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깨닫지 못하는 사이 (25/101)

#25. 깨닫지 못하는 사이2021.08.24.

16558029094644.jpg“다녀왔습니다.”

캐리어를 든 나린이 거실로 들어서며 밝게 외쳤다. 기사 아저씨가 들어다 주겠다고 했지만 끝끝내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1655802909465.jpg“어서 오세요.”

미옥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캐리어를 받아주었다.

16558029094656.png“왔니?”

소파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채 여사가 단조롭게 대꾸한다.

16558029094644.jpg“네.”

16558029094656.png“피곤할 텐데 올라가 쉬어라.”

채 여사는 늘 그렇듯 고아한 자태를 뽐내었다.

16558029094644.jpg‘난 절대 저렇게 못 살 거야.’

나린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2층 계단을 올랐다. 캐리어는 당연히 되찾아온 채였다. 방에 도착해 샤워를 마친 뒤에는 곧장 짐 정리에 착수했다. 젖은 머리를 타월로 꽁꽁 싸맨 채, 싱가포르에서 가져온 기념품들을 차곡차곡 꺼낸다. 그러다가 캐리어 커버 안쪽에 들어 있는 흰색 상자에 시선이 닿았다. 별 뜻 없이 상자를 꺼내 열자 참을 예쁘게 끼운 팔찌가 나린을 향해 반짝였다. 윤완이 선물한, 세상에 하나뿐인 팔찌. 오직 나린만을 위한 선택들로 장식된. 그냥 받아도 되는 거, 정말 맞을까. 고민을 하다가 팔찌를 꺼내 손목에 둘렀다. 뭐 어때. 금도 아니고. 그 사람한텐 정말 별것 아닐지도 모르는데……. 이런 몇십만 원짜리 선물쯤, 커피 한 잔 대접하는 것 정도 될까 말까 할 테니.

16558029094644.jpg‘그래, 그러니 부담은 가질 필요 없어.’

팔찌를 탐내는 마음을 구구절절 합리화하면서, 나린은 스스로를 어처구니없어했다. *** 윤완의 예측대로 나린이 사온 기념품들은 별로 환영 받지 못했다. 선물을 받아든 채 여사는 말로만 고맙다고 하고 나린이 보지 않는 곳에서 비서들에게 나눠줘 버렸다. 태용 역시 나린 앞에선 기뻐하는 척했지만 곧 채 여사를 불러 적당한 곳으로 치우게 했다. 가장 솔직한 반응을 보인 건 식구들 중 제일 마지막으로 선물을 받아든 세훈이었다.

16558029094689.jpg“어디서 이런 쓰레기를 가져왔어?”

16558029094644.jpg“쓰레기요?!”

쿠키 선물 때와는 180도 다른 반응에 기가 차서 나린이 반문한다. 어엿한 구매 상품을, 뭐? 쓰레기? 이 순간만큼은 그의 얼굴 위로 윤완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16558029094689.jpg“차는 그렇다 치고, 이런 초콜릿은 누가 먹는다고.”

16558029094644.jpg“그냥 초콜릿이 아니라 싱가포르의 상징 멀라이언이에요.”

소심하게 발끈했지만 세훈은 단호히 초콜릿 상자를 튕겨냈다.

16558029094689.jpg“난 됐어. 다른 사람 줘.”

큰일이었다. 세훈이 이런 반응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방금 전 고맙다고 말했던 큰엄마도, 기뻐했던 할아버지도 전부 인사치레였을지 모르겠다. 나린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16558029094644.jpg“태준 씨 것도 사왔는데.”

나린의 혼잣말에 세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세훈이 나린의 등을 떠민다.

16558029094689.jpg“가자.”

16558029094644.jpg“어딜요?”

16558029094689.jpg“애들 만나러. 태준이한테 초콜릿 줘야지.”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겨 신이 나는지 세훈의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 테라 호텔 강남 2501호. 나린이 차 세트를 건네자 태준이 미소로 받아들었다.

16558029114185.jpg“고마워요.”

16558029094689.jpg“그거 말고 또 있잖아, 선물.”

초콜릿은 주고 싶지 않은데 뒤에서 세훈이 재촉했다.

16558029114185.jpg“선물이 또 있어요?”

기대에 찬 태준의 물음에 쭈뼛쭈뼛 초콜릿을 내민 순간, 그의 얼굴이 대형 물음표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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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을 파악한 준우가 참지 못하고 풉, 웃음소릴 낸다.

16558029130585.jpg“내 건 없어요?”

준우의 말투가 놀리는 것임을 알아차린 나린은 슬쩍 눈을 흘겼다.

16558029094644.jpg“없어요…….”

세훈 또한 이 상황이 재밌는지 키득키득거렸다. 다들 비웃는다 이거지? 나린은 새치름해졌다. 하지만 따뜻한 표정이 된 태준은 두 손으로 소중히 초콜릿 상자를 맞잡았다.

16558029114185.jpg“고마워요, 나린 씨. 잘 먹을게요.”

16558029094644.jpg“아니에요. 억지로 먹을 것 없어요.”

나린이 도로 거둬들이려는데, 태준이 재빨리 낚아챘다. 초콜릿 상자는 쏙 태준의 등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16558029114185.jpg“꼭 먹을게요.”

세훈과 준우는 떠름한 표정을 했다.

16558029094689.jpg“웬 착한 척이냐, 너.”

세훈의 타박을 무시한 태준은 나린을 향해 해사하게 웃었다.

16558029114185.jpg“나린 씨,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잠깐 나가서 걷지 않을래요?”

  *** 밖으로 나온 태준과 나린은 호텔 뒤편으로 난 산책로를 걸었다. 왜 단둘이 나오자고 했을까. 형식적인 만남이니 굳이 나올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이젠 그와의 시간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나린은 엄지와 검지로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꼬집었다.

16558029114185.jpg“출장 가선 별 일 없었어요?”

태준의 질문을 인식한 순간 윤완과 보낸 시간들이 뇌리에 스케치 되었다.

16558029094644.jpg“없었어요.”

개운치 않은 답을 해주면서 오른손이 까닭 없이 왼팔목에 감긴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16558029114185.jpg“나는 좀 심심했어요. 몇 번이고 연락하고 싶었는데.”

태준의 너스레에 나린은 멀건 눈을 했다. 왜죠? 갑자기 왜…… 그런 말들을 하는 건가요. 가짜 연인 사이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말을.

16558029114185.jpg“나린 씨 바쁠까 봐 연락 못 했어요.”

16558029094644.jpg“……조금 바쁘긴 했어요.”

16558029114185.jpg“알아요. 출장이 보통 그렇죠. 시간은 한정돼 있고, 결과물은 만들어 내야하고.”

나직나직이 잇대던 말소리가 사라졌다.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가운데 태준이 불시에 걸음을 멈춘다. 나린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16558029114185.jpg“나린 씨.”

16558029094644.jpg“네.”

추운데 이제 그만 들어가지 않을래요? 어색한 공기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끊을 용기는 또 없어서 나린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16558029114185.jpg“내가 한 말 생각해 봤어요?”

16558029094644.jpg“무슨 말이요?”

모르겠단 반응에 태준이 조금 머뭇거렸다. 곧 어렵사리 입을 연다.

16558029114185.jpg“……나 좀 잡아달라고 했던 거요.”

출장 가기 전 나린이 그를 지아에게 보내려 했을 때 했던 말.

16558029114185.jpg‘안 갈 거니까, 나린 씨가 나 좀 잡아줄래요?’

  그게 무언가 답을 내놓아야 했던 물음이었나.

16558029094644.jpg“무슨 뜻이에요?”

나린을 휘감는 바람이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다. 나린은 잔뜩 어깨를 웅크렸다.

16558029114185.jpg“아니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16558029094644.jpg“…….”

태준과 나린의 시선이 찬 공기 속에 맞부딪히고,

16558029114185.jpg“어머니께서 이번 토요일에 나린 씨를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 하세요.”

태준은 맥락 없는 말을 뱉었다.

16558029094644.jpg“집으로요?”

이것도 연극의 일부인 걸까. 나린은 일전에 세훈의 생일 파티에서 만났던 태준의 어머니 은수라 여사를 떠올려 봤다. 은 여사는 채 여사보다는 좀 더 따뜻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점은 태준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정을 읽을 수 없게 초지일관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말투였다는 점에선 채 여사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 세계에 오래 머물다 보면 누구나 다 그런 포커페이스가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16558029114185.jpg“진짜 그냥 밥만 먹는 거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16558029094644.jpg“……큰엄마랑 상의해볼게요.”

이해할 수 없는 건, 대답하는 순간 왼쪽 팔목에 감긴 팔찌의 무게가 납덩이처럼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 나린이 초대받은 사실을 전하자 채 여사는 무거운 표정이 됐다. 기념품이랍시고 시답잖은 초콜릿이나 사 오는 애를 예비 사돈댁에 보내야 한다니. 잘못했다간 망신이나 당하고 혼담이 깨져 버릴지도 모르겠단 걱정이 앞선다.

16558029094644.jpg“안 가는 건 안 되는 거죠?”

16558029094656.png“안 되지. 어른이 정식으로 초대했는데.”

나린의 저항은 이번에도 반려 대상이었다. 채 여사는 오랜만에 떨어진 숙제에 골치가 아팠다.

16558029094656.png‘단기간이지만 뭐라도 가르쳐서 보내야 할 텐데.’

대체 회사는 왜 계속 다니는 거야. 얌전히 신부 수업이나 받을 것이지.

16558029094656.png“일주일간 휴가 좀 낼 수 없어?”

속에서 이는 짜증은 능숙히 숨긴 채로 채 여사가 물었다. 웬만해선 채 여사의 말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나린이지만 이건 절대 불가능이었다.

16558029094644.jpg“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채 여사가 하는 수 없이 타협책을 제시한다.

16558029094656.png“그럼 앞으로 일주일은 일찍 퇴근해. 예절 교육 좀 받게.”

예의범절이라면 어렸을 때 다 배웠는데. 그동안 뭐 무례한 행동을 한 게 있었나, 나린은 차근차근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

16558029094689.jpg[어머니가 일주일만 나린이 좀 일찍 퇴근하게 해달라고 너한테 말이라도 해보래.]

세훈은 내키지 않았지만 채 여사의 부탁대로 윤완에게 메시지를 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그것도 월급 받고 다니는 회사에 이래라저래라하다니. 한숨이 푹푹 나왔으나 채 여사의 요구를 묵살하고 잔소리를 듣느니, 윤완에게 대충 전달하고 치우는 쪽이 더 간편했다.

16558029178353.jpg[왜?]

16558029094689.jpg[태준이네 초대받았대. 뭐라도 가르쳐서 보내려고 그러시나 봐.]

저 멀리 방콕에서 세훈의 메시지를 받아든 윤완의 얼굴은 순식간에 불만으로 일그러졌다.

16558029178353.jpg‘태준이 집에 초대를 받았다고?’

다음 수순은 뻔했다. 어른들 간에 정식으로 약혼식 얘기가 오가는 것. 여기까지 진행되고 나면 물리기가 쉽지 않아진다. 뭐에 쫓긴 듯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16558029178353.jpg[내 권한 밖이야. 일을 잘하면 빨리 끝내고 빨리 퇴근하겠지.]

불만스러운 기분을 따라 대답도 잔뜩 비뚤어지고 말았다.

16558029094689.jpg[내 말이. 어쨌든 난 전달했다?]

세훈은 빠르게 답을 하고 아래층으로 직행해 채 여사에게 임무 완수 보고를 했다. 한편, 윤완은 세훈이 전한 소식을 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연나린이 태준이네 집에 초대를 받았어? 뭔가 맞지 않는다. 벌써부터 그런 얘기가 나온 것도 그렇고, 설령 그렇더라도 태준이 자르거나 미뤘어야 했는데. 정말로 나린과 약혼할 생각이 없다면. 윤완의 눈동자 가득 불안이 깃들었다.

16558029178353.jpg‘설마, 태준이 녀석.’

그러다가 기우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58029178353.jpg‘아니. 그럴 리가. 한지아한테 끌려다니는 녀석이 그럴 리 없지.’

휴대폰을 집어 든 윤완은 날짜를 셈해 보았다. 출장이 종료되기까지는 아직 일주일. 그 사이 연나린 신변에 무슨 변화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돌아가서, 이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는. 오랜만에 맛보는 초조함은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아서, 지금 당장이라도 출장을 중단하고 귀국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나린과 보냈던 시간들이 마치 꿈결같이 느껴졌다.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아름답고 상쾌한 꿈. 그녀가 있는 시간이 가르쳐 준 행복. 그녀의 웃음이 가져다준 설렘. 시간을 되감아서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다. 보고 싶어. 미치도록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눈을 감아 보지만 그리움은 한층 더 짙어질 뿐이었다. *** 나린은 사진을 백업하려 폰을 집어 들었다. 대부분 일요일에 관광을 하며 찍은 것들이었다. 혼자 돌아다닌 탓에 온통 풍경이나 랜드마크뿐이고 인물 사진은 셀카 서너 장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몇 장 안 되는, 토요일에 찍은 사진에 손이 멈추었다. 그날 인피니티 풀에서 분수쇼를 본 뒤 한 번 더 윤완과 멀라이언 파크를 찾았다. 까만 밤길을 걸으면서 싱가포르의 야경에 연신 감탄을 했더랬다. 그러나 같은 공간, 곁을 걷는 윤완은 별 감흥이 없는지 조용하기만 했다.

16558029178353.jpg‘사진 찍어줄까?’

  부탁하기 어려워서 말을 못 꺼내고 있었는데 의외로 윤완 쪽에서 선뜻 손을 내밀었다. 나린은 윤완이 찍어준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캄캄했는데도 휴대폰 카메라 성능이 좋아서인지 제법 잘 나왔다.

16558029178353.jpg‘연나린.’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파뜩 고개를 들었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멀라이언 파크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고 기억의 수면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16558029178353.jpg‘서울 가면 자주 좀 보자.’

  도윤완 부사장이 건넨 말이었다고는 상상도 못 할 대사.

16558029094644.jpg‘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은 나린은 곧장 되물었었다.

16558029178353.jpg‘부르면 두 번씩 말하게 하지 말고 바로바로 나와, 좀.’

  충고의 형식을 빌려 말하면서도 윤완의 얼굴엔 희미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웃었다, 분명. 그가. 도윤완 부사장, 그 냉혈한이. 하늘 끝까지 번졌던 분수쇼의 불빛보다 더 따스한 색으로 물들었던 그의 얼굴. 그새 많이 가까워졌단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자주 부딪혔던 만큼 정이라도 든 건지.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는 사람이다. 미지의 행성에서 날아온 운석처럼 그를 구성하는 물질이 무엇인지 단 하나도 규명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선물한 휴가도, 케이크도, 팔찌도 전부 다 고맙고 따뜻한 기억으로 자리매김했다.

16558029094644.jpg‘그렇네. 생각보다 받은 게 많았구나, 내가……. 그 사람한테.’

이번에 서울에서 만나게 되면 툴툴거리는 건 좀 줄여볼까? 깨닫지 못하는 사이, 윤완을 그리는 나린의 얼굴엔 살포시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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