니. 두 사람, 그냥 형식적으로 약혼한 사이가 아니었구나. 이 세계에서도 그런 약혼이 가능한 거였구나.
“근데 태준이 나린이랑 할 얘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준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세훈은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준우가 슬픔을 꼭꼭 씹어 삼키는 사이 옆에서 평소처럼 웃고 떠들어 줄 심산이었다.
“어. 얘기했어. 오는 길에.”
“무슨 얘기 했는데?”
“비밀.”
“와, 너무한다.”
데시벨이 올라간 음성, 과장된 리액션. 이 모든 게 준우를 위한 것임을 안 나린은 늘 가볍게만 보이던 세훈에게도 저런 세심한 면이 있구나 하며 다시 보았다. 툭. 연거푸 술잔을 털어 넣던 준우의 두 손이 힘없이 내려뜨려진다. 곧게 서 있던 목이 휙 아래로 꺾였다. 일인극이라도 보는 것처럼 모두의 시선이 준우를 따라 이동했다.
“……괜찮으세요?”
바로 옆자리에서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던 나린은 끝내 입을 열었다. 그를 살피려 나린이 등을 굽힌 순간 준우가 고개를 들었다. 불시에, 두 눈이 마주했다. 준우의 팔이 뻗어진 건 너무도 찰나의 일이었다. 나린이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의 찰나. 윤완이 반응할 수 없을 정도의 찰나. 나린의 시야가 캄캄해지고 낯선 섬유 냄새가 감지되었다. 알코올 향보다도 더 강하게. 나린은 부지불식간에 준우의 품 안에 갇혀버린 저를 발견했다.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온몸이 뻣뻣이 경직되었다. 밀어버릴 수도 마주 안아 줄 수도 없어서 그대로 있다 보니 안겨 있는 시간도 덩달아 길어졌다.
“……보고 싶었어.”
한 글자 한 글자 소리를 따라 나온 숨결이 나린의 목 뒷덜미를 간질였다.
“보고 싶었어, 다현아…….”
그녀가 아닌, 그녀와 눈이 비슷한 누군가의 이름. 가슴이 미어진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알 것 같다. 이건 너무도 서글픈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