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처음으로 그를 향해2021.08.17.
혜원은 오랜만에 재오의 전화를 받았다. 혜원의 약혼 얘기가 나오고서는 처음 전화 통화를 하는 거였다. 재오가 전화를 건 목적은 싱가포르행 비행기에서 윤완과 나린을 만난 일을 전하는 데 있었다. 윤완이 나린에게 자리를 양보해줬다는 부분을 핵심으로 강조하여서.
“그게 뭐 별일이라고.”
얘기를 다 들은 혜원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윤완이잖아.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해, 이태준 정혼자에, 연세훈 사촌 동생인데. 윤완 오빠, 그 친구들이라면 끔찍한 거 몰라? 연나린도 그 바운더리에 들어갔나 보지. 죽은 연다현처럼.”
윤완에게 특별한 여자? 이 세상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실만큼은 한 터럭도 의심치 않는 혜원이었다. 그리고 윤완에게 특별한 여자가 생긴다면 그건 반드시 자신이 될 거라고, 근거 모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이 손으로.
[그런가.]
혜원의 말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재오가 싱겁게 넘어왔다.
“근데 좀 거슬리긴 하네. 연다현 없어져서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았는데, 제2의 연다현이라니. 거기다가 혼외자잖아. 입에 올리는 것도 불결해.”
혜원은 지난번 파티 때 일로 제 눈 밖에 난 나린을 떠올리며 말했다.
[왜? 매력적이던데. 외모는 연다현이랑 비슷한 것도 같은데 성격은 전혀 딴판이고.]
“뭐야? 그새 걔한테 관심이라도 생겼어?”
[글쎄.]
“좋으면 빼앗아보든지. 응원해 줄게. 연나린이 오빠랑 잘 돼서 이태준이랑 상관없어지면 윤완 오빠도 더는 걔 안 챙길 거고……. 쌍수 들고 환영이야.”
재오는 제 마음을 다 알면서도 무시하는 혜원 앞에서 한없이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한다, 신혜원.]
“끊어.”
얘기가 귀찮은 방향으로 흐를 것 같자 혜원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나저나 도윤완 이 남자. 출장 기간 내내 연락이란 연락은 모조리, 깡그리 무시 중이다. 보낸 메시지들로만 빼곡한 액정화면에 빈정이 상한 혜원은 제 성질에 못 이겨 폰을 내동댕이쳤다. 탕!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폰은 케이스와 분리되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 나린은 극심한 두통을 딛고 겨우 눈을 떴다. 사방이 캄캄한 공간.
‘여기가 어디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더 버틸 수 없을 즈음 구세주처럼 윤완이 나타났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서 호텔 주소를 알려주었고……. 그리고……. 어떡해……! 안 나, 기억이. 하나도.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울상이 되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마지막 기억이 호텔 주소를 똑똑히 알린 장면이란 점이었다. 그래……. 데려다줬겠지. 도윤완 부사장님이. 나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손을 더듬어 침대 옆 협탁 위 ‘light’ 버튼을 눌렀다. 주위가 빛으로 들어찬 후 덩달아 환해진 시야에 담긴 풍경은 뜻밖에도 너무나 설은 것이었다.
‘뭐야……. 여기가 어디지? 호텔은 호텔인데…….’
한눈에도 제 호텔 방이 아닌 풍경. 너른 공간에 가구와 집기라고는 달랑 침대 하나와 벽걸이 TV가 전부였다. 상황 파악을 위해 밖으로 나가자 또 하나의 공간이 펼쳐진다. 빠져나온 침실과 비슷한 크기에 창가 쪽으로 책상이 하나 놓여 있고 중앙에는 소파와 테이블이 위치해 있었다. 암막 커튼이 묵직하게 내려와 있었지만 침실서 새어 나온 불빛 덕에 또렷하게 확인이 가능했다. 그리고 누군가 소파 팔걸이를 베고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 ……도윤완 부사장님? 나린은 너무 놀라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뭐야……. 여기 설마…….
‘부사장님 방인 거야?!’
*** 윤완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부리나케 침실로 되돌아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초조해져선 저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깨문다. 기억해. 기억해야 해, 연나린.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다가 본능적으로 제 차림새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어제 입고 나갔던 그대로……. 안도하면서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불안감에 침대에 털썩 앉아 이불을 당겨 안았다. 분명 호텔 주소를 말해줬는데, 왜 여기로 데려온 걸까.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발견한 나린은 손을 더듬어 폰을 꺼냈다. 새벽 네 시. 아무리 치안이 좋기로 유명하다지만 그래도 낯선 나라인데 지금 나가는 건 자신이 없다. 나린은 깜빡 잠들 때를 대비해서 일단 알람부터 맞췄다. 그런 뒤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제발 도윤완 부사장님이 그전에 깨지 않게 해주세요.’
*** 불편했던 잠자리 탓에 일찍 깬 윤완은 전신에 뻐근함을 느끼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팔을 단정히 내려뜨린 후, 자석에 이끌리듯 두 눈이 침실과 연결된 문으로 옮겨갔다. 저 안에, 그 애가 있다. 늘 곁에 두고 지켜보고픈 그 애가. 윤완은 어젯밤을 떠올리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젯밤, 방에 도착한 윤완은 나린을 곧장 침대에 눕혔다. 내려놓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몸과 얼굴이 밀착되었다. 중력에 대한 저항이 조금만 늦었어도 의도치 않게 덮치고 말았을 것이다. 서로의 숨결이 볼에 닿는 거리에서 심장이 전에 없이 넘실거렸던 기억. 또릿또릿 빛나던 눈동자를 포옥 덮은 눈꺼풀과 그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 흐트러져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살짝 벌어진 연분홍 입술. 쌔근쌔근, 숨소리가 마음 깊숙한 곳까지 닿았다. 하마터면 안을 뻔했다. 또 충동에 져서. 간신히 이성을 붙든 윤완은 힘겹게 나린의 얼굴에서 눈을 떨어뜨렸다. 하얗고 긴 목선을 따라 내려간 시선이 이번엔 나린의 가슴께에 이르렀다. 블라우스 단추 틈새로 뽀얀 속살이 눈을 사로잡고. 후끈, 열이 오르는 느낌에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이런 유혹쯤 별것 아닌데……. 그런데 왜. 윤완은 재빨리 불을 껐다.
‘그래. 보이지 않으면 괜찮겠지.’
하지만 어쩐지 방을 나갈 수는 없어서 잠시 곁을 지켜 주기로 했다.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손끝이 스치듯 그녀의 볼 끝을 쓸고, 간지러웠는지 그녀가 꿈틀댄다. 정체가 뭐냐, 너는 도대체. 윤완은 애달픈 눈으로 나린을 훑었다. 어둑어둑했지만 불을 끄기 전 눈에 담았던 모습이 깊이 각인되어 선명했다. 한동안 나린의 머리맡을 지키던 윤완은 가슴께까지 내려가 있는 이불을 목까지 잡아 올려 덮어준 뒤 침실을 나왔다.
‘잘 자, 연나린.’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미소가 베개맡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 가볍게 반팔에 슬랙스 차림을 한 윤완이 젖은 머리를 부비며 욕실을 나온다. 별안간, 침실 문이 열렸다. 슬로우 모션을 건 것처럼 매우 느린 속도로. 걸음을 멈춘 윤완은 문이 열린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문을 빠져나온 건 예상대로 나린이었다. 나린은 윤완을 등진 채 살금살금 복도로 난 문 쪽으로 향하였다. 눈앞에서 도망치려는 나린을, 윤완은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디 가?”
“엄마야!”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나린이 자지러졌다.
“아, 부사장님……. 일어나셨네요…….”
돌아보는 눈엔 억지웃음이 가득하다. 이렇게 되지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건만! 소파에 앉은 윤완은 머리카락에 손바닥을 비벼 물방울들을 털어냈다.
“시간도 이른데 이따가 가. 차 불러줄 테니.”
“네? 아, 아니에요. 또 신세를 지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말하면서도 너무 부끄러웠다. 술 먹고 쓰러지는 추태를 보이고 말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윤완에게.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은 나고?”
윤완의 추궁에 나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릿느릿 소파로 왔다.
“대강요.”
“대강, 어디까지?”
“사람들 다 집에 가고 혼자 남았는데, 부사장님이 나타나셨고……. 호텔 이름이랑 방 호수 말씀드린 것까지…….”
근데 왜 여기로 데려온 거죠? 직접 데려다주시기 귀찮았음 누구 시키셨어도 됐잖아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다현 언니 동생인데. 윤완에게는 늘 그렇듯 속마음을 전부 꺼내 보일 수 없었다.
“제대로 말 안 했어.”
기억과 다른 증언에 나린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네?”
“방 번호. 천백까지만 말하고 기절했다고, 너.”
아. 그제야 나린은 여기서 눈을 뜨게 된 전후 맥락을 이해했다.
‘미쳤어, 연나린! 그 정도로 정신줄을 놓다니!’
나린의 기억이 허둥대는 사이. 미니바가 있는 장식장으로 간 윤완은 얼음물 한 컵을 만들어 와 테이블에 놓아 주었다. 나린은 군말 없이 윤완이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실 아까부터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기에 속은 또 어떻고.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에 머리는 또 왜 이렇게 깨질 것 같은지. 몸에 밴 퀴퀴한 알코올 내까지 더해져서 얼른 돌아가 씻고 싶은 생각뿐이다.
“이기지도 못할 술 그렇게 마시는 거, 위험한 짓이라는 생각은 안 해? 그것도 외국에서.”
윤완의 따끔한 충고가 이어졌다.
“해요.”
“근데?”
“괜찮을 줄 알았어요. 이런 적 없었어서.”
“어제는 내가 있었다지만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생각 좀 하고 행동해.”
어제 그 술자리에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생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저도 모르게 냉정한 말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절친 1의 사촌 동생. 절친 2의 가짜 정혼자. 절친 3이 사랑했던 여자의 여동생. 그것만으로도 혼날 이유는 충분하다고, 나린은 그렇게 납득하고 반성을 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한데.”
할 얘기가 그것밖에 없어? 그녀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채로, 윤완은 그저 애타는 시선만을 보냈다.
“그냥…… 다요.”
나린은 어딘지 주눅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의기소침한 모습이 보기 싫어진 윤완은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쿵. 화보를 보는 듯한 환상에 나린의 심장이 바닥을 내리쳤다. 나린은 얼른 창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 너무 어둡다. 두어 개 켜진 간접 조명이 전부라서.
‘커튼이라도 활짝 걷고 싶은데, 멋대로 그러면 실례겠지.’
어스름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윤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 외면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될 것 같았다. 재차 바라본 그는 졸린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새삼 정말 잘 생겼구나.
“부사장님.”
“왜.”
윤완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대꾸했다.
“지난번에 주신 케이크, 감사했습니다. 그날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아서…….”
윤완이 눈을 뜬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까만 머리카락이 하얀 피부와 조화를 이루어 섹시하게 보였다. 남자가 섹시하다는 생각은 처음 해 보는 것 같은데. 쑥스러운 기분에 그만 도망가고 싶었으나, 윤완의 시선은 집요하게 나린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초 불었어?”
하고 싶었던 거, 한 거야?
“네. 할아버지랑 큰아빠랑 큰엄마랑요.”
세훈이 아버지께서 퍽 귀찮아하셨겠네. 윤완의 오른쪽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할아버지께서 특히 즐거워하셨어요. 저도 그랬고…….”
그날을 떠올리자 나린의 얼굴이 미소로 물들었다. 윤완의 가슴이 퉁퉁,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기쁨이 고스란히 전이되는 경험은 처음이라서, 이건 무슨 감정인가, 두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연 회장님 그런 거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많이 변하셨네.”
속내를 감추려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가 커지고 만다.
“세훈 오빠도 그런 얘기 한 적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예전엔 엄청 무서우셨나 봐요.”
“그랬지.”
가족 얘기를 하니 어쩐지 한층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부사장님도 그날 재밌었어요?”
아니. 내가 그날 귀국했던 건 사실……. 사실은.
“어.”
“올 연말엔 다 같이 해 보세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촛불 불기. 서로 고마웠단 인사도 하고.”
“우리 중엔 그런 거 할 사람 없어.”
윤완은 무심히 답했다.
“아.”
주제넘었나. 나린이 입을 다무는 순간 윤완의 눈이 애틋한 빛을 띠었다.
“그러니까 네가 와서 해줘.”
“……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 눈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도윤완 부사장님과.
“올 연말엔 같이 불자고. 촛불.”
뭘까. 이 사람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이 남자는. 처음으로 나린의 심장이 윤완을 향해 뛴다. 세찬 심장 박동에 나린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