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없던 일로2021.09.03.
월요일 밤. 윤완의 소집에 테라 호텔 2501호의 주인들이 모였다. 윤완이 모임을 주도하는 건 연례행사처럼 드문 일이었다.
“뭐 할 말 있냐?”
준우가 손목을 빙글 돌리자 온더락 잔 속 얼음들이 맞부딪힌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본격적인 대화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어.”
윤완의 얼굴을 빼곡히 채운 결연함은 예사롭지 않은 낌새를 내비쳤다.
“뭔데?”
세훈의 물음과 함께 태준과 준우의 시선도 윤완에게로 쏠렸다.
“나 혜원이랑 약혼,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룸 안의 모든 동작이 정지하며 정적이 일고.
“뭐?!”
세훈의 양 입술이 위아래로 쩍 갈라졌다. *** 윤완이 부모님께 제 의사를 전달한 건 바로 어제 늦은 오후였다. 윤완의 아버지 도일현 부회장과 어머니 금화연 여사는 서재에서 한갓진 일요일을 보내는 중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밖에서나 집에서나 일관되게 로봇 같은 아들이 부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건 실로 오랜만이다.
“뭐냐.”
일현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화연도 읽고 있던 시집을 접었다.
“혜원이 문젭니다.”
“약혼식 서둘러 달라고?”
일현은 빤하다는 듯 시큰둥해했다.
“얘, 안 돼. 약혼식은 상황을 좀 지켜보고 정하기로 했단 말이야. 이 약혼이 미칠 파장이 얼만데.”
금 여사가 섣부르게 끼어들며 곤란해했다.
“그 반대입니다.”
윤완의 말에 일현과 화연의 표정이 슬며시 어두워졌다.
“반대라니?”
윤완은 근엄한 아버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혜원이와의 혼담, 없던 일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 다시 2501호.
“그래서 혜원이도 동의했어?”
넷 중 윤완 다음으로 냉철한 편에 속하는 준우가 상황파악을 시도하였다.
“부모님들께만 말씀드리고 혜원이한텐 아직 안 했어.”
대답을 하면서 윤완은 재차 어제 오후의 대화를 복기해보았다.
*** 너무도 당당했던 요구는 도리어 현실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다투기라도 한 게냐.”
일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느슨히 되물었다. 저 녀석이 사랑싸움을 할 위인이 못 되는데. 스스로도 말이 안 되는 줄 알면서.
“아닙니다. 다투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냥 이 약혼을 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아들의 입에서 그냥 나오는 말이 없다는 걸 잘 아는 금 여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너 이게 애들 장난인 줄 아니? 이제 와서 혼담을 물리면 그쪽도 그쪽이지만 우리도 얼마나 망신인데.”
모두가 선망하는 혜원이를 며느리로 들여 전시회장도 가고, 사교모임도 다니고, 실컷 자랑할 꿈에 부풀어 있던 금 여사 입장에선 흥분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직 약혼 전이니 양가에 피해 가지 않게, 애초에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는 줄로 압니다.”
“그래도 소문나서 알 사람은 다 안단 말이야.”
“어머니 말씀대로 그저 소문일 뿐이니까요. 없던 일이 되면 그 누구도 언급 못 하겠죠. 뒷말은 좀 나오겠지만 얼마 못 가 잠잠해질 테고요.”
본질을 꿰뚫는 아들의 반박에 금 여사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깰 땐 깨더라도 이유나 알자.”
금 여사와 달리 일현은 침착했다. 이런 침착함은 두 부자가 판박이였다.
“약혼하고 싶지 않아졌다는 게 이유의 전부입니다.”
아직 마음을 드러낼 순 없다. 나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랬다. 더욱이 나린이 그와 같은 마음인 것도 아니니까.
“……혹시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게냐.”
설마 하는 마음에 일현이 묻자 금 여사가 대신 손사래를 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여보.”
이 분야에 대한 믿음만큼은 그 무엇보다 강력했기에.
“…….”
윤완이 침묵하자 도 부회장의 안색이 굳어지고, 금 여사는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 너…… 설마 아니지?”
비서랑 결혼하겠다고 나서 한동안 그네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화 화학 이태준 전무와 같은 일이 윤완에게 일어나선 안 된다. 완벽한 아들의 인생에 구정물이 튀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는 화연이었다.
“지켜보고 싶은 사람이…… 생기긴 했습니다.”
“하…….”
억장이 무너진 화연이 의자 등받이를 짚으며 어질어질한 머리를 수습하려 애쓰는데,
“어떤 여자냐?”
일현이 캐물었다.
“아직 말씀드릴 단계가 아닙니다.”
“형편없는 여자라면 애초에 시작도 마라.”
“좋은 여자입니다.”
“사람 자체뿐 아니라 집안이나 배경도?”
“네.”
거짓말이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테라 그룹 손녀이니 집안, 배경이 나쁠 건 없었다. 윤완은 얘기의 초점이 나린에게로 옮겨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비난의 화살이 엉뚱하게 돌려지지 않도록 혼담을 깨는 것과 제 감정 사이에는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저는 그 사람과 상관없이, 이 약혼은 진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윤완의 단호함에 일현은 별 대꾸 없이 눈을 감았다. 저 단전에서부터 치밀어 오른 묵은 숨이 코끝으로 뿜어져 나왔다. 못난 자식이었으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밀어붙이기라도 하련만.
“일단 알았다.”
“여보!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금 여사가 반기를 들었지만 일현은 즉각 상황을 종료시켰다.
“이만 나가 봐라.”
“감사합니다. 그럼 혜원이랑은 일주일 내로 따로 만나서 정리하겠습니다.”
“음.”
윤완은 미적지근한 일현의 마지막 반응을 모른 체하고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대로 서재를 물러 나왔다. ***
“대체 왜 그러셨어요, 어제?”
수정과가 담긴 유리 사발을 건네며 화연이 묻는다. 실은 혼담을 물려달라는 아들의 말도 안 되는 청을 용인했을 때 당장 따져 묻고 싶었지만 역효과가 날까 봐 하루의 시간을 둔 것이었다.
“약혼을 밀어붙였다가 사달이 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 그랬소. 저렇게 나오는데 순순히 약혼식장에 나타날 리도 없고……. 알잖소, 저 녀석 고집.”
맞는 지적이었다. 윤완의 고집은 남편 일현에 비해 횟수는 적어도 발현하면 꺾기가 배로 어려웠다. 부전자전이라더니, 이런 고집과 독선은 더욱 지독한 형태로 제 아빠를 닮았다.
“그래도 그렇죠. 이런 결례가 어딨어요?”
“윤완이 말대로 얘기만 오간 상태니 번거로워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지 않겠소? 약혼했다가 파혼하는 것보다는 여기서 정리하는 게 창조 일보 쪽과의 관계 유지 측면에서도 더 나을 거요.”
아들의 투정에 쉽게 져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름의 고민이 숨어 있었나 보다. 남편의 일리 있는 설명에 금 여사도 살짝 누그러졌다.
“약혼, 빨리 진행할 걸 그랬나 봐요. 괜히 이것저것 따지다가 혜원이만 놓치고. 이번에 혼담 깨지면 혜원이랑은 아예 끝인 거잖아요.”
꽃 같은 혜원이 눈에 밟혀서, 화연은 못내 아쉬웠다.
“정 안 되면 다른 상대도 있으니 좀 두고 봅시다. 요새 애들은 우리 같지 않아서 어설프게 맺어주면 이혼해 버리고 마니까.”
“…….”
“우리 눈에 완벽한 상대도 중요하지만, 같이 살 사람은 그 애이니 어느 정도 의견은 존중해 줘야지요.”
아들을 향한 이 지지 발언에는 아들이 그간 보여준 출중한 능력도 한몫했다. 앞가림을 잘하는 녀석이라 꼭 혜원이 아니더라도 말도 안 되는 상대만 아니면 그룹을 건사해 나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알겠어요.”
화연은 남편의 일장 연설에 수긍하고 한발 물러났다. 그럼에도 얼굴 예쁘고, 집안 좋고, 예술적 재능까지 겸비한 혜원이 욕심나는 마음은 쉽게 거두어지지 않았다. 윤완이 마음에 들었다는 여자가 진짜로 형편없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부부는 같은 바람을 가슴에 품었다. ***
“혜원이한텐 언제 말할 건데?”
준우가 물었다.
“곧.”
“신혜원 반응 안 봐도 뻔해. 쉽지 않을 거다.”
세훈이 가세하여 걱정스레 한마디 더한다.
“알고 있어.”
판을 뒤집어엎을 결심을 했을 때 윤완도 그 정도 예상은 했다. 충분히. 약혼을 깨겠단 선언을 아버지 도 부회장 앞에서 한 것 또한 사전에 계산된 행동이었다. 어머니는 설득이 어렵겠지만 아버지라면 그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하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간 그가 회사에 기여한 바를 지켜봐 온 아버지라면.
“나도 할 말 있는데.”
쭉 침묵을 지키던 태준이 돌연 대화에 참전하고,
“뭐?”
세훈과 준우의 관심은 순식간에 태준에게로 옮겨 붙었다. 태준이 무슨 얘길 할지 아는 윤완만이 미리 못마땅하단 표정이 되었다.
“나, 나린 씨한테 약혼, 그냥 하자고 했어.”
“뭐어?!”
태준의 얘기도 윤완 못지않게 충격이라서 세훈과 준우는 또 한 번 소리를 내질렀다.
“근데 거절당했어.”
심지어는 그 결과마저 드라마틱했다. 세훈과 준우는 연달아 귓전을 때리는 충격 발언에 입을 다물 새가 없었다.
“그래서?”
윤완에게 그랬던 것처럼 준우가 다음 얘기를 재촉한다. 태준은 기운 없이 시선을 내려뜨렸다.
“앞으로 차근차근 설득해봐야지.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만나자고 연락했는데, 너희 어머니랑 외출한다고, 시간이 안 된다고 하더라.”
태준의 말끝이 저에게로 돌려지자 세훈은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응. 나린이 데리고 쇼핑 가실 거라고 하셨어.”
준우는 대화가 딴 데로 새지 않도록 재빨리 방향키를 잡았다.
“설득은 될 거 같아?”
“모르겠어. 근데 내가 좀 충동적으로 말한 것도 있어서, 계속 만나다 보면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대화가 탁구공처럼 통통 튀어 다니는 가운데 윤완만이 쭉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익숙한 일이라는 듯 룸 안의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윤완에게 생각을 묻거나 의견을 말해보라고 권하는 일 또한 없었다. 으레 윤완은 무관심하려니 했다. 그들이 아는 도윤완은 천성이 그래 왔던 사람이니.
“근데, 너 얼마 전까지도 쭉 한지아더니 왜 마음이 바뀌었냐?”
태준의 친구에서 나린의 사촌 오빠로 단숨에 태세 전환을 한 세훈이 볼멘소리를 냈다.
“어차피 지아랑은 끝이고, 결혼은 무조건 해야 할 거고…….”
“…….”
“우리 주변에 나린 씨처럼 편안한 여잔 흔치 않잖아. 그래서 붙잡아 보려고. 물론 약혼하면 잘해줄 거야. 자신도 있어.”
확신에 찬 발언에 준우와 세훈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집안끼리 얘기 다 된 사이니까 나쁠 건 없지. 잘 설득해봐야겠네.”
“잘되지 않을까. 나린이 입장에서도 태준이만 한 상대가 없을 테니까.”
상대가 태준이라면 나린에게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세훈은 긍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 세계에서의 결혼엔 감정 따위 고려 요소가 못 된다. 어차피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질 수 없다면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세훈은 두 사람을 응원해주기로 했다. 그의 기준엔 좋은 사람에 해당하는 두 사람을. 그러나 이 자리엔 그들과 전혀 상반된 견해를 가진 남자가 있었다.
“나도 할 말 있는데.”
“또?”
도윤완한테 이야깃거리가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무슨 날인가.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는 세훈이다. 윤완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훈과 준우를 차례로 관통한 시선의 최종 종착지는 태준이었다.
“이태준.”
“응?”
태준은 막 목을 축이려던 찰나였다. 컵을 빠르게 입에서 떼어놓느라 얼굴 위로 물이 조금 튀었다.
“고작 그런 마음인 거면 연나린 포기해. 상대할 가치도 없으니까.”
높이 튀어 올라 뺨에 닿은 물방울보다 한참은 더 서늘한 온도로 흐르는 음성. 세 사람은 뭘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했다. 누굴, 뭘, 어쩌라고? 포기하라고? 연나린을……? 이건 또 무슨 전개인가. 분명 도윤완의 목소리, 도윤완의 말투가 맞는데. 준우와 세훈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태준의 얼굴엔 당혹감마저 스쳐 지났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스위트룸 안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윤완 한 사람뿐이었다.
“나, 그 애 좋아해.”
윤완은 금방이라도 뻥 터져 버릴 것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졌다. 겨우 다물어지나 싶었던 준우와 세훈의 아래턱이 땅바닥을 내리찍을 듯 다시금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