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의 품에서2021.08.13.
나린은 착륙과 동시에 쏜살같이 사라졌다. 윤완도 재오도 모두 피하고 싶었던 차에 자리가 앞쪽이었던 게 주효했다. 윤완은 재오를 따돌릴 겸 느지감치 비행기에서 내렸다.
“재무팀 연나린 대리, 언제까지 휴가인지 알아봐요. PK 백화점 윤재오 전무 귀국 일정도.”
공항을 빠져나오며 뒤따르는 수행 직원들 중 리더급 부장에게 이른다.
“네, 부사장님.”
“윤재오 전무 귀국 일정 알아보는 건 비밀리에.”
그룹에서 엄선한 보좌진이기에 일 처리가 수준급일 테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당부했다.
“네. 걱정 마십시오.”
자신감 넘치는 부장의 답을 뒤로한 그는 대기 중이던 세단에 몸을 실었다. 그가 두 사람의 스케줄을 확인하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혹시라도 이런 우연이 반복돼서 두 사람이 또 만나게 될까 봐.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해두지 않고서는 업무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나린이 공항 밖으로 나오자 싱가포르의 더운 공기가 기습하듯 일제히 달라붙었다. 다행인 건 실내는 어딜 가나 냉방 시설이 풀가동된다는 점이었다. 나린은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갔다. 법인에서 직원을 보내 픽업하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영어도 통용되고 치안도 좋은 곳이니 굳이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짐을 풀 여유도 없이 노트북만 달랑 꺼내 출근 준비를 한다. 호텔 밖으로 나온 나린은 선두에 선 택시에 올라탔다. 폰에 저장된 법인 주소를 기사에게 보여주자 택시는 그 길로 목적지를 향해 내달렸다. *** 법인에 도착한 나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법인장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현지에 파견돼 있는 재무 주재원이 안내를 해 주었다. 그런 뒤 사업 3팀 고영철 부장과 추정환 과장이 상주 중인 5번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나린을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연 대리. 드디어 숫자 까막눈 탈출이네.”
“일주일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고영철 부장의 거한 환영사에 나린도 상냥히 응했다.
“그래요. 우리도 잘 부탁해요.”
“연 대리는 호텔이 어디예요? 우리랑 같은 데 아니랬죠?”
영업인 아니랄까 봐 추 과장이 붙임성 있게 말을 건넨다.
“네. 거긴 만실이라서…….”
“여기서 멀어요?”
“택시로 15분 정도요.”
“아. 우리 호텔보다 살짝 거리가 있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재무 주재원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등장했다.
“법인장님께서 오늘 저녁 하자고 하시는데, 괜찮으시죠?”
“오. 연 대리님 덕에 또 맛있는 것 얻어먹겠네.”
고 부장의 얼굴이 밝아지자 추 과장은 철없는 상사를 향해 눈을 흘겼다.
“저희가 지금 그럴 때예요? 야근해도 부족할 판에.”
“저녁 한 끼인데 뭐 어때? 하루 정도는 맛있는 거 먹으면서 쉬어 가자고.”
태평한 관리자와 속 타는 실무자의 전형적인 대화를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나려 해서 나린은 다문 입술에 꽉 힘을 주었다.
“뭐…… 연 대리님도 왔고 하니까 먹긴 해야겠네요, 저녁.”
나린의 존재를 인지한 추 과장이 수긍하며 물러났다. 재무 주재원은 그걸 승낙으로 알아들었는지 별말 없이 회의실을 떠났다. 나린은 노트북을 켰다. 밝아오는 화면을 보니 비행의 피로가 덩달아 짙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별일 없이, 이대로 마무리됐으면 하고 빌었다. *** 나린의 바람대로 첫 출근은 별다른 일 없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로컬 인터넷 연결만도 한참 걸려서 업무가 가능한 환경이 됐을 땐 이미 저녁 시간이었다.
“우리끼리만 가나? 법인장님은?”
이동 중인 우버 안에서 고 부장이 물었다.
“법인장님은 먼저 출발하셨어요.”
“아. 이거 예의가 아닌데.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려야지.”
고 부장은 옛날 사람답게 의전에 예민한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근데…….”
재무 주재원이 말끝을 흐리고,
“근데, 뭐요?”
뒷말이 늦춰지자 추 과장이 답답한 티를 낸다.
“오늘 CFO께서도 출장을 오셔서요. 아무래도 동석하시지 싶은데요.”
날벼락 같은 소식에 고 부장과 추 과장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린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대리님?”
추 과장은 울상을 넘어 죽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아연한 사람은 나린이었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지금 도윤완 부사장님은 아시아 법인 순회 중이고……. 같은 비행기를 탔다는 건 싱가포르에 간단 얘기고……. 나는 도윤완 부사장님이랑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고…….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단 하나의 결론. 윤완의 목적지도 바로 이 싱가포르 법인이라는 것.
“……저도 몰랐어요.”
대답하는 나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아니, 대리님 경영지원실 소속 아녜요? CFO 출장 일정도 몰라요?”
“네. 공유를 못 받아서…….”
고 부장은 황급히 자신의 옷차림부터 돌아봤다.
“어떡하지? 근처에 넥타이 살 만한 곳 없어요?”
“법인장님께서 편하게 저녁 먹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그러셨어요. 이럴까 봐 CFO께서 미리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고.”
재무 주재원의 답변에도 차 안은 이미 대혼돈이었다. 도윤완 부사장, 그는 단순한 CFO가 아니질 않은가? 도일 그룹의 창시자 도문형 회장의 손자. 도일 그룹의 실질적 총수 도일현 부회장의 외동아들. 그룹의 차차기 후계자. 오너 일가와의 저녁 식사라니. 상상만으로도 손발이 덜덜 떨렸다. 나린은 윤완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윤완이라면 나린이 싱가포르에 온 목적 정도는 손쉽게 알아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이 저녁 모임에 올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 자리는 일부러 만든 자리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뭐지. 자기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지 과시라도 하겠다는 건가.’
윤완이 베풀었던 무수한 친절에도 냉소적이던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나린은 여전히 비뚤어진 시각으로 윤완을 재단했다. 아무튼 이로써 오늘 하루 별일 없길 빌었던 것도 수포로 돌아간 것 같다고, 나린은 조용히 실망을 했다. *** - ‘연나린 대리는 현재 싱가포르 법인 출장 중이고, 금주 금요일에 귀국하는 걸로 돼 있습니다.’ 보고 메일을 확인한 윤완은 나린과 만날 계획부터 세웠다. 휴가가 아닌 출장이라면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법인장에게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면서 격려 차 본사 출장자들도 부르자고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나린이 빠져나갈 걸 대비해 자신의 동석 사실은 알리지 말라고 했다. ‘직원들이 부담을 가질까 봐’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싱가포르의 랜드마크,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 꼭대기 바로 아래층에 위치한 씨푸드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에 윤완과 법인장이 마주 앉아 있다. 두 사람은 내일부터 본격화될 윤완의 출장 일정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곧 재무 주재원이 본사 출장자들을 데리고 룸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사업 3팀 고영철 부장입니다.”
가장 먼저 인사한 사람은 처세와 의전에 능한 고 부장이었다. 순서를 빼앗긴 재무 주재원이 옆에서 황망해 했다. 재무 주재원과 추정환 과장까지 자기소개를 마치고, 소개가 따로 필요 없는 나린은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룸 안엔 두 개의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윤완과 법인 인력들을 위한 테이블 하나. 본사 출장자들을 위한 테이블 하나. 윤완과 같은 테이블이 아니란 걸 안 본사 출장자들의 얼굴에서 단박에 구김살이 펴졌다. 이는 가급적이면 평사원들과 말을 섞지 않으려는 윤완의 배려였다. 한두 마디 실수로 편견이라도 갖게 되면 그 직원에게는 억울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는 자신이 지닌 힘을 잘 알았고 칼 같은 제 성격이 불러올 수 있는 참사에 대해서도 이처럼 민감했다. 저녁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이 맞는 자리를 찾아 앉은 뒤 음식이 나왔다. 윤완은 법인장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맞은편 테이블을 곁눈질했다. 이렇게 눈앞에 데려다 놓은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 그러다가 심기를 거스르는 장면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고 부장과 추 과장이 번갈아 나린의 잔을 채워주고 있는데 문제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었다. 고 부장과 추 과장은 오랜 영업으로 다져진 엄청난 주량을 자랑했다. 나린은 분위기를 깨지 않도록 그들의 속도에 맞춰 연신 잔을 비워내고 있었다. 윤완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나린을 꺼내오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한 테이블에 앉을걸. 배려라고 했던 자신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해본다. *** 나린도 고 부장과 추 과장이 주는 술을 대책 없이 날름날름 받아먹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대학 때부터 한 번도 필름이 끊겨 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여독도 쌓이고 시차도 있는 상황에서 알코올의 위력이 배가 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나린은 강한 정신력으로 꿋꿋하게 버텨내었다.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순 없다는 일념으로 꾹 참았다. 덕분에 고 부장과 추 과장의 눈에 비친 나린은 한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연 대리, 술 잘 마시네. 영업해볼 생각 없나?! 하하.”
신나게 먹고 마시다 보니 긴장이 풀린 고 부장이 호탕하게 웃어댔다. 반대편에서 윤완이 노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 윤완의 숙소는 이곳,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이었다.
“부사장님. 안녕히 가십시오.”
“오늘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핫.”
“영광이었습니다, 부사장님!”
떠들썩한 배웅 속에 윤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로비로 내려온 뒤에는 법인장이 제일 먼저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떠났다. 같은 방향인 재무 주재원 또한 그와 동행하였다. 추 과장은 연신 2차 얘기를 하는 고 부장을 택시 안에 밀어 넣고 걱정스레 나린을 쳐다봤다.
“연 대리, 정말 혼자 갈 수 있겠어?”
술 몇 잔으로 제법 친근해진 말투에 나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갈음하였다.
“연 대리 가는 거 보고 가야 되는데, 부장님 때문에. 미안해. 내일 봐.”
추 과장은 변명을 남기고 떠나갔다. 흐리멍덩한 눈을 한 나린이 다음 택시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간다. 두어 발짝 뗐을 즈음 걸음을 삐끗하고 말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거세게 잡아당겼다. 예고 없이 가해진 힘에 빙그르 돌아선 나린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픽 쏟아졌다. 나린의 볼이 너른 가슴팍에 부딪히고. 낯설고 단단한 감촉에 놀란 나린은 오뚝이처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애써 정신줄을 부여잡은 그녀가 그를 올려다본다. 천만다행으로…… 아는 얼굴. 나린을 걱정한 윤완이 방에 돌아가지 못하고 몰래 뒤따라 내려온 것이었다.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던 윤완은 어떻게 하면 직접 나린을 호텔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던 차였다. 최악의 경우 누가 보든 어쩌든 나설 셈이었는데, 우연인지 운인지 다 가버리고 나린만 홀로 남았다.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윤완 입장에선 천운이었다. 한계에 다다라 있던 나린은 윤완을 보자마자 맥이 풀렸다. 윤완의 얼굴이 눈에 담긴 순간…… 왜인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그라면. 도윤완 부사장이라면.
‘가든스 호텔…… 1127호…….’
마지막 정신력을 발휘하여 호텔 정보를 알렸다. 됐다. 이제…… 쉴 수 있겠지. 힘들었는데……. 정말…… 다행이야. 세상이 순식간에 암흑으로 뒤덮였다.
“가든스 호텔…… 천백…….”
여기까지 말하고 정신을 잃는 나린. 그의 품 안에서. 얼결에 나린을 받아든 윤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신 차려.”
나린을 붙든 팔을 몇 번 흔들어 보았지만 이미 깨어날 상태가 아닌 듯했다. 윤완은 체념하고 두 팔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었다. 번쩍, 나린을 안아 든다. 힐끔힐끔, 행인들의 눈총이 날아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린을 안은 채로 재빨리 로비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 그제야 한숨 돌리고 품에 안긴 나린을 내려다본다. 곱게 감긴 두 눈. 발그레 상기된 양 볼. 메이크업이 다 지워져 색이 바랜 입술. 그럼에도 숨 막히게 아름다운 여자. 무의식중에 더 꽉 끌어안고 말았다. 정말이지 가만 내버려 둘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면서.