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내 세상으로 들어와 줘서2021.08.20.
나린을 돌려보내고 윤완도 막 출근 준비를 마칠 즈음 보고 메일이 도착했다. - ‘PK 백화점 윤재오 전무 귀국 일정 금주 금요일로 확인됐습니다.’ 윤완의 이마에 물결이 일었다. 똑같은 금요일 귀국. 이대로라면 재오와 나린이 또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 공항에서건, 비행기에서건. 윤완은 곧장 답장을 했다.
[연나린 대리 귀국 다음 주 월요일로 미루라고 해요. 싱가포르 법인 판관비 분석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라고 하고.]
*** 호텔로 돌아간 나린은 정신없이 씻고 머리도 다 말리지 못한 채 출근을 했다. 오전에 현지 직원들과의 인터뷰 일정이 빽빽이 잡혀 있었다. 오후에는 사업 양수도 계약서를 놓고 재무 주재원과 검토 보고서 초안 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박 부장의 추가 업무 지시 메일이 날아왔다. 그것도 마냥 행복해야 할 점심시간에. - ‘연 대리. 간 김에 싱가포르 법인 판관비 분석 보고서 간략히 정리해서 올리도록. 출장 일정은 미뤄서 월요일까지로 하고. 그럼 수고.’ 고작 하루 늘려주고 판관비 분석 보고서? 이건 꼼짝없이 주말 출근을 하라는 거다. 모바일 메일함을 닫은 나린은 두 손으로 꽉 머리를 감싸쥐었다.
“왜 그래, 연 대리?”
옆에 있던 추 과장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걱정을 했다.
“추가 업무 지시를 받아서요, 방금. 출장도 하루 미루라고.”
“진짜? 와. 그 팀도 너무하네. 안 그래도 할 일 많은데.”
“망했어요.”
꿀 출장이 될 거라더니. 민하 과장님도 틀릴 때가 있구나.
“힘들면 우리 팀으로 옮겨요. 연 대리, 탐나는 영업 인재던데.”
고 부장이 끼어들며 넉살 좋게 웃는다.
“제가요?”
나린은 어리둥절했다.
“응. 술 그렇게 마시고도 멀쩡하잖아. 영업은 술 잘 먹으면 장땡이야.”
“아, 부장님. 요샌 그런 거 별로 안 중요해요.”
고 부장의 케케묵은 영업인재론에 추 과장이 대신 부끄러워하였다.
“무슨 소리야.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암암리에 다 통하게 돼 있어.”
두 사람의 실랑이에 껴서 나린은 어느 쪽 편도 들지 못하고 곤란한 웃음을 웃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래 가장 힘든 한 주가 될 거라며, 내심 괴로워하면서. *** 추가 보고서 때문에 야근을 하다 보니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매일 호텔과 회사만 왕복하느라 서울에 있는 건지 싱가포르에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사이 작은 변화가 생겼다. 부서 후배로부터 나린의 신분을 전해 들은 고 부장과 추 과장의 태도가 서먹하게 변한 것이었다. 여전히 친절하긴 했지만 전과 같은 시답잖은 농담은 자취를 감추고 딱 업무에 필요한 대화만 이어졌다. 그래서 나린은 조금 외로운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토요일. 오늘은 보고서 마무리 작업을 위해 홀로 사무실에 나왔다. 무조건 오늘 다 끝내고 내일만큼은 관광을 다니리라. 싱가포르까지 와서, 더군다나 주말까지 포함되었는데 일만 하다 가는 건 너무 억울하니까. 늦은 오후. 마침내 보고서를 완성해낸 나린이 길게 기지개를 켠다.
‘아아, 홀가분해!’
얼굴 가득 기분 좋은 미소가 색칠되었다. 그 순간 윤완으로부터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감시 카메라라도 설치되어 있는 양 소름 돋는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뭐 해?]
윤완과는 그날 저녁 이후로 다시 마주칠 수 없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말레이시아 공장을 오가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출근해서 회사예요.]
[언제 끝나는데?]
[이제 호텔로 가려고요.]
[그럼 잠깐 보자.]
[네. 어디서요?]
인심 좋게 수락한 건 보고서를 무사히 끝마친 대가로 분비된 짜릿한 아드레날린 덕분이다. 지금 기분이라면 설령 윤재오가 연락을 해온다 하더라도 흔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 보낼게. 후문에서 기다려.]
[네.]
메시지를 마친 나린은 후다닥 짐을 챙겼다. 뿌듯한 마음만큼 환한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 나린이 성큼, 카페로 걸어 들어온다. 밝은 표정을 보자 윤완의 기분도 밝아졌다.
‘행복해 보이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나린을 보며 떠오르는 말들은 반드시 두 번 세 번 검토한 뒤 꺼내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실수를 어떻게 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여기 되게 좋네요.”
나린은 창밖으로 펼쳐진 멀라이언 파크를 보며 감탄했다.
“점심은 먹었어?”
“네.”
“싱가포르 구경은 좀 했고?”
“아니요.”
방금 전까지도 회사라고 한 거 못 들으셨어요? 잇따른 질문들이 직장 상사의 감시처럼 느껴져서 저 깊은 곳에서부터 삐딱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네?”
반전과도 같은 물음에 나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고 싶은 거 있음 같이 하자고.”
내일 윤완은 이곳을 떠나 태국으로 향한다. 그냥 넘어가기엔 나린과 마주친 이 우연이 무척 드물고 귀했다. 추억을 쌓고 싶다. 그게 어떤 방식이든. 나린은 고민을 했다. 이 제안은 뭘까. 나를 친구 비슷하게라도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혼자 놀기 심심한 걸지도. 이렇게 냉정한 사람도 외로울 때가 있나 보지?
“사실 쇼핑이나 할까 했어요.”
나린은 솔직히 대답했다.
“쇼핑, 뭐?”
“어른들께 드릴 기념품을 좀 살까 해서…….”
“그거 말고는?”
“생각 안 해봤어요.”
딴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빴으니까. 윤완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와.”
그가 먼저 몸을 일으키고 나린도 얼른 뒤를 따른다. 큰길가로 나오자 귀신같이 윤완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 윤완은 쇼핑 거리로 유명한 오차드로드로 나린을 데려갔다. 백화점에 갈 거란 예상을 깨고 나린의 걸음은 지하 마트로 향했다.
‘저런 거, 연 회장님이나 세훈인 거들떠도 안 볼 텐데.’
멀라이언이 그려진 초콜릿 상자를 골라 들고 흡족해하는 나린을 보며 윤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다음 행선지는 싱가포르의 상징적인 차를 파는 가게였다.
“다 샀어?”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나린을 보며 윤완이 묻는다.
“네. 근데 여기 너무 좋다. 좀 더 구경하면 안 돼요?”
“그러든지.”
결재가 떨어지자 나린은 경쾌한 걸음으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백화점이 유명한 장소라는 건 방금 전 속성 검색을 통해 알았다. 어느 액세서리 매장 앞에서 나린의 발길이 멈추었다.
“이 브랜드 컨셉이 나만의 팔찌를 만드는 거래요. 아이디어가 너무 좋지 않아요?”
아이처럼 신이 난 나린을 보자, 윤완은 마음이 간질여지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웃는 게 이렇게까지 예쁠 일인가. 이 애가 늘 웃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예쁘게.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여행 갈 때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참을 사 모으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린은 조잘거리며 액세서리 가게를 지나쳤다. 당연히 뭔가 구매할 줄 알았던 윤완은 얼 나간 표정을 했다.
“안 사?”
똑같은 표정으로 나린이 돌아보았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라고 했잖아요.”
순진무구한 눈빛은 그와의 사이에 거리를 벌렸다. 몇 번을 들여다봐도 완벽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할 것만 같은 눈이었다.
‘하루아침에 테라 호텔 손녀가 되는 것보다 더 많이 벌 수가 있나?’
예쁘든지, 신기하든지, 이상하든지,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윤완은 묵묵히 걸음을 되돌렸다.
“어디 가세요?”
한순간에 등을 보이는 그를 나린이 허둥지둥 쫓는다.
“내가 사줄게.”
“……네?”
윤완은 얼떨떨해하는 나린의 반응쯤 본체만체하고 액세서리 진열대 앞에 섰다. 영어로 주문을 하자 점원이 진열대 아래서 은색 뱅글과 참 두 개를 꺼내주었다.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붉은 난초 참과 멀라이언 참. 참을 고정하는 클립과 팔찌의 추락을 막아주는 체인도 덤으로 따라붙었다. 나린이 다급하게 만류했지만 이미 선물을 하리라 마음먹은 윤완에겐 무용지물이었다. 결심은 무조건 현실로 옮겨 놓고야 마는 그였으니까. 점원은 참을 끼운 팔찌를 나린의 손목에 채워줬다.
“잘 어울리네. 그대로 하고 가.”
깨끗한 피부와 잘 어울리는 팔찌를 보며, 윤완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사달라고 얘기한 거 아니었는데.”
“알아. 그냥 사주는 거야. 이 정도는 부담이랄 것도 없어.”
이것도 다현 언니랑 닮아서인가요? 속으로 물었지만 들었을 리 없는 윤완은 묵묵히 계산을 마쳤다. *** 쇼핑을 끝낸 두 사람은 조금 이르게 저녁을 먹었다. 다음 행선지도 윤완이 정했다. 나린도 와본 적 있는 호텔, 마리나베이 샌즈였다. 그냥 와본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룻밤 묵었었지. 여기, 도윤완 부사장님 방에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가 나린에게 룸 키와 쇼핑백을 건네준 뒤 물러갔다. 불쑥 건네어지니 받긴 받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게 뭐예요?”
“수영복.”
“네?”
하고 싶은 게 생겼다고 해서 선물에 대한 보답 겸 함께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수영이었을 줄이야.
“저 수영 못하는데.”
“못해도 돼. 가운 걸치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와.”
목적지가 한층 구체화되었다. 아무래도 인피니티 풀에 가려는 모양이다. 이 호텔 꼭대기엔 호텔을 넘어 싱가포르의 상징과도 같은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호텔을 이루는 세 개의 건물이 커다란 배 모양을 한 수영장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였다.
‘근데, 수영장 한번 가자고 룸까지 빌린 거야?’
비싼 팔찌를 턱 사주질 않나, 고작 수영장 이용에 하루 치 숙박비를 결제하질 않나. 이 세계에 와서 가장 자주 맞닥뜨리는 게 이런 이해 못 할 지출들임에도, 나린은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 나린이 다가오자 먼저 도착해 있던 윤완이 옆 선베드에 놓아두었던 타월을 걷어냈다. 나린은 타월이 떠난 자리에 탈싹 앉으며 머쓱한 얼굴을 했다.
“여긴 수영하는 사람이 없네요.”
죄다 물 안에 멈춰 서서 사진을 찍거나 풍경을 만끽하기 바쁜 모습을 보며 나린이 종알거린다.
“너도 저 끝으로 가서 밑에 내려다 봐봐.”
손목시계를 확인한 윤완이 명령하듯 말했다. 같이 가자는 것도 아니고 매우 일방적인 지시였지만 나린은 순순히 가운을 벗었다. 수영복 차림의 나린을 보자 윤완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린은 그가 시킨 대로 첨벙, 물에 뛰어들었다. 인피니티 풀 끄트머리, 하늘과 맞닿은 벽에 매달려 지상을 내려다본다. 까마득한 높이는 차라리 우주가 가까운 듯한 착각을 일게 했다. 돌연 머나먼 지상에서부터 노랫소리가 들려오더니 화려한 레이저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바다에서는 잘 길들여진 물줄기가 높이높이 솟구쳐 올랐다. 출장 준비를 할 때 얼핏 본 기억 덕분에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스펙트라 분수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린은 지상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형형색색의 분수쇼를 넋 놓고 관람했다. 쇼가 끝난 뒤에도 여운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들뜬 기분이 된 나린이 깡총깡총 선베드로 달려온다.
“너무 예뻐요!”
“좋아할 줄 알았어.”
윤완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로 화답했다.
“부사장님은 왜 안 보셨어요?”
“물 더러워서 들어가기 싫어.”
나린의 두 눈이 동그란 달 모양을 그렸다. 뭐야……. 자긴 더러워서 안 들어가는 물에 날 들어가게 했단 말이야? 이런 무례한 대답이 또 어디 있을까. 나린이 샐쭉해 하는데 윤완이 언제 주문한 건지 모를 진한 오렌지색 음료 한 잔을 건넸다.
“이게 뭐예요?”
나린은 윤완이 내민 음료를 얼결에 받아들었다.
“마셔 봐.”
음료에 꽂힌 빨대를 물고 조심스레 입술을 닫자 상큼한 알코올이 목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와, 맛있어요. 칵테일이에요?”
“응. 싱가포르 슬링. 맛있으면 또 시켜줄게.”
“아니요. 이거면 충분해요.”
나린은 가운을 바짝 여미며 선베드에 몸을 뉘었다. 물에 들어갔다 나오니 으슬으슬 추웠다. 슬링을 한 모금 넘길 때마다 코를 찡긋거리면서도 나린의 표정엔 행복이 흘러넘쳤다. 고작 칵테일일 뿐인데 열심히도 먹는 그녀를, 윤완은 웃음기가 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무런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아도 곁에 두고 싶은 여자. 아무 이유 없이 계속 웃게 만들어 주고 싶은 사람. 낯선 도시, 낯선 하늘 아래.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여기. 너와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떨리고. 설레고. 아무래도 널 만난 것보다 더 큰 행운은 없다는 거……. 이젠 인정해야 할 것 같은데, 연나린. 나린이 오뚝하게 담긴 윤완의 눈동자가 따스함으로 물든다. 고마워, 내 눈앞에 나타나 줘서. 내 세상으로 들어와 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