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판을 뒤집어엎을 차례2021.08.27.
예의범절쯤 학창시절에 이미 통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보다. 나린은 채 여사의 지시로 강행된 예절 수업에 예상보다 더 애를 먹고 있었다. 사소한 말씨부터 걸음걸이, 나아가서는 식사예절까지 모르는 것이 수두룩했다. 양식 코스를 먹을 때면 눈치껏 앞 사람을 따라 사용했던 식기의 정확한 용도를 배웠다. 와인도 종류마다 어울리는 잔이 따로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식사 단계마다 달라야 하는 식기 배치 모양에 대해서도 숙지하고, 어른을 뵀을 때 인사하는 자세도, 삼가야 할 말씨도, 사소한 부분 하나 틀릴 때마다 훈련을 반복했다. 에티켓 교육 3일 차 목요일. 몰아치는 강행군에 녹초가 된 나린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진다. 씻으러 갈 기운도 없어서 두 눈만 끔벅끔벅거리고 있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야근을 하는 게 낫겠는데?’
내쉰 한숨이 너른 방 안을 마구 떠돌아다녔다. 요 일주일간 예절 교육을 받으면서, 이 세계가 요구하는 역할이 얼마나 맞지 않는 옷인지 새삼 확인받았다. 지금은 할아버지의 비호 아래 관대한 예외를 적용받는다지만, 결혼하여 다른 집안의 일원이 되는 순간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태준과의 연극이 끝나면 그땐 무슨 수로 이 위기를 모면하나, 근심이 휘몰아치는 밤이었다. *** 은수라 여사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은 토요일. 최후의 순간까지도 교육을 받아야 했던 나린은 출발 시각이 다 돼서야 겨우 해방됐다. 차가 막힐 걸 대비해 여유를 두고 출발했다. 처음 와보는 태준의 집 앞에서 기사 아저씨가 차 문을 열어준다. 별 저항 없이 그 친절을 받아들인 건 전부 스파르타식 교육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태준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나린은 태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채 여사가 챙겨준 선물을 바리바리 싸든 기사가 뒤를 따른다.
“힘들었다면서요, 나린 씨.”
뜰을 지날 때 세훈의 귀띔을 떠올린 태준이 안쓰러운 빛을 띠었다.
“네. 조금요.”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저녁 식사는 천천히 하자고 말씀드렸을 텐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뭐, 뭐 배웠어요?”
“음. 이것저것요. 아마 도자기 그릇 머리에 올리고 걷는 거 빼곤 다 했을걸요.”
나린의 말이 재밌는지 태준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린은 언제 만나도 지루하지 않은 상대였다. 이런 여자라면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로, 친구 같은 부부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그건 결코 나쁘지 않을 미래였고, 그 점이 언제부터인가 태준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런 여자라면 평생 함께할 짝으로 괜찮지 않을까. 지아가 안 된다면……. 어차피 사랑 없는 결혼을 해야 한다면. 태준을 따라 안으로 들어온 나린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 여사에게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했다. 채 여사의 선물을 전달하고,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은 후 다이닝룸으로 이동한다. 식탁은 한눈에도 손님맞이 채비를 완벽히 끝낸 상태였다. 나린은 배운 대로 실수 없이 행동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했는지 먹은 음식들이 가슴에 얹혀서 내려가질 않았다. 은 여사는 무심한 척, 나린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나린은 퍽 마음에 드는 며느릿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혼외자라는 점이 가장 께름칙했고, 이 세계에서 자라지 않았단 점 또한 마음에 걸렸다. 연태용 회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선 자리에 태준을 내보내는 일은 결단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나린의 처신이 흠잡을 데 없었다는 것만큼은 인정을 해야겠다. 은 여사의 탄복은 숨은 공로자, 채 여사를 향했다.
‘과연 채윤희로군. 짧은 시간에도 기본은 갖춰서 보냈네.’
그러나 나린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린은 눈엣가시 같던 지아를 물리쳐준 은인이니까. 찰거머리 한지아를 태준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합격점을 주고도 남을 일이었다.
‘테라 호텔 혼외자가 백 번 낫지. 그 황당무계한 애보다는.’
씁쓸한 미소가 은 여사의 입매를 비튼다. 식사가 끝나고도 한참을 질문 공세에 시달리던 나린은 찻잔을 다 비운 후에야 은 여사의 손아귀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럼 가서 네 방 구경도 시켜주고 하렴.”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태준은 나린을 데리고 2층 계단으로 향했다. *** 태준이 방문을 닫음과 동시에 나린은 기다란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하.”
그 모습이 아이같이 귀여워서 태준이 소리 내어 웃었다.
“웃지 마세요. 진짜로 체할 뻔했단 말이에요.”
“알겠어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태준은 나린을 소파로 안내하며 위로했다. 곧, 저녁식사 동안 식탁 곁을 지켰던 가정부가 찾아와 색색의 과일 접시들을 가지런히 배열해주고 떠났다.
‘배불러서 더 먹지도 못할 것 같은데.’
나린은 더부룩한 속을 진정시키려 두 손을 포개 아랫배를 감쌌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으니까.
“안 먹어요?”
막 파인애플 한 조각을 입안으로 옮기던 태준이 묻는다.
“아, 배가 불러서요.”
“저녁이 입에 맞았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꾸역꾸역 먹긴 했으나 맛이 훌륭했다는 것만큼은 인정하는 바였다. 엄연한 집밥임에도 품질은 5성급 호텔에 버금갔다. 소화가 잘 되는지 여부를 별개로 친다면. 피로를 느낀 나린은 그만 일어나고 싶었지만 태준에게 실례가 될까봐 좀 더 있기로 했다. 딱 그가 포크를 내려놓을 때까지만.
“나린 씨.”
딸그락, 접시 끝에 포크를 걸쳐놓은 태준이 나린을 부르고, 나린은 그 찰나에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네?”
“말할 게 있는데요.”
심상찮은 눈빛이 그가 쥐고 있던 포크 끝처럼 날카롭게 겨누어졌다.
“뭔데요?”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던데.
“저는 이 약혼 진행했으면 하는데요.”
좀 움찔하긴 했어도 그가 던진 말의 크기만큼은 아니었다. 요새 들어 언뜻언뜻 위화감을 주었던 발언들이 완충재 역할을 해준 덕분이었다.
‘안 갈 거니까……. 나린 씨가 나 좀 잡아줄래요?’
‘나린 씨가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내가 한 말 생각해 봤어요?’
‘……나 좀 잡아달라고 했던 거요.’
설마설마했던 그의 발언들. ……아니길 바랐는데. 그저 조금이라도 더 이 평화가 유지되기를 바랐으니까. 같은 곳을 보며 서있던 동료 배우가 순식간에 방향을 틀었다. 사전에 합을 맞춰본 적 없는 최악의 방향으로. 할 수만 있다면 커다랗게 NG를 외쳐 없는 컷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혹시 나린 씨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봐줄 수 없을까요?”
나린이 입술에 힘을 주자 아래턱이 딱딱해진다.
“태준 씨, 아직 한지아 씨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나린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태준은 여유롭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했잖아요. 헤어졌다고.”
“그렇지만 세훈 오빠 파티 때…….”
“아뇨. 이젠 아니에요.”
말허리가 댕강 잘려져 나간다. 결연한 표정이 된 태준은 폰을 꺼내 터치스크린을 몇 번 조작하더니 나린에게로 내밀었다.
“봐요. 어제 지아가 보낸 메시지예요.”
“…….”
“난 답장도 안 하고 전화도 안 하고 달려가지도 않았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도 돼요.”
나린은 타인의 휴대폰엔 취미가 없다는 걸 분명히 하려 더욱 꼿꼿이 목을 세웠다.
“상관없어요.”
“방금 지아에 대해 물었잖아요.”
“…….”
“지아가 걸린다면 걱정 안 해도 돼요. 깨끗하게 정리할 거니까. 아니, 이미 정리했으니까.”
거짓말. 두 사람 사이가 허락되어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문제로 입씨름을 지속하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자칫 질투하는 걸로 비쳐질 수도 있으니.
“저는 정말 선보는 게 싫어서 태준 씨의 제의를 받아들인 거였어요.”
나린은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태준 씨 생각이 바뀌었다면, 더는 이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게 돼요.”
태준은 거절당할 걸 미리 대비한 듯 똑같이 차분한 톤으로 설득에 나섰다.
“시작은 그랬어도 지금부터라도 생각해볼 수는 있잖아요. 나처럼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요.”
“……아뇨.”
이젠 이 평화와도 안녕이구나.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어물쩍 넘겼다가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지 몰랐다. 어른들이 이 연극을 진짜로 인식하고 있는 한 양날의 검이었으니까. 제 쪽의 날이 밀리기 전에 서둘러 칼을 손에서 놔야만 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이런 식의 정략결혼은 타협 불가였다. 나린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만 집에 가봐야겠는데, 도와줄래요?”
잡음 없이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은수라 여사를 통과해야 한다. 태준의 협조가 필수라는 뜻이었다. 나린은 무언의 압박을 넣듯 태준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봤다. 확신에 찬 맑은 눈빛을 보며, 태준은 이 여자가 이렇게 예뻤나,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 인천공항에 도착한 윤완은 폰을 켜자마자 시간부터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나린은 태준의 집에 가 있을 것이다. 고작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은 것뿐인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계속해서 폰을 들었다 놨다 했다.
‘아직 태준이 집에 있을까.’
만나고 싶은데. 지금 당장. 싱가포르에서 보낸 꿈같은 시간 후에 이제 그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린이 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걸. 그러니 옆에 꼭 붙잡아 두어야만 한다는 걸. 그의 마음이…… 나린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윤완은 골치가 아픈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새 목표는 수립되었다. 그렇다면 이젠 기존의 목표를 향해 설정돼 있는 판을 뒤집어엎을 차례다.
‘그 전에 먼저 얼굴 좀 보자, 연나린.’
이러다가 집착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불현듯 무서워졌다. 너무 보고 싶어서 마음이 아릴 지경이었다. *** 채 여사는 집으로 돌아온 나린에게 별일 없었는지부터 물었다. 나린은 아무 일 없었다고 채 여사를 안심시키고 방으로 올라왔다. 기진맥진해서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기분이었다. 폰이 진동하는데도 확인하는 것조차 귀찮은 나태함이 온 신경을 지배한다. 나린은 굼뜨게 팔을 뻗어 느릿느릿 폰을 집었다.
[어디야? 좀 보자.]
윤완의 이름이 메시지 하단에 반듯하게 쓰여 있었다.
[집이에요. 한국이세요?]
[응. 데리러 갈게. 40분쯤 걸릴 거야.]
잠깐. 나는 아직 나간다고 말도 안 했는데. 피곤해서 쉬고 싶단 말이에요.
[네.]
속마음과 다른 답을 한 건 멀라이언 파크에서 윤완이 했던 말이 깊은 인상을 남긴 탓이었다.
‘서울 가면 자주 좀 보자. 부르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바로바로 나와, 좀.’
마음을 다잡고 영차, 몸을 일으킨 나린은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부터 감았다. 대강 머리를 말리고 나니 25분이 훌쩍 지났다. 메이크업까지 수정할 시간은 없어서 쿠션 팩트를 찍어 바르는 둥 마는 둥 하고 립글로스만 칠하였다.
‘못 봐줄 정도만 아니면 되겠지. 밤이니까 캄캄할 거고.’
수수한 얼굴에 어울리도록 복장은 ‘강나린’ 시절에 즐겨 입던 편한 캐주얼로 정한다. 후디에 청바지를 착용한 나린은 마지막으로 흰색 벤치 패딩으로 완전 무장을 했다. 방을 나와 종종종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바깥으로 향하는 문이 가까워 올수록 콩닥콩닥 가슴도 뛰었다. 뭐야. 정신 차려. 네가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은 도윤완 부사장님이야. 외숙모나 수정이가 아니라고.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심장에 다그쳤다. 손목 위엔 마지막 순간 집어 든 팔찌가 곱게 채워져 있다. 패딩 소매에 밀려 손등까지 침범한 채. 나린의 손등은 난초 장식의 붉은 빛깔과 대비되어 더더욱 새하얗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