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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지켜줄게 (27/101)

#27. 지켜줄게2021.08.31.

나린이 나오는 타이밍에 딱 맞춰 윤완의 차도 도착했다. 앞 유리에 나린이 담기는 순간, 윤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져 올라갔다. 하양 패딩 속에 폭 파묻혀서 꼭 눈사람 같다.

16558029412506.jpg“어쩐 일이세요? 피곤할 텐데.”

나린은 조수석 문을 닫으며 그새 찬 공기에 까슬해진 두 손을 부벼대었다. 자연스레 따라간 윤완의 시선이 나린의 손을 거쳐 팔찌에 닿았다. 사주길 잘했네. 요 몇 년간 가장 뿌듯한 지출이 아닐 수 없었다.

16558029412512.jpg“뭐 좀 먹자. 배고파.”

차를 출발시키며 윤완이 심상히 내뱉었다.

16558029412506.jpg“이 시간까지 밥도 못 먹었어요?”

16558029412512.jpg“어쩌다 보니까.”

집에 가자마자 바로 나오느라. 너 만나려고.

16558029412506.jpg“전 먹었는데.”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이게 아니지. 다시 만났을 땐 조금 덜 툴툴거리기로 해놓고.

16558029412506.jpg“먹긴 했는데, 좀 배고프긴 하네요.”

나린의 속도 모르고 윤완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했다. 태준의 집에서의 저녁 식사가 까다로웠을 것이란 것쯤 물어보지 않아도 빤한 일이었다. 바싹 말리지 못해 촉촉한 나린의 머리카락에서 샴푸 향이 나풀나풀 날아오른다. 윤완의 차 안이 온통 나린이 발산한 향기로 은은했다.

16558029412512.jpg“일주일 동안 잘 지냈어?”

직접적으로 태준과의 일을 꺼내고 싶지 않은 윤완은 빙 두른 질문을 했다.

16558029412506.jpg“네. 좀 힘들긴 했는데.”

16558029412512.jpg“왜?”

16558029412506.jpg“태준 씨 어머니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셔서 이것저것 배운다고요. 에티켓 같은 거.”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까딱할 수 없었던 수업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소름이 돋아나서 어깨를 떨자, 샴푸 향이 또 한 번 나풀나풀 윤완의 코를 자극하였다.

16558029412512.jpg“왜 그래?”

격한 움직임에 윤완이 흘끗 돌아다보았다. 운전기사 없이 둘만 있는 건 좋은데, 직접 운전을 해야 해서 마음 놓고 쳐다볼 수 없는 건 생각보다 더 불편한 일이었다.

16558029412506.jpg“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요. 엄청 고생했거든요. 제가 그렇게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었는지 처음 알았어요.”

16558029412512.jpg“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

삐딱하게 말하면서도 윤완의 입가엔 여전히 초승달이 뉘여 있다. 일침을 맞은 나린은 아랫입술을 쭉 내밀어 윗입술을 감쌌다. 이러니 내가 툴툴대지 않을 수 없지.

16558029412506.jpg“근데 뭐 먹으러 가는 거예요?”

16558029412512.jpg“내가 좋아하는 거.”

당연히 그렇겠죠. 그럼 제가 좋아하는 거겠어요?

16558029412506.jpg“지난번 그 양의 탈을 쓴 늑대 식당이요?”

허름한 외관과 달리 무시무시한 가격표를 붙이고 있던 식당을 떠올려본다.

16558029412512.jpg“아니. 다른 데.”

뭔지는 몰라도 너무 배부른 것만은 아니면 좋겠는데. 불편해서 저녁 식사를 제대로 못 했을 거라는 윤완의 예측과 달리 나린은 주어진 양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잘 먹는 척했던 것과는 반대로 하나도 소화가 되질 않아서 먹었던 음식들이 아직까지 식도를 꽉 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윤완이 운전에 집중한 틈을 타 나린은 쇄골과 가슴 사이를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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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린이 떠나고 태준은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폰 화면엔 아직도 지아가 보낸 메시지가 띄워져 있다.

16558029429103.jpg[오빠. 또 전화 안 받네. 시간 될 때 연락 좀 줘. 부탁해.]

  어제 지아의 메시지를 받은 태준은 답장도 하지 않고 폰을 서랍 속에 봉인해버렸다. 늘 휘둘려왔던 태준으로선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지아와 헤어지기로 한 후, 그가 먼저 지아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아 쪽에서 찾을 때면 달랐다. 그때마다 태준은 불가항력적으로 그 부름에 응하곤 했다. 그만큼 지아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달라야 한다. 나린과의 약혼을 결심한 이상, 그녀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만 했다. 좋은 여자니까. 좋은 여자인 만큼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 하니까. 태준은 지아의 메시지가 띄워진 폰을 꽉 쥐고 괴로운 듯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16558029429107.jpg‘미안해, 지아야.’

그렇지만 이제 난……. 앞으로 나아가 보려 해. 너에게서 멀어지는 쪽으로.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나린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그리고 약혼하자는 제안이 얼마나 진심인지 소상히, 진실 되게 알려주어야겠다. 지아를 조금 덜어낸 자리. 태준은 각오를 새롭게 채워 넣었다. *** 윤완이 나린을 데려간 곳은 테라 호텔과 함께 5성급 호텔 가운데서도 탑 티어에 속하는 Y 호텔 스카이라운지였다.

16558029412506.jpg‘이런 데를 이런 차림으로 와도 되나?’

너무 캐주얼한 복장을 돌아보며 나린이 난감해하는 사이,

16558029429103.jpg“오셨습니까.”

스카이라운지를 책임지는 매니저가 윤완을 보자마자 직각으로 허리를 꺾었다. 매니저는 두 사람을 VIP룸으로 안내했다. 벽부터 천장까지 온통 화이트 톤에 시야가 훤한 통창까지 더해져서, 꼭 뭉게구름에 올라선 듯한 감각을 선사하는 공간이었다.

16558029412506.jpg“와.”

창을 수놓은 야경을 본 나린은 탄성부터 질렀다.

16558029412512.jpg“지난번 인피니티 풀 때도 그렇고, 높은 델 좋아하네.”

싱가포르에서처럼 이번에도 윤완의 반응은 목석 그 자체다.

16558029412506.jpg“부사장님은 이런 걸 보고도 아무 느낌이 안 드세요?”

통유리를 스크린 삼아 서울의 불빛이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별천지. 이런 장관에 어떻게 저토록 무덤덤할 수 있는지, 나린은 여러모로 그가 존경스러웠다.

16558029412512.jpg“글쎄. 자주 보다 보면 너도 익숙해질걸.”

아. 그렇지. 아무렴요.

16558029412512.jpg“뭐 먹을 거야?”

16558029412506.jpg“음…….”

나린이 좀처럼 결정하지 못하자 윤완이 메뉴판을 회수한다.

16558029412506.jpg“어, 왜요?”

16558029412512.jpg“알아서 시키라고 할 거잖아.”

16558029412506.jpg“아니에요. 이번엔 고를 거란 말이에요.”

고집을 쓰는 모습조차 귀여운 그녀. 도대체 나한테 무슨 요술을 부렸길래. 윤완은 메뉴판을 도로 나린의 앞에 놔주었다.

16558029412506.jpg“간단히 먹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

16558029412512.jpg“물론.”

16558029412506.jpg“그럼 이 샐러드요.”

고개를 끄덕인 윤완은 매니저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16558029412512.jpg“음료는?”

16558029412506.jpg“아무거나. 아. 알코올 없는 걸로요.”

몸을 사리려거든 나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나 조심하지? 기가 막혔지만 굳이 말로 보태지는 않았다. 음료 주문까지 마친 윤완의 시선이 나린에게 고정된다. 아직 야경 감상이 덜 끝났는지 나린은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동글동글, 두 뺨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채.

16558029412512.jpg“예의범절 교육 받았다며. 앞에 있는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면 실례라는 건 안 배웠어?”

윤완의 말에 나린의 고개가 다급히 제자리를 찾았다.

16558029412506.jpg“죄송해요. 근데 속성으로 배워서……. 저녁식사 때 써먹고 다 까먹었어요.”

그러고 보니 연나린. 내가 하는 말에 따박따박 잘도 받아치고 있다. 이젠 별로 어렵지도 않나 봐. 윤완의 입술 새로 파사삭 웃음이 부서졌다.

16558029412506.jpg“비행기 오래 타서 피곤하지 않으세요? 이 시간까지 저녁도 못 먹고.”

16558029412512.jpg“아니.”

널 보니까 하나도 안 피곤한데. 윤완의 눈은 나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너무 오래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해진 나린은 살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그러면서 왜 이 피곤하고 힘든 귀국 당일, 굳이 자신을 보러 온 건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건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었다. 여느 때처럼 추측만 할 뿐.

16558029412506.jpg‘여기 음식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시간 되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나?’

물론 그 추측은 으레 그렇듯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

16558029412512.jpg“태준이네 가서 별일 없었어?”

한창 식사가 이어지던 중에, 윤완이 태준에 관해 직접적인 질문을 하지 않겠단 결심을 깼다. 그 사이 두 사람 관계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건 아닌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린은 샐러드를 뒤적이던 포크를 멈추었다.

16558029412512.jpg‘무슨 일 있었구나.’

나린의 답이 늦어지자 윤완의 눈매와 입술이 일자로 길어졌다. 나린은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해도 괜찮을지 고심하고 있었다.

16558029412506.jpg“태준 씨가 저랑…… 진짜로 약혼을 진행하고 싶대요.”

숨겨봤자 나중에 태준을 통해 듣게 될 거란 결론에 닿은 나린은 윤완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16558029412512.jpg“뭐?!”

윤완은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기세로 몸을 들썩였다. 이토록 격하게 반응하는 그는 처음 본다.

16558029412506.jpg“한지아 씨한테 가지 않게 잡아 달래요. 진짜로 약혼할 마음이 생겼다고.”

대답이 충분치 못했나 싶은 나린은 친절히 주석을 달아 주었다.

16558029412512.jpg“…….”

절친이고 뭐고.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쥔 윤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 있었으면 당장 한 대 내리쳤을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이상했어.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부터가 이상했다고.

16558029412512.jpg“그래서, 할 거야?”

하지 마.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지 마.

16558029412506.jpg“약혼요?”

16558029412512.jpg“응.”

나린의 얼굴 위로 쓸쓸히 그림자가 졌다.

16558029412506.jpg“그럴 리가요. 거절했어요, 바로.”

윤완은 한시름 놓으면서도 언제든 나린과의 약혼을 주장할 수 있는 태준이 부러워졌다. 조금은 얄미운 마음도 함께.

16558029412512.jpg“잘했어.”

윤완의 지지는 의외로 큰 힘이 되었다.

16558029412506.jpg“왜 거절했는지는 안 궁금하세요?”

16558029412512.jpg“……왜 궁금해야 하는데?”

윤완은 습관처럼 무관심을 표했다가 아차 싶었다. 좋아하는 여자의 사정이니 알아둘 필요가 있는 건데.

16558029412512.jpg“왜 거절했어?”

그래서 황급히 질문을 정정했다.

16558029412506.jpg“왜 다시 물어보세요?”

16558029412512.jpg“물어보라며. 얘기해 봐. 들어줄게.”

나린은 싱겁다는 듯 자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사분사분 말을 이었다.

16558029412506.jpg“그런 식의 결혼에는 자신이 없어서요. 전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니까요.”

16558029412512.jpg“…….”

16558029412506.jpg“어른들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약혼 얘기는 없던 일로 돌릴까 해요. 조금 힘들겠지만……. 아니, 많이 어렵겠지만 정면 돌파해 보려고요.”

윤완의 눈에는 창 너머 하얗게 불을 밝힌 야경보다 앞에 앉은 나린이 더 반짝반짝 눈부셨다. 철옹성 같던 그의 마음을 단시간에 점령해 버린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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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쁘다.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네 그 고운 눈으로, 그 앙증맞은 입술로 오로지 나만 보고 나에게만 재잘거려주었으면 좋겠다.

16558029412512.jpg“잘 생각했어.”

16558029412506.jpg“…….”

그래. 넌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옆에서 조연으로 남기엔 너무너무 아까운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런 약혼은 절대로 하면 안 돼.

16558029412512.jpg“그 마음 변치 말고, 꼭 널 제일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

윤완이 충고한다. 이제까지 했던 여타 충고와 달리 애정이 듬뿍 묻어난 말투였다.

16558029412506.jpg“부사장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진짜 잘한 것 같은데요.”

나린은 뿌듯해하며 앞에 놓인 무알코올 칵테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다가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재차 화두를 던졌다.

16558029412506.jpg“그런데요, 부사장님. 혹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돼도…….”

16558029412512.jpg“…….”

16558029412506.jpg“이뤄질 수 있는 걸까요?”

갑작스런 수수께끼에 윤완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16558029412512.jpg“무슨 말이야?”

16558029412506.jpg“여긴 온통 정혼, 약혼, 집안 간의 결합, 그런 것투성이잖아요.”

16558029412512.jpg“…….”

16558029412506.jpg“잘 모르겠어요. 제 거절이 의미가 있긴 한 건지. 제가 누굴 선택한들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있긴 한 건지.”

분명 무알코올 칵테일인데 왜 이렇게 감상적이 되어 버렸는지……. 하지만 두려웠다. 태준에게 약혼을 진행하지 말자고 한 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합심해도 될까 말까 한 이 약혼을 혼자서 막으려 애쓰는 게 소용이 있기는 한 건지. 달걀로 바위를 치고 있는 건 아닐까. 바위가 더러워진다고는 하지만 깨지는 건 아니잖아.

16558029412512.jpg“의미 있을 거야.”

윤완이 단언하였다. 아무런 근거를 달지 않은 허술한 주장이었는데도 나린이 느끼는 불안은 형체를 잃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확신을 주는 사람. 부사장님이 하는 말은 다 맞는 것 같고…… 전부 부사장님 생각대로 흘러갈 것 같고……. 성공한 사람은 이래서 멋있는 거구나.

16558029412512.jpg“걱정 마.”

윤완은 한 번 더 나린을 안심시켰다. 지켜줄게. 내가 지켜줄 거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 줘. 눈동자에 오롯이 나린만이 담긴 이 순간. 어떤 비장한 각오 같은 게 윤완의 가슴을 두들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아이의 안위와 평화를 지켜 주리라. 윤완의 마음 안에 견고한 성벽이 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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