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통보2021.09.07.
어색한 정적. 네 사람이 성인이 된 이후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야,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냐?”
어색함에 대한 면역력이 가장 떨어지는 세훈이 이 상황을 타개하려 해 보았다. 좋아한다고? 매출 신장, 이익 개선, 신규 사업 발굴이 아니라 사람을? 그냥 사람도 아니고, 유능한 직원도 아니고, 여자를, 도윤완이……. 이게 진담일 리 없다. 진담이라면 20여 년 가까운 친구 관계는 허상이나 매한가지였다.
“진짜야.”
모두의 동요에도 윤완은 의연했다. 태준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윤완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인데, 그 상대로 자신과 혼담이 오가는 상대를 지목했다. 방금 전 그가 나린과의 약혼을 진행하겠노라 선포했음에도.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아니면, 나랑 어떻게 돼도 상관없이 연나린을……. 우정 같은 거,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나린이도 알아?”
제일 빨리 상황을 받아들인 사람은 단연 준우였다.
“아니.”
“말할 거야?”
“하겠지. 언젠가는.”
언젠가, 그 애가 가장 기뻐할 방법을 찾아서. 부모님께도 말씀드렸고, 친구들에게도 알렸고. 이로써, 혜원에게 통보하는 것만 제외하면 윤완이 동남아 출장 중 계획했던 판 뒤집어엎기는 대강 마무리된 셈이었다. 윤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간다.”
2501호실에 일으킨 파문을 뒤로한 채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 연 회장의 저택, 다이닝룸.
“흠.”
나린은 자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는 세훈이 부담스러웠다.
“왜 그러는데요.”
탄산수를 홀짝이다 말고 묻는다.
“도대체 이 얼굴 어디에 매력이 숨겨져 있나 해서.”
“네?”
느닷없는 외모 평가에 황당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세훈은 해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눈엔 평범하게만 보이는 이 자그만 아이가 다년간 공고히 다져온 그들의 우정을 뒤흔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너, 최근에 윤완이 만난 적 있어?”
세훈은 같은 집에 사는 걸 이용해 캐낼 수 있는 건 다 캐내 볼 작심을 했다.
“네.”
“언제?”
“지난주 토요일 밤에요.”
“……윤완이 그날 귀국하지 않았나?”
“네. 근데 저녁 안 먹었다고 같이 먹어달라고 하셨어요.”
윤완의 입을 통해 들은 적은 없지만, 밥을 먹고 난 직후 돌려보내 줬으니 그게 만남의 목적이었을 거다. 나린은 그렇게 믿었다. 도입부부터 흥미진진하여 세훈의 눈이 빛났다. 호오. 서울에 오자마자 나린일 불러내? 고작 밥 같이 먹자고?
“그전엔 또 언제 만났는데?”
“그전에는…… 싱가포르에서요.”
어딘지 취조당하는 기분은 들었지만 그래도 나린은 성심껏 답변을 해주었다.
“싱가포르?”
“출장이 겹쳤었어요.”
이거, 이거. 출장 일정도 일부러 그렇게 짠 거 아냐? 세훈의 상상력이 애드벌룬처럼 커간다.
“싱가포르에서 같이 일했어?”
“설마요. 그냥, 본사 출장자들 격려한다고 밥 사주시고…….”
지체 높으신 부사장님께서 평직원들을 챙겼단 말이지?
“저 출장 일정 하루 미뤄졌었잖아요.”
“어어.”
“그래서 주말이 꼈었는데, 토요일 오후에 같이 놀러 다녔어요.”
당시엔 몰랐는데 그날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함께 관광을 다닌 게 맞는 것 같다고, 나린은 혼자 결론 내린 바 있었다. 그러고 나자 귀국 이후 한결 온화해진 윤완의 태도가 성립이 됐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싱가포르 이후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대화라도 나눴다던 다현 언니의 자리를 좀 더 내게 내어준 것 같았어.
“나린이 네가 먼저 놀아달라고 했어?”
“아니요. 부사장님이 연락하셨어요.”
도윤완이 먼저 불러냈고.
“뭐 하면서 놀았는데?”
“쇼핑도 하고, 분수 쇼도 보고, 저녁도 먹고, 멀라이언 파크도 가고…….”
들으면 들을수록 점입가경이다. 세훈은 소름이 돋아났다. 와, 도윤완. 대놓고 데이트를 했네?
“아, 맞다! 비웃으셨던 그 초콜릿 살 때 부사장님도 같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순전히 제 잘못만은 아니에요. 도윤완 부사장님도 말리지 않았으니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요.
“푸핫.”
더 참지 못하고 세훈의 웃음보가 터졌다. 나린의 전하는 윤완의 행동은 초면도 이런 초면이 없었다. 고고하신 도윤완 부사장님께서 싸구려 초콜릿을 파는 곳에 멀뚱히 서 있는 모습이라니. 상상하는 것조차 불경스럽다.
‘근데, 정말 야단났네. 이러다가 도윤완, 이태준 사이 진짜로 틀어지는 거 아냐?’
흥밋거리 삼아 시작했던 이 취조는 심문자를 울상 짓게 하는 결과만 내고 종결되었다. *** 1월인데 드물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혜원을 만나러 가는 길. 윤완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린과 딱 마주쳤다.
“퇴근해?”
윤완이 묻는다. 나린은 주변을 경계했다. 안 그래도 신데렐라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데 윤완과 허물없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더 이상의 이목은 사절이다. 다행히도 다른 직원은 안 보였다.
“네.”
짤막히 답한 나린은 바로 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에서는 사적으로 말 걸지 말아 주세요.]
이상하긴 했지만 윤완도 묵묵히 답장을 했다.
[왜?]
나린이 하는 거라면 뭐든 맞춰줄 생각이었다. 제 상식에선 이해 못 할 행동이라고 해도. 메시지를 보내는 나린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은 색다른 재미를 안겨주었다. 나한테 메시지를 할 땐 저런 얼굴을 하는구나. 얼음만 채워져 있는 줄 알았던 가슴에 졸졸 시냇물이 흐르는 시간.
[다른 직원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요.]
[재벌 3세끼리 사적으로 아는 사이인 게 뭐 어때서.]
윤완이 멋대로 정의한 자신의 신분에 나린이 보이지 않게 펄쩍 뛴다. 재벌 3세라니!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안 돼요. 메시지도 그만 하세요. 답장 안 할 거예요.]
그러더니 보란 듯이 폰을 가방에 집어 넣어버렸다.
‘먼저 시작한 건 넌데…….’
윤완의 눈엔 그 모습마저 마냥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사뿐히 올라탄 나린은 로비를 표시하는 ‘L’ 버튼을 눌렀다. 차가 정문에 대기 중인 윤완 또한 행선지가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한 층 아래에서 정지하였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네, 안녕하세요.”
우르르 올라탄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서 윤완은 예의를 갖춰 답을 해 주었다.
“앗. 나린 대리님. 오랜만이에요.”
언젠가 법인 세무 이슈 해결을 위해 협업한 적 있는 구매팀 강형식 사원이 나린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기사가 나고 먼저 다가오는 동료가 없는데 나린은 가뭄 속 단비를 만난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사원님.”
“퇴근하세요?”
“네.”
이어지는 대화에 요새 젊은 직원들은 엘리베이터 예절도 모른다며 차부장들이 고개를 저어댔다. 더군다나 VIP 도윤완 부사장이 타고 있는데.
“저도요. 우산 있으세요? 밖에 비 오던데.”
윤완을 의식했는지 형식이 목소리를 낮췄다.
“네.”
“아. 전 우산 안 가져와서 편의점 들러서 하나 사려고요.”
난감한 표정으로 형식이 말했다.
“편의점까지 씌워 줄까요?”
편의점이 먼 것도 아니고 그의 인사가 반가웠던 만큼 나린은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오. 그래 주실래요?”
“그럼요. 바로 요 앞인데.”
“고마워요, 대리님!”
띵! 로비에 도착한 뒤, 엘리베이터 안의 모든 직원은 윤완이 먼저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어쩐지 윤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사장님, 1층입니다.”
나이 지긋한 부장 하나가 일깨워 준 후에야 윤완이 움직이고, 그 뒤를 형식과 나린이 재잘재잘 담소를 나누며 뒤따른다.
“방금 부사장님 표정 봤어?”
“네. 완전 소름. 뱀파이어인 줄 알았어요.”
“경영지원실 사람들은 대면보고 어떻게 한대? 난 저런 표정이면 입도 뻥끗 못 할 것 같은데.”
과연 듣던 대로구나. 뒤이어 내린 차부장들은 악명 높은 평판에 격하게 공감하며, 너도나도 고개를 내저었다. *** Y 호텔 한식 레스토랑 다이닝룸. 파인 다이닝 코스의 마지막 차례인 도라지 차와 도라지 타락편을 앞에 두고, 혜원과 윤완이 마주 앉아 있다.
“……그러니까 올여름엔 보름 정도 떨어져 있어야 할 거야. 아니면 오빠도 같이 갈래?”
혜원은 달콤한 디저트만큼이나 달콤한 기분으로 조잘대었다. 다만 그 조잘거림은 목적지에 하나도 도달하고 있질 않았다.
“오빠!”
그녀의 목적지, 윤완은 찻잔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혜원은 더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윤완은 다문 입술을 유지한 채 시선을 올렸다. 지루해 죽겠는 이 자리도 끝이 보인다. 조금만 더 참자.
“내 얘기 들었어?”
“뭐라고 했는데?”
“하여튼. 집중 좀 해. 이번 여름휴가는 파리에서 보낼 거라고. 오빠도 같이 갈 생각 있냐고.”
그럴 리가. 나는…… 앞으로 널 만날 일 자체가 없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쯤 되었으면 그만 말을 꺼내도 될 것 같다. 오늘 혜원을 불러낸 진짜 이유에 대해.
“혜원아.”
“응?”
혜원은 조각낸 타락편을 유자 무스에 적셔 한 스푼 떠먹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기 셰프 바뀌었나? 아까 메인도 그렇고, 영 전만 못하네.”
“우리 약혼 얘기, 없던 일로 하자.”
혜원이 아무렇지 않게 지껄인 불평처럼 윤완도 아무렇지 않게 끝을 얘기했다. 맛이 없어진 도라지 타락편과 그만 끝나야 하는 사이. 그 둘이 하나 다를 바 없다는 듯. 그들 사이가 애당초 이런 절차를 요하는 것이었는지조차 의문이기는 했다. 정한 것도 부모님들이니 정리도 부모님들 선에서만 이루어지면 되는 거였다. 그러나 뭐든 확실히 해두어 나쁠 건 없었다.
“뭐?”
혜원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길 가다가 날벼락을 맞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우리 부모님께는 말씀드렸어. 두 분 다 받아들이셨고. 조만간 신 회장님께 얘기가 들어갈 거야. 그게 싫으면 네가 먼저 깨고 싶다고 말씀드려도…….”
“안 돼!”
기계음처럼 줄줄 이어지는 윤완의 대사를, 혜원의 고성이 싹둑 잘랐다. 윤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반응쯤 예상 못한 것도 아니었다. 혜원이 어떤 히스테리를 부리든 윤완의 목적은 통보다. 협의가 아닌 통보.
“누구 마음대로? 오빠, 미쳤어?”
분노에 휩싸인 혜원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말도 안 된다. 우리의 혼담은 계약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남자를 손에 넣는 계약을 한 거다. 근데 손바닥 뒤집듯 간단히 뒤집겠다고? 아니, 그럴 순 없지. 가계약도 계약이고, 구두계약도 계약인데.
“못 들은 걸로 할게. 어머님께서 많이 놀라셨겠네. 내일 오전에 전화 드려야겠다.”
혜원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물쩍 이 사태를 무마하려 해 보았다.
“억지 쓰지 마.”
“지금 억지 쓰는 게 누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윤완이 먼저 저녁을 먹자고 하다니, 웬일인가 했다. 그의 연락이 뜻밖이긴 했어도 너무 오래 못 봐서 미안했나 보다 하고 가볍게 넘겼던 혜원이었다. 근데 이러려고. 실상은 이러려고. 이 남자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걸까.
“나는 분명히 밝혔어, 내 의사. 이 약혼 깨는 거 절대 안 돼.”
씩씩대면서도, 혜원은 침착하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속마음은 콧대 높은 그녀답지 않게 절박했다. 제발 그냥 놀리는 거라고 해줘. 내가 오빠 마음 요구하지 않겠단 약속 안 지키고 성가시게 굴어서 잠깐 화가 난 거라고. 그러면 앞으로는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진짜 연인 대접 같은 건 바라지도 않을게.
“마음대로. 혼자 약혼하는 게 가능하다면.”
윤완은 작정한 듯 혜원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만 골라 한다. 혜원이 아무리 백 퍼센트의 분노를 쏟아 부어도 돌아오는 건 감정 없는 비아냥뿐이었다.
“야! 도윤완!”
결국 한계치에 도달한 혜원은 이성을 잃고 내질렀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분노를 터뜨린들 이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그 동안은 탐색 기간이었던 걸로 치고, 탐색해 보니 약혼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거고. 그러니 약혼 얘기는 없던 일로. 하나도 어려울 게 없는데.”
“…….”
“다신 볼 일 없을 거야.”
마지막 말을 남긴 윤완은 매정하게 다이닝룸을 떴다. 덩그러니 남겨진 혜원은 심장이 덜덜 떨려 제대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왜 이런 날벼락을 맞게 된 건지 알 수 없다. 혜원은 핏발 선 눈으로 윤완이 떠나간 쪽을 매섭게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