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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잘 컸다 (30/101)

#30. 잘 컸다2021.09.10.

혜원에게 혼담 파기 의사를 통보한 다음 날 아침, 윤완은 오랜만에 팀장들과 조찬 약속이 있었다. 괜한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장소는 사내 식당으로 잡았다. 프라이빗 룸 케이터링 서비스가 훌륭하여 자주 애용하는 편이었다. 윤완을 위시한 팀장들이 식당을 나와 로비로 접어들자 출근길 직원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집중되었다. 이 회사에서만큼은 윤완도 스타였다. 아직은 아버지 일현 뒤에 머물며 미디어 노출을 피하고 있지만 잘난 그의 존재가 널리 널리 퍼질 날도 머지않았다. 지금도 어쩌다 기사 사진이 실릴 때면 빛나는 외모 덕에 SNS 인기글에 회자되고는 했다. 윤완이 보안 게이트 앞에 이르자 안내 데스크 직원이 재빨리 문을 작동시켰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그가 일순 멈추어 선다. 뒤따르던 팀장들도 줄줄이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윤완의 시선은 정문 너머 익숙한 실루엣에 고정되었다. 겨울 햇살이 찬 공기를 만나 하얗게 부서지는 회전문 밖의 풍경. 그 안에 나린이 담겨 있었다.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우산을 씌워주겠다고 했던 그 구매팀 사원과 함께였다. 언뜻 보기에는 우연히 마주쳐서 잠시 한담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16558030080536.jpg“흠.”

16558030080541.jpg“왜 그러십니까, 부사장님?”

난데없는 간투사에 인사팀장은 혹 의전 과정에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점이 있었나 가슴을 졸였다.

16558030080536.jpg“아닙니다. 가시죠.”

몸을 돌려 게이트를 통과하는 윤완의 등 뒤에서 재무팀장과 인사팀장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한다. *** 욕조에 몸을 담근 혜원은 제 입술만큼이나 매혹적이고 붉은 빛깔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늦잠을 잤다기보다는 밤잠을 못 잤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제 저녁 윤완의 이별 통보는 밤잠을 설칠 정도의 모욕이었다. 혜원은 똑같이 맞받아쳐 주지 못했던 게 분하면서도, 그럼에도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는 마음이 견딜 수 없이 비참했다. 그러고도 도윤완이란 말이야? 어제 나한테 한 짓을 보고도 여전히 도윤완이야? 모든 걸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온 혜원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유일한 한 가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와인잔을 내던지자, 욕실 바닥에 부딪힌 잔이 와장창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16558030080548.png‘이유가 뭘까. 갑자기 돌변한 이유가.’

그동안 한 번도 이 약혼에 거부 의사를 내비친 적 없었는데. 오히려 너무할 정도로 무관심하기만 했지.

16558030080536.jpg‘후회되면 이제라도 없던 일로 해. 정식 약혼 전에 정리하는 게 너한테도 좋지 않겠어?’

  지난번 테라 호텔에서 그의 진심을 갈구했을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이건가. 내가 도윤완의 진심을 바라서. 온기가 없는 남자에게 따스함을 애걸해서. 그 위로 또 다른 목소리가 겹쳐지고.

16558030080541.jpg‘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윤완이잖아. 이상하지 않아?’

  이건 재오가 했던 말이었다. 그는 싱가포르행 비행기에서 윤완이 나린과 좌석을 바꿔 준 일에 의구심을 표했었다. 혜원은 나린과 윤완을 나란히 그려보다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16558030080548.png‘가도 너무 갔네. 도윤완이 누굴 좋아할 리가 없잖아? 더더군다나 절친과 약혼을 앞둔 여자를.’

혜원은 이유를 찾기 전에 당장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부터 고심했다. 곧 도일 그룹에서 혼담을 무효화하자는 연락을 해올 것이다. 자존심이 전부인 혜원은 이대로 먼저 혼담을 파기 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일단은 선수를 쳐야겠다. 내가 먼저 깬 걸로 하고 도윤완의 마음을 되돌리는 건 그 뒤에 차근히 진행해도 늦지 않는다. 욕실을 나온 혜원은 곧장 아버지 신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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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식은 우산을 씌워준 게 고맙다며 기어이 저녁을 샀다. 나린이 거듭 거절했지만 형식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 대신 사내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형식이 연신 아쉬움을 드러냈으나 나린은 만족했다. 우산을 씌워줬던 친절이 딱 이 정도 크기였던 것 같으니.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회사 정문 앞에서 곧장 헤어졌다. 형식은 지하철역, 나린은 택시 승강장. 서로 반대 방향이었다. 형식과의 시간은 무난했다. 그는 소식이 느린 편인지 나린의 배경에 감감인 눈치였다. 덕분에 편안하고 거리낌 없는 대화 분위기가 유지됐다. 싱가포르 출장 때 태도가 돌변했던 고 부장과 추 과장을 떠올린 나린은 이대로 그가 쭉 몰라주기를 바랐다.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얘기를 듣게 되겠지만.

16558030080566.jpg‘참, 그렇지.’

할 일이 생각난 나린이 폰을 꺼내 든다.

16558030080566.jpg[수정아. 혹시 소개팅할 생각 없어?]

계속 외롭다고 넋두리를 해대었던 형식에게 수정과의 소개팅을 제안했었다. 형식 정도면 직장도 탄탄하고 외모도 준수하니 소개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은, 수정일 더 위하는 마음에서.

16558030080541.jpg[웬 소개팅?]

수정으로부터 즉답이 날아왔다.

16558030080566.jpg[우리 회사 후밴데 나이는 동갑이야.]

16558030080541.jpg[너랑 친해?]

16558030080566.jpg[친하진 않은데 꽤 여러 번 봤어. 일도 같이한 적 있고. 오늘 저녁 같이 먹었거든. 괜찮은 사람 같아 보여.]

16558030080541.jpg[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16558030080566.jpg[아냐. 소개팅 시켜준다고 했더니 좋대.]

16558030080541.jpg[그래, 너랑 안 친하면 잘 안 돼도 부담 없으니까. 할게.]

나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 됐다. 그리고 잘 됐으면 좋겠다. 딱히 떨어지는 콩고물도 없는데 소개팅을 주선할 때면 늘 그런 마음이 든다.

16558030080536.jpg“누구야?”

택시 승강장에 다다랐을 즈음 누군가 메시지 창을 들여다보며 불쑥 말을 붙였다. 나린이 움찔하며 돌아보자 어느 틈엔가 윤완이 다가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16558030080566.jpg“부사장님…….”

16558030080536.jpg“앞 잘 보고 걸어. 그러다 넘어져.”

윤완이 나무라고, 나린은 주위를 둘레둘레거렸다.

16558030080566.jpg“차는 얻다 두셨어요?”

보도 위를 걷는 도윤완 부사장님이라니. 너무도 눈에 설은 그림.

16558030080536.jpg“오늘은 차 없어.”

16558030080566.jpg“왜요?”

16558030080536.jpg“그냥, 그렇게 됐어. 택시 타는 거면 나도 같이 가.”

16558030080566.jpg“어디 가시는데요.”

들어 보니 부사장님 집은 우리 집이랑 가깝지도 않던데.

16558030080536.jpg“너네 집. 세훈이 만나러.”

뭔가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맨 앞에 정차해 있는 택시를 잡아탄다. 나린이 먼저 안으로 쏙 들어간 뒤 윤완도 몸을 욱여넣었다. 택시에 몸을 싣자마자 승객들이 드나들며 남긴 다양한 체취가 코를 찔렀다. 윤완은 열악한 환경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오늘 차가 없다고 한 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퇴근길 정문 앞에서 차에 오르기 직전 길 건너 택시 승강장을 향해 걷는 나린을 발견했다.

16558030080536.jpg‘먼저 들어가요.’

  윤완은 운전 기사에게 이른 뒤 부지런히 나린을 쫓아왔다. 왜 차가 없냐는 질문엔 그냥 그렇게 됐다고 둘러대었다. 나린에게는 이런 식의 얼렁뚱땅도 잘 통했으니까.

16558030080536.jpg“일찍 퇴근했던데 뭐 하다가 이제 들어가?”

윤완이 묻는다. 어떻게 알았지. 말단 직원 퇴근 시간도 체크하시나.

16558030080566.jpg“저녁 먹었어요.”

나린은 괜히 찔려하며 대답했다.

16558030080536.jpg“누구랑?”

16558030080566.jpg“예전에 일로 알게 된 다른 팀 직원이랑요.”

16558030080536.jpg“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 직원?”

오늘 아침 회사 정문 앞에서 얘기 나누던 그 남자? 나린은 윤완을 쳐다봤다. 도윤완 부사장처럼 바쁜 사람이 별걸 다 기억한다고 생각했다.

16558030080566.jpg“네.”

윤완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히고.

16558030080536.jpg“낯선 사람 함부로 가까이하면 안 돼.”

마치 어린아이를 훈계하는 어조였다. 그래서였나 보다. 나린의 마음 안에서도 사춘기 같은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다.

16558030080566.jpg“왜요?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같이 일했던 회사 동료인데.”

16558030080536.jpg“그래도.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접근할지 모르니까.”

16558030080566.jpg“의도요?”

역시. 이 사람 눈엔 세상이 전부 악의 소굴로 보이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그렇게 냉소적이고, 불신으로 가득하고. 보고서 단 한 줄도 곧이곧대로 믿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고 했던 민하 과장의 푸념이 심히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16558030080536.jpg“이제 네 위치가 달라졌으니까. 달라진 만큼, 너한테 접근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다를 거야.”

윤완의 충고는 진실했으나 나린에겐 전혀 와닿질 않았다.

16558030080566.jpg“네.”

그래서 기계적으로 답을 할 뿐이었다. 교차로를 앞두고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졌다. 택시가 멈춘 후 나린의 고개는 윤완을 의식해서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때, 차창을 투과해 두 눈에 담기는 광경. 형식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고 그 옆엔 웬 낯선 여자가 딱 달라붙어 있다. 다음 순간, 여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형식에게 팔짱을 꼈다. ……어? 이 모든 걸 지켜본 나린의 동공이 크게 일렁였다. 형식은 곧바로 여자를 뿌리친 뒤 불안한 기색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얼굴이 택시 쪽을 향하여서 나린이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린다.

16558030080536.jpg“왜 그래?”

윤완의 물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고, 단지 지금 목격한 장면만이 머릿속을 압도했다. 이럴 수가. 여자친구 없다며. 외로우니까 소개팅 시켜달라며! 그러다가 다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 본 것만 가지고 섣부르게 판단해선 안 된다. 어떻게 된 건지 최대한 객관적으로 추론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 옆에 있던 여자가 여자친구가 아니고, 그래서 팔을 뿌리쳤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바로 집에 갈 거라고 하긴 했어도, 가는 길에 아는 사람을 만났을 수도 있고……. 근데…… 그렇다기엔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어. 그리고……. 그 불안한 얼굴은……? 누가 볼까 안달복달해 하며 주위를 살피던 그 모습은……?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게 자명한 그 얼굴은 분명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나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남’은 방금 헤어져 아직 근처에 있을 나린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동기를 모르겠다.

16558030080566.jpg‘왜 굳이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나한테 소개팅을 받아서 좋을 게 뭐라고.’

신호가 바뀌고 택시가 출발했다. 쭈그렸던 상체를 편 나린은 일단 폰부터 찾았다.

16558030080566.jpg[수정아, 소개팅 취소! 미안!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나 봐.]

메시지를 보낸 뒤 놀란 가슴을 진정하려 심호흡을 한다. 옆에서 윤완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린을 살폈다. 나린의 표정은 심해 밑바닥처럼 어두컴컴했다. 방금 전 목격한 바와 추론한 바를 종합해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형식의 접근엔 모종의 의도가 담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진짜로……. 부사장님 말이 맞았던 거야? 반쯤 넋이 나간 나린의 얼굴이 윤완에게로 향하였다.

16558030080566.jpg“부사장님…….”

16558030080536.jpg“왜.”

나린이 보이는 이상 증세를 걱정하며, 윤완이 대답했다.

16558030080566.jpg“혹시…… 그런 적 있었어요?”

16558030080536.jpg“무슨 그런 적?”

16558030080566.jpg“방금 말한 거요……. 달라진 위치 때문에 누군가 의도를 갖고 접근할 수 있다고 한 거…….”

16558030080536.jpg“…….”

16558030080566.jpg“그거, 부사장님 경험담이에요?”

아직 놀란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데. 설마, 부사장님은 이미 겪었던 일인 건가요.

16558030080536.jpg“많았지. 학교 다닐 때.”

윤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답했다. 덤덤한 답이 외려 더 가슴 아프게 들렸다. 그랬구나. 성인인 나도 이렇게 당황스러운데……. 어린 부사장님은 어땠을까.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저 냉정한 성격도 어쩌면……. 시리도록 차가웠던 첫인상과 그럼에도 이따금씩 세심했던 배려가 교차되어 떠올랐다. 삐딱했던 첫 만남. 하지만 그 후엔. 엘리베이터 사고 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휴가를 주고 정신과 상담을 예약해 주고, 연말엔 우울해하지 않도록 깜짝 케이크도 선물해 주었다. 싱가포르에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루를 만들어주었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예쁜 팔찌도 선물해줬다. 얼음 갑옷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돌이켜 보면……. 돌이켜 보면.

16558030080566.jpg“잘 컸다…….”

나린이 읊조린다.

16558030080536.jpg“뭐?”

무슨 말인가 싶어서, 윤완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16558030080566.jpg“잘 컸어요, 부사장님. 그런 나쁜 일들이 많았는데도.”

윤완의 눈동자 한가운데 박힌 그녀가 맑게 웃었다. 웃고 있는 눈이었음에도 마치 우는 것처럼 촉촉했다. 이 여자, 이젠 대놓고 유혹한다. 이건 유혹이 분명하다. 윤완은 자신이 위치한 공간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나린의 눈이 현실 지각 능력을 앗아가 버린 듯. 그를 괴롭히던 불쾌한 냄새도 더 이상 나지 않는다. 다만, 나린이 웃어주는 세상만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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